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이승만]

▲ 사진=kbs 방송화면 캡처

아직 겨울 찬바람이 남아 있는 2019년 3월이다. 동작동 현충원에서 나와 바람을 타고 인왕산 둘레길로 들어섰다. 등산객들이 오르내리는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하얀 머리에다 지그시 감은 눈, 약간 일그러진 표정의 얼굴,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산을 오른다. 한복을 입은 할아버지가 산을 오른다는 흔치 않은 모습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끗 쳐다본다. 할아버지는 천천히 걸었다. 상념에 잠긴 모습이었지만 주변에서 새소리가 날 때마다 잠깐 서서 나무 사이로 하늘을 쳐다본다. 그는 인왕산 전망대에 이르자 잠시 멈추고 서울 시내를 바라본다. 무엇을 알았을까. 고개를 끄덕인다. 다가가 인사를 드렸다.

-연락드린 기자입니다.
“아, 반갑소”

-광복 이후 초대 대통령때부터 3대를 지낼 때와 서울은 어떻게 달라졌다고 생각합니까.
“엄청납니다. 저 높은 빌딩하며 쉼없이 달리는 자동차들, 특히 거리의 사람들 표정이 많이 달라졌어요.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이 역동적이고 활기찹니다. 선남선녀들이 데이트하는 모습도 그렇구요. 내가 있을 때는 상상하지도 못했습니다. 전쟁 복구하느라 허덕허덕댔고 먹을 것도 제대로 없어 배고품에 굶주렸습니다. 세월이 참 무섭구나 하는 것을 느낌니다.”

-저 아래쪽에 보이는 것이 청와대입니다. 옛날 이 대통령께서 근무할 때는 경무대라고 했지요.
“맞습니다. 고려 숙종 때였죠. 남경 '이궁(離宮)'에서 역사가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궁은 조선 태조 임금이 경복궁을 창건하면서 후원(後園)으로 이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일제시대에는 총독 관저, 미 군정시기에는 사령관 관사로 변했지요. 광복이 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 내가 ‘경무대’(景武臺)라는 이름으로 명명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했던 것이지요.”

-경무대라는 것은 무슨 뜻이 담겼나요.
“경복궁(景福宮)의 ‘경’자와 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의 ‘무’자를 따서 경무대라고 했습니다온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이름은 본의 아니게 독재의 대명사처럼 인식됐다는 지적이 있어서인지 윤보선 대통령때 ‘청와대’로 개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경무대 시절 인왕산을 가끔 올라오셨나요.”
“답답하고 뭔가 생각할 일이 있으면 북악산이나 인왕산을 자주 왔지요. 남쪽으로 서울시내는 물론 남산의 소나무까지 훤히 보이고 북쪽으로는 저 멀리 북녘하늘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가슴이 꽉 막혀 있을 때 산에 올라오면 시원하게 트이곤 했습니다. 특히 봄에 핀 진달래가 아름다웠어요. 여기저기에서 울어대는 새들의 소리도 듣기 좋았습니다. 특히 북한산 높은 자락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절을 보았을 때 느꼈던 첫인상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속세를 떠난 경건한 분위기 속에 모든 것이 세상사와 단절된 듯 극락에 와 있는 듯했습니다.”

-저쪽 낙산 아래쪽에 이화장이 있습니다.
“아, 그런가요. 잘 있나요?”

-국가지정문화재로 보존돼 관리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광복 직후 살았을 때 배나무가 많았었는데...”

-대통령을 그만 두고서도 잠시 살았지요.
“맞아요. 그때 생각이 납니다. 지금 구경하는 사람이 있나요?”

-예약한 사람들은 관람할 수 있습니다.”
“그거 잘 됐네요.”

그는 산을 오르락 내리락하는 등산객들을 잠시 쳐다봤다.

-등산을 해보셨나요?”
“물론입니다. 그런데 등산복은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 사진=kbs 방송화면 캡처

-운동으로는 택견을 좋아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내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어느날 인기를 끌었던 택견이 시들해졌습니다. 그런 고민을 하던 차에 경호관 송덕기가 함께 시범을 보일 친구를 찾았나 봐요. 그러니까 어릴 적 같이 택견을 배운 김성환을 말합니다. 그는 술로 인해 거의 폐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달리 방도가 없다고 판단했던지 송덕기는 그를 설득하고 같이 연습하여, 마침내 1958년 내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경찰무도대회에서 처음으로 택견을 시범 보이게 됐습니다. 전날 눈이 많이 내려, 원래 장소였던 경무대 뜰을 사용할 수 없게 됐습니다. 그래서 서울 소공동에 있는 유도중앙도장에서 택견 시범식을 가졌습니다. 그 당시 장면이 생각이 나는군요. 김성환이 내지르기를 하면, 송덕기가 회목잽이로 발을 잡은 후 칼잽이로 밀어내곤 했습니다. 이때 한 300명쯤 넘게 모였는데 관중의 찬사를 받으며 성공리에 시범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나는 수고한 김성환에게 격려금을 조금 주었습니다. 그런데 김성환을 그 격려금을 받고 술을 많이 마셨고 결국 사흘 후에 죽었다고 하더군요. 나원 참 죽음이라는 게 무엇인지...”

