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 사진=국방TV 화면캡처

국내외 동포를 모두 관할하기 위한 기구로 연락기관인 교통국을 두고 지방행정제도인 연통제를 실시했으며 국외에 거류민단을 설치했다. 교통부 내에는 지부를 설치하고 전국 각 군에 교통국을, 면에 교통소(交通所)를 신설했으며, 군자금 모집, 국내 정보수집, 정부문서 국내 전달, 인물발굴 및 무기수송 등의 활동을 했다.

연통제에 따라 서울에 총판을 두고 각 도·군·면에 독판·군감·면감을 두었는데, 국내에는 9개도 1부 45개군에 조직을 두고 만주에는 3개 총판부가 있었다. 연통제의 업무는 법령 및 공문의 전포, 군인 모집, 시위운동 계획, 애국성금 갹출(醵出)운동 등 다양했다. 연통제와 교통국은 주로 국내 북서지방에 집중됐고 강원도와 충청도 일부에서는 대한독립애국단, 중부 이남에는 대한민국 청년외교단이 임무를 대행했다.

재정기반을 위해 구급의연금과 인두세를 걷고 국내외 공채를 발행했으나 이중 공채는 아일랜드에서 발행한 500만 달러의 공채만 성공했다. 초기 재정의 대부분은 재미교포의 성금으로 유지되었으며, 뒤에는 장제스(蔣介石)의 원조금으로 충당됐다.

또한 일본의 침략사실과 한국역사의 우수성을 설명하기 위해 1921년 7월 사료편찬부를 설치하고 9월말 전4권의 ‘한일관계사료’(韓日關係史料)를 완성하는 한편 박은식이 지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간행했다. 기관지로 ‘독립신문’, ‘신대한보’(新大韓報), ‘신한청년보’(新韓靑年報), ‘공보’(公報) 등을 간행하여 독립정신을 홍보하고 소식을 국내외 각지에 알렸다. 해외의 구미위원부에서는‘Korea Review’, 파리통신부에서는 ‘La Coree Libre’를 발행했다.

군사활동으로는 1920년 상하이에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 비행사양성소, 간호학교 등을 세워 군사를 양성하는 한편 중국 군관학교에 군인을 파견하여 교육시키고 만주에 있는 독립군을 후원하였다. 충칭시기에는 광복군을 창설하여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과 독일에 각각 선전포고를 하고 군대를 연합군의 일원으로 미얀마, 사이판, 필리핀 등지에 파견했다. 1944년에는 중국과 새로운 군사협정을 체결하고 독자적인 군사행동권을 얻었다. 1945년에는 국내 진입작전의 일환으로 국내정진군 총지휘부를 설립하고 미군의 OSS(미전략사무국)부대와 합동작전으로 국내에 진입하려는 계획을 진행하던 중 8·15광복을 맞았다. 이와 관련 김구는 ‘백범일지’에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이 소식을 들을 때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몇 년을 애써서 참전을 준비했다. 산둥반도에 미국의 잠수함을 배치하여 서안훈련소와 부양훈련소에서 훈련받은 청년들을 조직적 계획적으로 각종 비밀무기와 무전기를 휴대시켜 본국으로 침투케 할 계획이었다. 국내 요소에서 각종 공작을 개시하여 민심을 선동하며 무전기로 통지하여 비행기로 무전기를 운반해서 사용하기로 미국 육군성과 긴밀히 합작을 이루었는데 한 번도 실시하지 못하고 왜적이 항복한 것이다. 이제껏 해온 노력이 아깝고 앞일이 걱정이다.”

1945년 8월초 우리 광복군이 3개월과정의 OSS 특수훈련을 마치고 본토공략을 준비하고 있는 터에 불과 며칠을 앞두고 일본이 항복해버렸으니 땅을 치면 통탄해 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임정과 미군 일본공격 계획

▲ 사진=국방TV 화면캡처

일본을 공격하려는 임정과 미군측은 1943년부터 시작됐다. 당시 충칭 임시정부의 외무부 및 선전위원회 소속으로 대외 섭외 업무를 맡고 있던 안원생(안중근 의사의 바로 아래 동생 안정근의 장남)의 노력이 컸다. 그러던 1945년 3월 김학규 광복군 제3지대장은 미 제14항공단 사령관 첸놀트 장군과 면담을 갖고 한미군사합작 계획에 대해 구체적인 실시방안에 합의했다.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김자동 회고록).

1. 한미 양국은 공동의 적인 일본군을 박멸하기 위해 상호협력하여 공동작전을 전개한다.
2. 한국 광복군은 미군으로부터 무전 기술과 기타 필요한 기술을 훈련받고 적진과 한반도에 잠입하여 연합군 작전에 필요한 군사정보를 제공한다.
3. 미군은 공동작전에 필요한 모든 무기 및 군수물자를 한국 광복군에 공급한다.
4. 미군은 한국 광복군에게 육,해,공군 교통통신의 편의를 제공한다.

