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이승만]

▲ 사진=kbs 방송화면 캡처

영어배우기 위해 배재학당 입학

-6살 때 천자문을 익힐 정도로 공부를 잘했는데 왜 자꾸 떨어졌습니까.
“돈 주고 장원급제하고 대리시험 보고 합격하고, 정말 큰일날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정부의 부패로 돈과 권력이 없이 과거에 합격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방방곡곡 실력있는 젊은 청년들의 꿈이 물거품이 됐지요. 게다가 1894년 갑오경장으로 과거가 폐지됐습니다. 나 역시 삶의 목표를 잃게 됐지요.”

-젊은 나이에 좌절이 컸을 텐데 어떻게 극복했나요.
“그때 도동서당 친구였던 신긍우가 찾아와서 미국 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셀러가 세운 신식학교인 배재학당에 가자고 끈질기게 권유했습니다. 그 친구는 나에게 경전을 암기하는 일에 몰두하지 말고 배재학당에 들어와 현대세계를 공부하자고 했습니다. 그 무렵 나는 청일전쟁으로 국제문제에 관심이 높아져 있었습니다. 저는 영어를 배운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1895년에 배재학당에 입학했지요. 부모한테 알리지는 않았습니다.”

-왜 안 알렸습니까.
“아버지는 유교였고 어머니는 불교였는데 내가 서양 사람이 세운 학교에 다닌다고 하면 반대할 것이 뻔했지요. 아무튼에 배재학당에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방과후에 미국인 교사들을 찾아다니며 궁금한 것을 물으며 영어를 익혔습니다. 입학 6개월만에 신입생들에게 초보영어를 가르치는 조교가 됐습니다. 그러자 선교사들이 한국어를 가르쳐달라고 하더군요. 돈벌이가 생기니 마다할 리가 없었지요. 진고개의 제중원에 의료선교사로 온 조지아나 파이팅 양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받은 20달러라는 큰 돈을 내놓자 어머니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서야 배재학당에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어머니는 그때 천주학은 절대 안된다고 했습니다.”

-배재학당 다닐 때는 어떤 활동을 했습니까.
“배재학당에서 발행하는 학생신문 ‘협성회보’의 편집장을 맡았는데 논조는 정부에 비판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아펜셀러는 학생들이 정부와 충돌하는 것을 막기 위해 기사를 검열하려 했습니다. 나는 학교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신문을 만들고 싶어 했죠. 그러던 중 10년 전에 일본에서 들여온 인쇄기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것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지인 ‘매일신문’을 한글과 영문으로 발간했습니다. 언론인으로서의 첫걸음을 내딛은 셈이지요. 당시 배재학당에는 한글학자 주시경이 다녔는데 주위에서 ‘주시경은 한글을 연구하러 다니고 이승만은 정치하러 배재를 다닌다’고 했습니다. 하긴 열혈 청년들과 어울리면서 국가의 장래를 걱정했으니 그럴만도 했지요.”

-외국인들과도 자주 만났겠네요.
“훌륭한 서양인 교사들을 만났지요. 특히 미국인 노블 박사, 영국인 올링거 박사 등과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들로부터 영어로 된 책과 신문을 빌려 읽었습니다. 제중원의 의료선교사로 나중에 연희전문학교 교장이 된 애비슨 박사와는 매주 일요일 만나서 대화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또 ‘조선역사’를 쓰고 있던 호머 헐버트 박사와 수시로 만나 한국의 문화에 대해 자문을 해주었습니다. 애비슨과 헐버트는 광복 이후 제가 대통령이 될 때까지 옆에서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정치적 자유를 알다

