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미녀와 야수>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월트디즈니가 1992년 내놓아 흥행에 크게 성공한 30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을 실사화한 판타지 뮤지컬 ‘미녀와 야수’(빌 콘돈 감독, 2017)는 513만여 명의 국내 관객 수에서 보듯 매우 각광받은 작품인데 프랑스 작가 보몽 부인의 소설(1756)이나 장 콕토에 의한 최초의 영화(1946)와는 좀 다르다.

원작에선 거상 모리스가 전 재산을 잃고 야수의 성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됐는데 막내딸 벨이 부탁한 장미꽃 한 송이를 꺾어 야수의 노여움을 산 후 자신의 목숨과 벨을 바꾸겠다고 약속했다. 여기선 발명가가 됐다. 마냥 착하기만 했던 벨은 책을 좋아하고 자의식과 호기심이 강한 인물로 바뀌었다.

두 언니는 사라졌고, 왕자(야수) 역시 야수가 된 이유는 사악한 요정과의 결혼을 거절해서가 아니라 파티에 참석한 한 여자의 추레한 외모를 보고 판단한 외모지상주의 때문이라고 바뀌었다. 원작의 신사적인 매너는 사라지고, 절망감 때문에 히스테리컬한 인격으로 변했지만 착한 심성만은 그대로다.

마을에서 제일 잘난 청년 장교 가스통(루크 에반스)은 막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온 뒤 오만함이 극에 달해있다. 온 처녀들이 그의 구애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온 청년들은 그에게 존경심과 부러움을 굳이 감추지 않는다. 죽마고우 르푸(조시 게드)는 심하게 아부하며 그의 자만심을 하늘 높이 띄워준다.

▲ 영화 <미녀와 야수> 스틸 이미지

가스통은 자신만만하게 자기 아내는 당연히 벨이라고 우기지만 똑똑하고 아름다운 벨은 아버지와 살고 있는 이 작은 마을에서 벗어나는 모험을 통해 운명적인 사랑을 만날 것을 꿈꾼다. 그러나 어느 날 아버지가 행방불명이 되자 숲을 헤매다가 야수의 성에 들어가 아버지를 구하고 억류된다.

야수는 성의 왕자였고 성내 모든 가구, 집기, 식기 등은 그를 모시는 식솔들이었다. 그러나 왕자가 한 초라한 노파를 홀대한 탓에 그녀의 저주를 받아 변한 것. 노파는 장미꽃 한 송이를 놓아두고 떠났는데 그 꽃송이가 모두 떨어지기 전에 야수가 진정한 사랑을 받게 돼야 본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제 꽃잎은 몇 장 남지 않았고, 험악한 외모의 야수를 진심으로 사랑해줄 여인이 나타날 가능성이 희박하다. 그러나 자존감이 강하고 인격이 고매한 벨은 야수와의 신경전에서 결코 주눅 들지 않고 대등하게 맞섬으로써 신경질적이고 공격적이던 야수로 하여금 착한 본성을 되찾게끔 하는 데 성공한다.

외모는 그대로지만 착한 왕자의 내면을 되찾은 야수는 더 이상 벨을 구속하지 않고 마을로 돌려보낸다. 효심 강한 벨이 모리스가 위기에 처한 걸 알았기 때문이다. 마을로 돌아온 모리스는 가스통의 결혼 제안을 거절했다. 이에 격분한 가스통이 그를 미치광이로 몰아 정신병원에 억류시키려 하는 것.

▲ 영화 <미녀와 야수> 스틸 이미지

이 실사는 애니메이션으로서 최초로 골든 글러브 작품상을 받고, 아카데미와 골든 글러브의 음악상, 주제가상을 휩쓸며 완성도와 작품성을 인정받은 애니메이션에 비해 재미와 완성도 측면에서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우선 진정한 아름다움의 기준을 묻는 원작의 주제의식에 대해 매우 충실하다.

그 근간은 ‘해리 포터’ 시리즈를 뛰어넘어 어느덧 성숙한 여인으로 커버린 왓슨의 아름다움과, 벨을 자립심 강한 캐릭터로 바꾼 작가의 필력이다. 뭣보다 지성의 오랜 논제인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을 매우 쉽게 풀어낸 철학적 고민이 돋보인다. 왕자를 야수로 바꾸는 노파는 처음엔 마녀처럼 비친다.

하지만 중간쯤 가면 오히려 야수가 마녀사냥에 희생되는 마녀적 존재로 그려지고, 종국에 가면 노파는 마녀가 아니라 창조주와 다름없는 이미지로 우뚝 선다. 외모지상주의와 마녀사냥을 교묘하게 결합해 외모와 금전이 사람의 가치와 인격을 만드는 천박한 현대 자본주의의 이면을 통렬하게 비웃는 것.

우리는 세상을 사는 데 돈은 꼭 필요하지만 많은 돈이 삶의 목표는 아니라고, 잘생기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외모가 인격을 결정하는 게 아니니 내면의 아름다움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고 귀가 따갑게 교육받았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실생활에서 그 도덕률이 적용되는 사례와 장소는 극히 드물다.

▲ 영화 <미녀와 야수> 스틸 이미지

가스통은 선동에 능한 정치인과 스타의 환유다. 그가 저잣거리를 휘젓고 다닐 때 마을 처녀들은 수치심 따윈 동네 개한테 맡긴 듯 꼬리를 살랑거린다. 그냥 픽션일 따름이라고 보기 힘든 건 정치인이나 연예인을 흡사 종교처럼 숭앙하는 적지 않은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교’, ‘연예인교’가 그렇다.

만약 벨이 유물론자였다면 그녀는 뒤도 안 돌아보고 가스통의 유혹을 넙죽 받아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아의식이 강하고, 모험정신이 투철하다. 희미한 어린 시절 파리의 기억을 잊지 않고 있는 그녀는 안정된 시골 생활에서 벗어나 거친 숲을 뚫고 대도시로 나아가 진취적인 일과 만나길 꿈꾼다.

여기서 그녀는 운명론자임을 드러낸다. 자신은 고향인 파리 같은 큰물에서 놀 사람으로 태어났고, 그런 전진을 통해 신이 정해준 짝을 만날 것이라고 믿는 것. 야수에 대해서는 철저한 관념론자다. 처음엔 살짝 겁을 먹긴 하지만 이내 그의 험한 외모에 주눅 들지 않고 둘은 등근원적인 존재임을 일깨운다.

이 영화는 페미니즘의 교과서다. 동네 처녀들이 몸단장을 할 때 벨은 책방을 찾는다. 야수의 성에서는 고서 앞에서 행복한 표정이다. 아버지 대신 희생하는 시퀀스는 잔 다르크를 연상케 한다. 눈앞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식의 관념론적 메시지는 이성, 지성, 교양을 중시하는 주지주의의 정수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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