▲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영화를 즐기는 방식은 제각각이기 마련인데 MCU 마니아들은 판타지 세계에서 얻은 카타르시스를 통한 대리만족이 가장 클 것이다. 그런데 그걸 만드는 작가들은 꽤 용의주도하게 다수의 관객은 파악 못할 진지한 플롯을 구축한다. 있지도 않은 미국의 신화를 유럽의 신화에 더하고, 심리학과 철학을 뼈대에 곁들여 거대한 서사를 완성함으로써 진한 여운을 남긴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에 관객들이 그토록 열광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이어져온 일련의 긴 여정을 마감하는 결론에 대한 궁금증과 더불어 그동안의 대서사시에 대한 감사의 표시일 수도 있지만 소수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의 마지막 장을 덮는 특별한 의식 같은 경험 때문일 수도 있다. 이 작품은 존재론으로는 하이데거적이고, 염세주의로는 쇼펜하우어적이다.​

이 글은 이미 영화를 본 사람만 읽을 것을 권장한다. 하긴 마니아들은 이미 N차 관람 중일 테니 무관하겠다. MCU는 단순히 만화책을 영상화한 오락물 차원을 넘어선다. 할리우드의 상업적 지향점을 정확하게 읽고 탄착점을 명확하게 설정했지만 그 속에 담긴 신화와 철학만큼은 웬만한 예술영화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유럽이 할리우드를 힐끗거리는 이유다.​

‘어벤져스’의 주인공들은 모두 트라우마가 있다. 토니는 중동 테러 집단에 무기를 팔아 재벌이 된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주인이지만 테러 집단에 붙잡혔다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뒤 무기 생산을 중단하고 아이언맨이 됐다. 그 회사를 세운 아버지는 괴한에게 암살됐는데 알고 보니 범인이 캡틴 아메리카가 목숨처럼 아끼는 친구 버키였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다.

▲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 스틸 이미지

분노조절장애의 브루스는 헐크로 변하면 미친놈이 된다. 천둥의 신 토르는 이복누나를 죽였고, 입양 동생 로키와 다투다 왕위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 주인공은 신이거나, 초능력자이거나, 돈으로 신적인 존재로 업그레이드됐다. 하지만 ‘인피니티 워’에서 모든 게 무너진다. 타노스가 핑거 스냅으로 우주의 모든 생명 중 절반을 소멸시키면서 어벤져스가 붕괴된 것.

타노스는 그리스신화의 죽음의 의인화된 신 타나토스다. 연애와 세상을 증오한 음울하고 냉소적인 성격의 쇼펜하우어다. 그는 인구 과잉으로 머지않아 모든 생명체가 사라질 것을 우려하고 고뇌한 끝에 6개의 인피티니 스톤을 차지함으로써 전지전능의 힘을 갖춘 뒤 개체 수를 절반으로 줄이기로 작심한다. 단 한 번도 사리사욕을 탐한 적 없는 그의 인식론이다.

그는 과업을 끝마친 후 전 부하들을 뒤로 한 채 ‘정원’에 홀로 칩거, 왕관을 내려놓고 맨발로 은퇴생활을 즐기고 있다. 헤시오도스와 파르메니데스는 에로스를 ‘만물이 산출되는 원초, 창조자, 원리’라고 찬미했지만 말년의 쇼펜하우어는 시간이 청춘의 불을 꺼준 데 대해 감사했다. 즉 염세주의는 곧 낙천주의라는 아이러니다. 타노스는 쇼펜하우어의 신격화다.​

그런 면에서 타노스는 ‘왓치맨’의 오지만디아스와 똑같다. MCU가 창조한 미국의 신화는 그리스신화의 제우스를 연상케 하는 오딘의 후계자 토르를 의인화한다. 부모와 로키마저 잃고 존속살해까지 했으나 타노스에게 혼쭐난 뒤 결국 자신의 무능력만 확인한 그는 북유럽에 조성된 새 아스가르드 마을에서 왕위를 발키리에게 물려준 뒤 알코올중독자가 돼있다.