잊을 수 없는 어머니의 참빗

죽음 얘기가 나오자 그는 잠시 하늘을 하늘을 쳐다본다. 까악 까악 까마귀 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독립운동 시절의 명과 암, 영욕의 세월, 삶과 죽음의 간극 등등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리를 옮겼다. 인왕산 전망대 인근 윤동주 문학관 잔디밭에 작은 의자가 놓여 있다. 앉아서 그의 걸어온 노정을 묻기로 했다.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지내시기는 어떤지요.
“편하게 있습니다. 주로 어머니 생각을 많이 합니다. 살아 있을 때 어머니의 참빗을 품고 다녔습니다. 죽어서도 어머니의 참빗 생각은 한시도 떠나지 않았지요. 참빗은 빗살을 아주 가늘고 촘촘하게 만든 빗입니다. 얼레빗으로 머리를 대강 정리한 뒤 머리카락을 보다 가지런히 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으로 때로는 머리카락의 때나 비듬이나 이 등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하여 사용했지요. 어머니는 그 빗으로 제 머리를 손질해주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낳기 전 두 아들을 먼저 낳았는데 천연두로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삼각산 문수사 천연동굴에서 100일 기도를 하면 틀림없이 아들을 낳는다는 얘기를 듣고 평산에서 서울까지 기도하러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큰 용 한 마리가 가슴에 파고드는 꿈을 꾸고 6대 독자인 나를 낳게 됐습니다. 얼마나 애지중지 키웠는지 생일 때 마다 문수사에 나를 데리고 가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 인연이 있어서 내가 대통령이 됐을 때 현판 글씨를 직접 써주었지요.”

북한산 문수봉 아래에 있는 문수사는 그 주위 경관이 좋기로 소문난 곳이다. 절의 주위에는 보현봉과 비봉이 감싸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한강과 관악산이 펼쳐 있고 더 멀리에는 인천 앞바다까지 볼 수 있다. 이곳에는 문수굴이라는 천연동굴이 있다. 이 동굴에 만들어진 법당이 영험이 있는 기도처로 널리 알려져 있다.

▲ 사진=kbs 방송화면 캡처

-어릴 때 시력을 잃을 뻔한 위기가 있었다고 하던데요.
“그랬습니다. 천연두 후유증 때문에 눈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걱정이 된 어머니가 눈병을 고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소용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서울 충무로에 있는 진고개의 서양인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의사는 안약을 주면서 하루에 세 번씩 눈에 넣어주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한 지 사흘째 되던 날인가 그래요. 갑자기 방바닥의 돗자리가 눈에 보였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지요. 그래서 소리를 쳤습니다. ‘어머니 돗자리가 보여요’라고 말입니다. 그 소리를 들은 어머니는 내게 달려와 와락 껴안았습니다. ‘아이구, 우리 아들 살아났구나’라고 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도 당연히 기뻐했지요. 그래서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안약을 준 의사에게 찾아갔습니다. 아버지는 고맙다며 달걀 한꾸러미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의사는 ‘이건 댁의 아드님에게 더 필요합니다’라고 하면서 만류했습니다. 그때 서양인을 처음으로 만났지요.”

-어릴 때부터 한학에 조예가 깊었다고 하던데요.
“어머니가 저한테 천자문을 가르쳐 줬습니다. 6살 때 천자문을 익히니까 다시 시문작법을 배우게 됐습니다. 그때 쓴 시가 기억이 남니다.”

바람은 손이 없어도 나뭇가지를 흔들고 달은 발도 없는데 하늘을 가르는구나.

-시가 예사롭지 않아 보입니다.
“나는 ‘천자문’을 마친 후 역사 입문서와 기본적인 행동지침을 다룬 ‘동문선습’으로 단계를 높였고 7살되면서 ‘자치통감’을 읽기 시작했으며 18세에는 ‘사서삼경’을 통달했습니다. 어머니는 나에게 첫 스승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큰 서당에서 공부시키겠다고 나를 서울로 데리고 옵니다. 우리 가족은 서울역 근처의 염동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서당이 있는 남산 서쪽의 도동에 정착했습니다. 양녕대군의 위폐를 모신 사당 지덕사(至德司)가 있었지요. 내가 살던 초가집이 우수현 남쪽에 있었는데 그로 인해 나중에 아호를 우남으로 정했습니다. 도동 서당에서 시험볼 때마다 매번 장원을 했지요. 어머니의 유일한 희망은 내가 빨리 과거시험에 합격해서 어려운 집안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13살때부터 과거시험도 여러번 봤으나 떨어졌습니다. 원래 과거시험은 15살때부터 응시자격이 주어졌으나 1887년부터 왕세자 나이와 동갑인 14살까지 허락했습니다. 나는 한 살을 늘여 응시를 했습니다. 그런데 계속 불합격이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신화에 가린 인물 이승만(2002, 로버트 올리버 지음, 건국대 출판부), 이승만과 그의 시대(2011, 이주영 지음, 기파랑), 우담 이승만 연구(2005, 정병준 지음, 역사비평사), 독립정신(2010, 이승만 지음, 동서문화사). 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2009, 유영익 외 지음, 연세대학교 출판부), 김자동 회고록(2018, 푸른역사), 이승만 다시보기(2011. 인보길 엮음, 기파랑), 독부 이승만 평전(2012. 김삼웅 지음, 책보세). 임시정부 시기의 대한민국(2015, 김희곤 지음, 지식산업사)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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