이런한 합의를 토대로 3개월 과정의 특수훈련이 끝나고 8월 7일 김구와 이청천 광복군 총사령관은 시안에 주둔중인 2지대 본부로 가서 이범석 지대장과 함께 미국 대표인 도노반 소장을 만나 특수훈련 요원들의 국내 진공작전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이들은 8월 20일 이전에 함경도로부터 남해에 이르기까지 국내 전역에 잠입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8.15 항복으로 열성을 다해 준비했던 광복군의 한반도 진공작전은 결국 물거품이 되었고 임정과 광복군은 비탄의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임시정부를 이끈 주요 인물

1919년 3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대한국민의회란 임시정부가 출범한다. 손병희가 대통령, 이승만이 국무총리, 이동휘는 군무총장, 안창호는 내무총장에 선출하고 대한국민의회는 각국 영사관에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했다’라고 통보한다. 하지만 대한국민의회는 8월에 스스로 해체한다.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통합하기 위해서였다. 서울의 한성 임시정부도 상하이 임시정부와 통합을 한다.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보냈던 신한청년단, 무장투쟁을 이끈 대표적 단체인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도 모두 임시정부의 지휘를 받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입법부(의정원), 행정부(국무원), 사법부(법원) 등 삼권분립 이념을 채택해 본격적인 민주공화제를 지향했다. 출범 당시에는 대통령제를 채택했는데 초기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됐다. 9월 11일에는 임시헌법을 제정, 공포하고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하는 한편 내각을 개편하였다. 그래서 초대 임시 대통령에 이승만, 국무총리에 이동휘가 선출됐다. 임시정부는 연통제와 교통국이란 비밀 조직을 통해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을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구축을 했고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위해 파리에 가 있던 김규식을 전권 대사로 격상시켜 독립 청원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하지만 외교전의 성과는 미약했다. 유럽과 미국이 임시정부의 요구에 귀를 귀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제의 탄압이 심해 연통제와 교통국도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결국은 임시정부 안에서 치열한 노선 싸움이 일어나게 된다.

▲ 사진=국방TV 화면캡처

이동휘는 소련으로 부터 자금을 지원받은 것 때문에 논란이 돼 결국 1921년 정부를 떠나게 됐다. 이승만의 ‘독재’도 문제가 됐으며 임시정부의 형태는 사실 의원내각제에 더 가까웠지만 이승만은 그런데도 대통령제를 고수하려고 했다. 자신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단체들이 뭉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탄핵을 했고 1926년 이후에는 공식적으로 대통령제를 폐지하게 된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상하이에 머문 시기는 1920년 12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다. 미국에서 원격조정으로 정부를 지휘하던 이승만이 상하이로 오게 된 이유는 임시 대통령과 정부 사이에 나타난 갈등관계를 정리하여 원만한 정국 운영을 도모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1925년 탄핵을 당한 뒤 박은식이 2대 대통령을 맡아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김구는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가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을 맡았다. 임시정부에는 경찰 조직도 있었는데 중요인물 경호, 청사 경비 등 임시정부 수호 임무뿐 아니라 교민 보호, 일제 밀정 차단, 일제 침략자와 반민족행위자 처단 등 현대 경찰의 경비·경호·정보·보안기능에 해당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임시정부 경찰 활동은 경무국장이 총괄했다.

미국에 있던 안창호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얘기를 듣고 상하이로 달려와 임시정부를 지키는데 앞장선다. 그러면서 1921년부터 1923년 사이에 국민대표회의를 추진하고 한국독립당 결성을 주도한 뒤 좌우합작, 중국인과의 통일운동에 나서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상하이 개척자 신규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도록 터전을 마련했으며 광복의 그날까지 임시정부를 지킨 인물은 김구, 이시영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일제의 탄압에 맞서 견디며 임시정부 청사를 무려 여섯 번을 옮기면서 버터냈다. 하지만 모든 독립운동가들이 이런 식의 투쟁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김원봉이 만든 의열단은 일제 식민통치 기관을 폭파하거나 고위 인사들을 암살했다. 김원봉은 얼마 전 개봉된 영화 ‘암살’에서 그 활약상을 보여주기도 했다. 영화는 1933년 상하이와 경성을 배경으로 친일파 암살 작전을 둘러싼 독립군과 임시 정부 대원, 그들을 쫓는 청부 살인 업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로 2015년 7월 개봉해 1000만 관객을 돌파할 정도로 관심을 끌며 임시정부 대원들의 활약상을 알게 해주었다.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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