▲ 사진=kbs 방송화면 캡처

-그들과 만나면서 배운 내용이 있다면 어떤 것을 들 수 있겠습니까.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은 ‘정치적 자유’였습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고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갖고 정부를 선택할 권리를 갖는다는 미국인들의 자유주의 사상과 민주주의 제도였습니다. 신분제의 굴레 속에 살아온 저에게는 충격이었지요. 이 무렵 서재필 박사를 만났습니다. 서재필은 1884년에 갑신정변을 일으킨 혁명가의 한 사람으로 쿠데타에 실패한 후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해 의학박사가 된 개화파 지식인이었습니다. 서 박사는 조선왕조에는 역적이 되었으므로 귀국할 수 없었지만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유길준을 비롯한 개화파가 정권을 잡게 되면서 10년만에 중추원 고문 자격으로 미국인 부인과 함께 귀국했지요, 그는 배재학당에서 ‘협성회’를 조직하고 토론을 거쳐 다수결로 합의 이끌어내는 민주주의적인 방식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최초의 조선인으로 1896년 초 주 3회 발간되는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서구소식을 전했습니다. 서재필은 농담처럼 독자 화보 경쟁을 피하기 위해 ‘매일신문’의 발행을 중단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나에게 요청했지만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필립 제이슨이라는 서양식 이름도 갖고 있던 서재필은 배재학당에서 서양사를 가르쳤고 저도 그의 강의를 들었지요. 그가 조직한 ‘협성회’는 배재학당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협회’로 이름을 고치게 됩니다.”

-조선의 구습을 타파해야 한다는 이유로 스스로 상투를 잘랐다고 하던데요.
“상투를 자르는 문제를 놓고 애비슨 박사와 진지하게 논의를 했습니다. 마침내 아버지가 출타한 어느 오후 사당으로 가 조상들의 위패를 꺼내 들고 세상의 변화에 따라 상투를 자르겠다고 말씀 드렸지요. 저는 애비슨의 집으로 가서 상투를 잘랐습니다. 어머니는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어머니는 마음이 아파했지만 결국 받아들였습니다. 그런 충격이 있어서인지 멀쩡하시던 어머니가 몇 달 뒤 갑자기 별세를 했습니다. 이때부터 어머니의 참빗을 평생 품고 살았습니다. 하와이에 갔을 때 이민 온 자녀들을 참빗으로 머리를 빗겨주었고 6.25 전쟁때 고아원에서도 빗겨주기도 했습니다. 나의 부인 프란체스카는 참빗을 보고 이잡는 기계라고 했습니다. 내가 대통령이 끝나고 투병할 때에도 참빗을 보며 어머니와 고국생각을 했습니다.”

이 참빗은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에 있는 ‘이화장’에 보관돼 있다. 1947년부터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거주하던 곳으로서 지금도 고인의 유품이 소장되어 있다. 이곳에는 조각정이 있는데 1948년 8월에 우리나라 건국 이후 초대 내각이 이루어진 유서 깊은 장소이다.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나의 부친은 용모가 좋은 학자(또는 有司)였습니다. 동네사람들에게는 ‘남산샌님’으로 통했습니다. 한때 부자였으나 젊은 시절에 모두 탕진했습니다. 어머니한테 ‘너의 아버지는 여자나 도박에 흥미가 없었지만 친구와 술을 위해 있는대로 모두 내놓았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술은 많이 마셨지만 취하거나 비틀거리는 일은 없었습니다. 만취했을 때에는 얼굴이 창백했으나 천천히 그리고 침착하게 걸었습니다. 아버지는 양반가의 후예로 태어나 선비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선비의 위엄을 잃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가리켜 주위에서 ‘온전한 군자’라고 했습니다. 풍채가 좋고 온화하고 인자한 편이었죠.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애정표현을 잘 하지 않아 저와 아버지가 가까운 정을 나누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가족들이 얼씬도 못하게 하는 사랑방에서 빈객들을 접대했습니다. 두 평도 못될 정도로 작았습니다. 방바닥에 앉아 칠기 탁자를 앞에 놓고 술이나 차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곤 했습니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친구들과의 그런 교유는 생의 큰 위안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당대 양반들과 마찬가지로 족보와 풍수지리에 심취했습니다. 곱게 장정해서 보관하고 있던 24권짜리 족보를 뒤적이는 일이 큰 낙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문의 각 종파는 물론 다른 명문 집안의 가게들까지 줄줄이 외우곤 하셨지요. 어린 저를 옆자리에 앉혀놓고 조상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도 자주 했습니다, 그럴 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실망스러운 모습을 하곤 했지요. 아버지는 저에게 한 시와 동양 고전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그것들을 제대로 암송 못하면 엄히 꾸짖기도 했습니다.”

