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 사진=국가보훈처 영상 캡처(신규식 선생)

1912년 상하이의 가을밤. 한 젊은 청년이 모자를 푹 눌러쓰고 김신부로 인근 신천지역에서 서성인다. 담배를 피울까 말까 고민하다가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 불을 붙인다.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는다. 좁다란 골목길을 따라 걷는 발걸음이 무거워보인다. 그러나 곧 비장한 모습으로 초라하게 생긴 집으로 들어간다. 낡은 책상과 의자에 오며 가며 걸터 앉았다 일어선다. 잠시 상념에 빠진다. 파르르 떨린 입술에서 뭔가 내뱉는다. ‘마음이 죽어버린 것보다 더 큰 슬픔이 없고, 망국(亡國)의 원인은 이 마음이 죽은 탓이다. 우리의 마음이 곧 대한의 혼이다. 다 함께 대한의 혼을 보배로 여겨 소멸되지 않게 하여 먼저 각자 자기의 마음을 구해 죽지 않도록 할 것이다.’

신규식, 3.1운동과 상하이임시정부의 주춧돌을 놓은 사람이다. 그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을 기획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계자’로 평가받는다. 나라를 위해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을 만큼 불 같은 성격의 소유자다. 그런 과정에서 한쪽 눈을 잃었다. 그래서 호를 예관(睨觀)이라 했다. 흘겨볼 ‘예’자인데 일본놈들을 흘겨보겠다는 뜻에서 그렇게 정했다. 그가 초기 임정을 중국 상하이에 뿌리내리게 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 은/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이 목숨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종로의 인정(人定)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두개골로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기뻐서 죽사오며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상록수’의 작가 심훈이 일제 강점기때 조선광복을 염원하며 쓴 시다. 1960년대 세계적인 시학 이론을 세운 C. M. 바우라(영국 옥스포드대 교수)는 그의 책 ‘시와 정치’에서, 놀랍게도 한국의 심훈을 얘기한다. 당시 세계는 한국이 어디에 붙어있는 땅덩어리인지도 잘 모를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심훈의 시 ‘그날이 오면’이야 말로, 세계 저항시의 으뜸이라고 평가했다.

광복은 글자 그대로 ‘빛을 되찾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일제에 의해서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지 통치를 받고 있는 상태는 곧 암흑이며 이에 대한 대치관념으로 통한다. 따라서 광복은 나라를 되찾고 스스로를 다스리는 국가가 있는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오는 것을 의미한다. 논리적인 개념이 아닌 국권을 회복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말하자면 민족독립의식이며, 국권회복의식이며, 자주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이후부터는 한국인의 정치의식 속에서 ‘광복=왕권국가회복’이라는 의식이 종국적으로 청산되었고, 광복과 더불어 우리가 가져야 할 나라, 즉 정권형태나 정치·사회제도를 현대 정치사상에 입각해서 생각하게 됐다. 광복운동의 역사는 곧 이러한 현대 정치사상, 다시 말해서 시민적 민족주의사상이며 그 중심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다.

우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떠올릴 때 상하이를 대표적으로 떠올린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태동했고 이후 여러 곳을 옮기며 활동한다. 이동경로는 이러했다. 상하이(1919년 4월~1932년 5월)-항저우,자싱(1932년 5월~1934년 10월))-난징, 전장(1934년 11월~1937년 11월))-창사(1937년 12월~1938년 7월)-광저우, 퍼산(1938년 7월~1938년 10월)-류저우(1938년 11월~1939년 4월)-치장,충칭(1939년 5월~1945년 11월) 등을 거쳐 광복을 맞는다. 이동과정에서 임시정부 인사들은 한 곳에 집중해서 있기보다 분산해서 거주했다. 일제의 눈을 피해서이기도 하지만 도시 지역보다 주변 지역이 거주비가 싸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가장 컸다.

