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블랙 47>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현재 아일랜드는 영국을 가장 가까운 이웃 겸 경제 협력 파트너로 여기고 있지만 영화 ‘블랙 47’(랜스 데일리 감독)의 배경인 1847년은 완전히 달랐다. 아일랜드 왕국은 12세기 후반부터 영국 노르만족의 침략을 받기 시작하더니 1541년 영국의 헨리 8세가 아일랜드 왕을 겸임하면서 식민지가 됐다.

대영제국의 식민지 정책이 극에 달하던 때의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수년 만에 인구 4분의 1이 사라진 암흑의 시기. 영국이 곡물법을 폐지함으로써 값싼 아일랜드의 곡물을 대거 수입하자 기아는 극에 달하고 열병까지 몰아닥친다. 아일랜드의 영국 형사 해나(휴고 위빙)는 반역자를 신문하다 죽인다.

영국군에 징집된 아일랜드인 마틴(제임스 프레체빌)은 탈영한 뒤 고향으로 돌아온다. 가톨릭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여왕에 충성하라는 조건의 수프를 거부한 엄마는 열병으로 죽었고, 형은 사유재산을 지키려다 교수형으로 처형됐으며, 형수만 조카 3명과 무허가 집에 살아남은 걸 알게 된다.

그러나 영국 경찰은 국유지에 침범했다며 그들을 몰아내려 하고, 이에 반항하는 첫째 조카를 사살한다. 형수와 어린 두 소녀는 쫓겨나고, 그걸 말리던 마틴은 경찰서에 연행된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뛰어난 전투력을 갖춘 영웅이었던 그는 단신으로 대여섯 명의 경찰을 죽이고 탈출한 뒤 복수에 나선다.

▲ 영화 <블랙 47> 스틸 이미지

해나는 반역 공범을 밝혀내지 못한 채 용의자를 죽인 죄로 수감 중 군대의 부름을 받는다. 그는 군 시절 마틴의 상관이었던 것.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포프 대위와 함께 마틴의 고향으로 가 현지 군대에서 홉슨 이병을 지원받는다. 마틴은 가장 먼저 가족을 배신한 엄마의 사촌부터 처단한다.

이어 형에게 교수형을 선고한 판사도 같은 방식으로 복수한다. 마틴의 뒤를 쫓던 해나와 포프는 그의 최종 목표가 200년간 그 지역을 지배한 귀족 킬마이클이라는 걸 알고 바짝 긴장하는데. 마틴과 해나의 관계는 ‘지옥의 묵시록’(1979)의 커츠 대령과 윌라드 대위의 상황이 연상될 정도로 닮았다.

미군 사이에서 베트남전쟁의 영웅이던 커츠를 흠모한 윌라드는 미국으로 후송된다.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던 그는 탈영 후 캄보디아 밀림 깊은 곳으로 들어가 원시 부족의 지도자가 된 커츠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고 전장으로 되돌아간다. 결론과 메시지는 상이하지만 양측의 존경심만은 같다.

철저하게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을 공격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큰 공감과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형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도 마틴을 용서하지 ‘못했다’. 마틴은 자의가 아니라 강제로 징집돼 영국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을 따름인데. 해나는 그가 왕이 아니라 전우를 위해 싸웠다고 술회한다.

▲ 영화 <블랙 47> 스틸 이미지

역사는 고대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의 정복욕을 인정하면서도 동방 점령지의 문화를 존중한 인종 융합 정책을 주시하고 있다. 알렉산드로스는 힘으로 정복한 뒤 화합으로 제국을 유지하려 애썼다고 본다. 그러나 중근세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 전쟁은 그런 타협이라곤 전혀 없었다. 오직 살육과 약탈뿐.

영화의 분위기와 색채는 내내 차갑고 어두우며 음울하다. 마틴이 가족의 배신자를 처단한 날 밤 추위를 피하려 찾은 곳은 지붕이 뜯겨나간 집. 형수와 어린 두 조카는 꼭 끌어안은 채 동사했다. 그들은 죽기 전 쐐기풀마저도 구하지 못해 굶을 뻔했지만 마틴 덕에 십여 년 만에 비스킷을 맛볼 수 있었다.

마틴의 옛집이 돼지우리로 재활용되지만 가족들은 허허벌판으로 내쫓기는, 사람이 말이나 돼지만큼도 대접받지 못하는 그런 참담하고 처참한 상황은 아일랜드 민속 악기가 만드는 우울하고 서정적인 배경음악과 어우러져 더욱 관객의 비애를 증폭시킬 듯하다. 영국인도 여왕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홉슨은 킬마이클의 아일랜드 대저택 철문 앞에 장사진을 친 현지인들을 보고 경비원에게 묻는다. 경비원은 곧 영국으로의 수출을 위해 곡물 호송이 있을 텐데 거기서 떨어지는 낱알 하나라도 줍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라고 답한다. 홉슨은 돌발행동을 취하고 해나는 “그래봤자 변할 건 없다”라며 달랜다.

▲ 영화 <블랙 47> 스틸 이미지

포프는 살짝 비아냥대는 신문기자에게 갈라디아서 6장 7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 그대로 거두리라’를 읊는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는 그 충고는 바로 부메랑이다. 탈영병에 이어 연쇄살인자가 돼 피할 곳이 없는 마틴은 미국으로 가겠다고 한다. 미국과 스스로 던진 부메랑에 맞은 영국의 대비다.

16세기 말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해 해상권을 장악한 영국이 더욱 미친 듯이 식민지 개척에 나설 때 청교도 중 비국교파들은 17세기 초부터 신대륙으로 이탈하기 시작했다. 생존을 위한 탈출이자 미필적 고의에 의한 추방이기도. 초기 개척은 가시밭길이었지만 결국 아메리칸드림은 이뤄졌다.

자신의 하녀 중 의외로 어여쁜 한 명을 발견하고 “필시 영국인일 것”이라고 말하는 킬마이클에게 한 현지인은 “영국에서 제일 예쁜 아가씨를 이리로 데려와 현지인처럼 희망과 인간적인 모든 권리를 빼앗은 채 한 달만 살게 하면 과연 그때도 예쁜 영국인으로 보일까요?”라고 뼈아픈 질문을 던진다.

마틴의 “내가 하면 살인이지만 저들이 하면 전쟁이고, 정의며, 신의 섭리”라는 한 마디는 제국주의의 식민지 정책이 얼마나 아전인수인지 깊은 울림을 준다. 후반 영국군의 운구 장면은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감각의 제국’의 패전 후 귀국하는 일본군의 시퀀스를 연상케 한다. 100분. 15살. 상영 중.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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