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알라딘>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디즈니가 또 일을 해냈다. 애니메이션으로 성공한 걸 발판 삼아 실사화한 ‘정글북’, ‘미녀와 야수’에 이어 ‘알라딘’(가이 리치 감독)의 국내 흥행에 성공한 것. ‘알라딘’은 지난주 말 ‘악인전’을 제치고 박스오피스 1위에 올라 디즈니의 마법의 힘을 재확인해줬다. 할리우드의 당연한 영악함이 빛났다.

원작 ‘알라딘과 마법의 램프’는 아라비아 문학의 결정판 ‘천일야화’ 중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얘기로 유대 왕 솔로몬의 반지와 단지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 마법의 반지를 낀 모로코의 마술사가 궁극의 마력을 지닌 램프를 얻기 위해 멀리 중국의 15살 불량소년 알라딘을 찾아온다.

비밀 장소의 결계를 뚫고 램프를 꺼낼 수 있는 사람은 알라딘뿐이었던 것. 그러나 이를 눈치챈 알라딘은 마술사를 속여 반지를 얻고 램프까지 차지한 뒤 승승장구해 술탄의 외동딸 부도르 공주와 결혼한다. 그러자 마술사는 궁전을 아프리카로 옮기고 알라딘은 술탄에게 처형당할 위기에 처한다.

성장한 알라딘은 더 이상 불량소년이 아니라 정의로운 청년이었다. 다행히 민중의 지지로 목숨을 건진 뒤 반지의 정령의 힘을 빌려 아프리카에 도착, 공주와 램프를 되찾는다. 마술사는 술탄에 의해 처형되고, 알라딘은 형의 복수를 하러 온 마술사의 동생마저 쓰러뜨린 뒤 술탄의 후계자가 된다.

▲ 영화 <알라딘> 스틸 이미지

램프와 반지의 요정은 이슬람교가 포교되기 전 중동인들이 믿던 정령인 진 중에서도 악령인 이프리트다. 술레이만(솔로몬) 왕이 자신이 이끄는 선한 진과 함께 이프리트의 자유를 박탈, 구리 단지에 봉인한 뒤 결계를 걸었다는 전설이 있다. 램프의 요정은 이프리트 중에서도 가장 광폭한 마리드다.

미국은 영국적 전통과 유럽의 정서, 그리고 신대륙 정착 이후 탄생한 새 세대의 극히 미국적인 신념이 공존한다. 오랫동안 유럽의 지성을 지배해온 그리스 문화에서 벗어날 새로운 역사, 철학, 이념 등이 절실했다. 프래그머티즘이란 미국식 철학을 만들어 실용주의를 전진 배치한 건 그런 이유일 듯.

미국의 헤게모니는 기독교와 유대인에게 편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할리우드는 그런 것쯤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라비아의 문화마저도 할리우드化한다. 돈만 된다면 종교나 인종 따윈 문제가 될 게 없다는 실용주의적 시각인데 사실 그 저변엔 니체의 가치전도, 즉 가치철학도 깔려있다.

‘천일야화’ 속의 램프는 ‘낡은 구리 램프’다. 이는 유대 역사 속의 솔로몬의 반지와 단지에서 빌려온 ‘영묘한 제왕 술레이만이 여러 용기에 악령을 봉인해 세계 곳곳에 숨겼다’는 아라비아의 신화다. 최근의 리부트 버전 ‘헬보이’는 아서 왕이 육시 한 마녀 수장 니무에를 여러 곳에 봉인했다고 설정했다.

▲ 영화 <알라딘> 스틸 이미지

이런 시퀀스는 중국 무협지에는 이루 셀 수도 없다. 미국이 유럽의 신화와 역사를 슬쩍 흉내 내거나 유럽이 아틸라에게 전쟁의 신 아레스의 검을 쥐여준 것이 뭔 대수일까? 실용주의가 최고! 유럽엔 ‘빛나는 게 모두 황금은 아니다’라는 속담이 있다. ‘알라딘’은 그것의 니체式 전도에 다름 아니다.

‘형편없어 보이는 게 사실 가장 가치 있다’는 교훈을 주는 옛날 얘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만연한다. ‘흥부전’에서는 미물인 제비 한 마리가 엄청난 부 혹은 재앙을 안겨주고, ‘신데렐라’에서는 쥐는 운전기사가, 호박은 슈퍼카가 된다. 관념론과 유물론으로 다투는 유럽과 달리 실용주의적 전도다.

니체는 기독교에 정면 도전하며 전 유럽의 가치전도를 부르짖음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혼란스럽던 유럽에 가치철학을 열었고, 칸트는 독자적 문화가치를 외치며 자연과학에 맞섰다. 이에 비해 미국의 가치철학인 실용주의는 모든 절대자를 배척한다는 점에서 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니체답다.

또 사상의 진리를 행위의 결과로 결정하는 점에서는 유물론적이다. 기독교 사상이 지배하는 미국이 이슬람의 교리나 그 문화를 활용하거나 애용하는 것의 옳고 그른 여부는 ‘알라딘’의 흥행처럼 결과가 결정한다는 행동주의다. ‘300’의 크세르크세스와 ‘알라딘’에 흑인을 캐스팅한 것쯤은 문제 될 게 없다.

▲ 영화 <알라딘> 스틸 이미지

솔로몬의 반지에 적힌 ‘이것 또한 지나가리니’라는 테제는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교훈이다. 지금 괴롭다면 위로지만 만약 주체할 수 없게 기쁘다면 주의하란 경고다. 마술사와는 상대도 되지 않을 듯했던 알라딘이 역전하고 출세 가도를 달리지만 얼마 안 가 모든 걸 잃고 처형될 위기에 처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그는 모든 걸 되찾는다. 그 배경은 바로 정의를 통해 구축한 대중적 인기다. 어디서 많이 보고 들은 성공 스토리 같다. 영국의 전통에 반발해 새 땅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지만 결국 그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만든 칼뱅주의자들의 신대륙 정착기를 연상케 한다.

‘알라딘’의 램프 요정이 미국 흑인 윌 스미스고 알라딘이 이집트인인 건 신화의 악령을 현대가 인간의 노예 노릇을 하는 요정으로 만든 것과 다름없다. 미국은 이미 1965년 우주비행사가 한 행성에서 만능의 요정 지니가 들어있는 호리병을 주우면서 사랑과 부를 함께 얻는 드라마를 만든 바 있다.

미국 심리학의 주류인 행동주의는 ‘동물은 타고난 행동과 주관적 체험이 없으며, 모두 학습된 행위’라고 주장하며 대상을 의식이 아닌 오직 자극과 반응의 관계와 그의 구성체계로 한다. 모든 얘기가 결국 가족으로 귀결되고 그게 흥행으로 연결되는 디즈니가 가장 미국적인 행동주의자인 건 당연하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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