16살 때 첫 결혼

▲ 사진=kbs 방송화면 캡처

-소년 시절부터 속담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던데요.
“속담 익히기는 것은 훌륭한 공부 중 하나였습니다. 어느 집이나 속담을 귀중한 교훈으로 여겨 경전의 비현실성을 보완하는 지혜로 삼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국이 주변 강대국 틈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 ‘고래 싸움에 새우 등터진다’라는 속담을 자주 인용했습니다. 나와 같이 지내는 친구들이 자주 주고 받은 속담을 예로 든다면 이렇습니다.”

제 앞에 안 떨어지는 것은 뜨거운 줄 모른다.
호랑이가 없는 골에 삵괭이가 왕이다.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
소경이 개천 나무란다.
흥정은 붙이고 싸움은 말리랬다
아는 길도 물어 가라
속히 더운 방은 쉬 식는다
위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모기 보고 칼 빼기

-어떻게 습득하게 됐습니까.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동네 친우들의 어머니한테 자주 들었습니다. 그리고 떠돌이 이야기꾼들에게서 들은 민간 설화들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면서 틀에 박혀진 양반들의 관습보다 서민들의 삶을 보면서 불타는 애국심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한국에서의 첫 번째 결혼은 언제 했습니까.
“16살때였습니다. 그러니까 1891년이죠. 어른들의 주선으로 결혼했지요. 이름이 박승선인데 한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8살 때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는 궁중나인인데 임오군란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외할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 외할아버지가 중매를 해서 결혼하게 됐지요. 결혼 이듬해 아들 태산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사회개혁운동으로 투옥되고 집을 나가기도 해 같이 사는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내가 투옥됐을 때 국왕에게 상소를 올리기도 하고 1주일 동안 대한문 앞에 거적을 깔고 무죄를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수절과부처럼 쓸쓸하게 생활했습니다. 내가 미국에서 수학할 때 옥중동지 박용만 등 두명이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니까 1905년에 조지워싱턴 대학 다닐 때 아들과 재회했지요. 내가 공부하느라 아들을 돌볼 겨를 없어서 워싱턴 타임즈에 다음과 같이 광고를 했습니다.”

학업을 완수할 때까지 아이를 돌볼 가정을 구함. 태산이는 한국의 메시야가 될 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애닳픈 일생.

-그러니까 다른 가정에 아들을 맡길 생각이었군요.
“그렇습니다. 아들을 돌봐줄 가정에 맡기고 싶었습니다. 입양을 해주겠다는 제안도 받았지만  7대 종손 아들을 남의 자식으로 넘길 생각은 없었습니다. 보이드 부인이란 사람이 태산이를 맡아 주었는데, 1년 후 태산은  디프테리아에 걸려 죽었습니다. 아들이 위독하다는 소식에 급히 달려가 다음날 새벽 보이드 부인집으로 당도했습니다. 그런데 전날 7시에 필라델피아 시립병원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때가 아들 나이 14살이었는데 며칠동안 식음을 끊었습니다. 이 일로 부인과 멀어지게 됐고 부인이 서울 도동에 있는 앵두밭을 절에 시주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만나질 못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6.25때 국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공산군 벽보를 뜯다가 처형당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신화에 가린 인물 이승만(2002, 로버트 올리버 지음, 건국대 출판부), 이승만과 그의 시대(2011, 이주영 지음, 기파랑), 우담 이승만 연구(2005, 정병준 지음, 역사비평사), 독립정신(2010, 이승만 지음, 동서문화사). 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2009, 유영익 외 지음, 연세대학교 출판부), 김자동 회고록(2018, 푸른역사), 이승만 다시보기(2011. 인보길 엮음, 기파랑), 독부 이승만 평전(2012. 김삼웅 지음, 책보세). 임시정부 시기의 대한민국(2015, 김희곤 지음, 지식산업사)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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