▲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 스틸 이미지

눈앞에서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주인공들은 물론 지구촌 자체가 허무주의에 휩싸여있다. 캡틴 아메리카는 생존자들과 함께 마치 알코올중독 치유를 위한 모임 같은 갱생 회합을 하며 산다. 토니는 페퍼와 결혼해 딸을 낳고 전원주택에서 산다. 호크아이는 가족을 잃은 분풀이로 세계 각국을 돌며 악당들을 섬멸하는 행위로 살인을 정당화하는 일그러진 삶을 산다.

양자 영역에서 살아 돌아온 앤트맨은 그렇게 무기력하게 목적의식을 잃은 주인공들에게 삶의 의미를 리부팅해준다. 그들은 사라진 절반의 인구를 되살리기 위해 ‘시간 강탈 작전’을 펼치고, 과거에 머무는 그 과정에서 아버지(토니), 옛 연인(캡틴 아메리카)을 만나 회한과 회포를 풀고 과거의 자신을 만나 치열하게 싸운다. 실존주의와 존재론의 화해 혹은 전쟁이다.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향한다. 저마다 살려고 발버둥 치지만 결국 죽음은 곧 오게 돼있다. 그걸 알면서도 생존에 몸부림치는 건 실존주의고, 전생, 현생, 후생을 믿고 받아들이는 건 하이데거의 존재론이다. 캡틴 아메리카와 네뷸라가 과거의 자신을 넘어서는 건 현존재(지금의 나)가 도래할 존재(죽음, 영생, 회귀)와 만날 준비가 됐다는 걸 의미한다.

토르가 과거에서 재회한 어머니에게 몇 시간 뒤 죽을 그녀의 미래를 알려주려 하자 그녀가 말을 막으며 “자기 자신으로 살라”고 조언하는 것 역시 ‘기재(본래성)하면서 현존(지금)하는 도래(영생하는 본래성)의 존재’라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부분적 결론이다. 타노스를 언급하는 헐크와 “그 이름은 여기서 금기”라고 입을 막는 토르의 시퀀스도 미국적 신화다.

▲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 스틸 이미지

토르는 전통 있는 유럽의 신이고, 헐크는 미국이 최근 만들어낸 돌연변이다. 고대 때부터 신앙으로 전래된 전통을 과학적 유전자 조작으로 만든 현대적 상상력의 산물이 지배하는 아이러니! 일부 관객은 이번에 헐크의 활약이 미미하고, 그 비주얼이 노인인 것에 불만을 표시한다. 그런데 헐크를 길들여 내면에 받아들인 브루스의 초월은 바로 니체의 ‘극복인’이란 심오함이다.

니체가 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듯, ‘어벤져스’는 미국의 신화를 위해 유럽의 신을 사람으로 격하시키고 그 동상이 있던 자리에 헐크를 위버멘쉬로서 우뚝 세웠다. 타노스는 그 자체가 죽음이다. 그가 느긋한 은퇴생활을 즐긴다는 건 다분히 하이데거나 쇼펜하우어적인데 토르가 이미 죽인 그를 아이언맨이 또다시 죽인다는 건 그리스신화에 대한 도발, 아니 정면 도전이다.

이런 미국의 자랑과 신화창조는 캡틴 아메리카가 매조진다. 마지막 제 나이대로 변한-본래적 자기, 혹은 현존재를 수용한-그는 ‘스타워즈’와는 또 다른 미국의 신화이자 그것의 자화자찬이다. 루소주의를 살짝 차용한 자연법의 선포다. ‘어벤져스’의 중심은 이름 그 자체로 미국적인 캡틴 아메리카와 미국식 패권주의의 상징인 아이언맨이다. ‘엔드게임’은 그 확인일 따름이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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