▲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회

2019년 1월 상하이 영안백화점 옥상에 있는 기운각(綺雲閣, 비단 구름의 누각) 앞에서 1921년 신년회 기념사진을 찍은 것이 최근 공개됐다. 사진에는 신규식, 신익희, 김구, 안창호 등의 얼굴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있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물이었다. 그렇다면 임시정부 탄생지가 왜 상하이였을까. 근대 개화기부터 한국인들이 드나든 주요 도시 중 하나가 상하이였다. 처음에는 인삼 장사를 비롯한 상인들이 왕래하다가 점차 정치적 목적을 가진 인사들이 드나들었다. 그러다가 1910년 나라를 잃자 독립운동가들이 드나들면서 상하이는 한국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도시가 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자료집 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던 김희곤 안동대 교수는 상하이에서 출발하게 된 특징 중 하나가 조계(租界), 그러니까 주로 개항장에 외국인이 자유로이 통상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에 있었다는 사실을 ‘임시정부 시기의 대한민국 연구’라는 책에서 말한다. 1845년 영국 조계가 만들어졌고 미국은 성공회 주교가 나서서 1848년 홍커우(虹口) 일대를 거류지로 장악했다. 그리고 1849년 프랑스 조계가 만들어졌다. 나중에 미국과 영국은 공동조계로 통합관리됐다.

프랑스 조계

이런 가운데 한국인들에게 주목을 받은 지역은 단연 프랑스 조계였다. 프랑스는 자유와 평등을 이상으로 하는 국가이기 때문에 조계 안에서 비교적 간섭을 덜 받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일본의 주권이 미치지 않아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프랑스 조계를 중심으로 활동하기에 용이한 편이었다. 프랑스 영사관이 신변보호를 해줄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었다. 따라서 독립지사들이 이곳으로 자연스럽게 집결하게 됐다는 것이 김 교수의 말이다. 게다가 상하이는 망명객, 위험인물, 낙오자, 부패분자, 낭인호객 등 잡다한 인물들이 모여들었으며 이와 동시에 한국을 비롯해 말레이지아, 베트남, 인도, 태국 등 여러나라 애국지사들이 이 틈에 끼여 있어 신분노출이 쉽지 않다는, 즉 익명성이라는 장점도 있었다. 이처럼 상하이는 자유의 도시이며 평화의 이상향이나 마찬가지였다.

1920년대초 상하이는 중국무역의 50% 가까이 이루어진 곳이다. 그것은 좋은 지리적 위치 때문이다. 세계와 중국을 이어주는 다리역할을 한 셈이다. 무역의 중심이었던 만큼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고 상하이만이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1930년대 상하이는 ‘오리엔탈 헐리우드’라고 할 만큼 영화산업이 발전했고 이에 따라 음악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영화배우이자 가수인 저우 쉬안은 상하이 영화계의 아이콘으로 유명해지기도 했다. 이런 문화환경으로 동남아와 유럽 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상하이에서 태어나 김구, 이동녕, 이시영 등 독립운동가들의 품에서 자란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은 최근 발간한 자신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1920년대 상하이는 애국지사들에게 천혜의 망명지이자 항일투쟁의 근거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 당시 우리 임시정부는 상하이 주재 프랑스 조계내에 청사를 두고 항일투쟁을 벌였다. 상하이는 민족지사들에게 눈물과 애환의 현장이기도 했다. 백범 선생의 부인이 둘째 아들 김신을 낳고 폐병으로 생을 마친 곳도 상하이다. 그런데 이들과 별개로 사업가나 모리배들에게 상하이는 ‘기회의 땅’이기도 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수많은 한국인들이 상하이로 거너가 새 삶을 개척했다.”

상하이가 독립운동 기지로 시선이 모아진 것은 1912년에 결성된 ‘동제사’(同濟社)가 상하이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가 효시가 되면서였다. 이후 박달학원(1913), 신한독립당(1915), 신한청년당(1918) 등을 거치면서 1919년 3.1운동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파리에서 열린 강화회의가 결정적 계기가 됐다. 1918년 11월 독일이 항복함으로써 전쟁을 마무리짓고자 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상하이 지역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이 회의를 통해 독립을 달성할 수 있는 기회로 판단하고 대표자를 뽑는 과정에서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결국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각도 대의원 30명이 모여서 임시헌장 10개조를 채택했으며 이틀 뒤 한성임시정부와 통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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