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생문 사건에 연루되다 [김문 작가]

김문 작가l승인2019.06.19l수정2019.07.02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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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이승만]

▲ 사진=kbs 방송화면 캡처

춘생문 사건에 연루되다

-다시 배재학당 얘기로 돌리겠습니다. 졸업은 언제 하게 됩니까.
“제가 21살 때인 1895년 명성황후 복수사건인 춘생문 사건이 벌어집니다. 을미사변 이후 고립무원의 고종을 경복궁에서 구출하여 정동에 있는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시키고 김홍집 내각의 대신들을 제거하려 했던 사건으로 아관파천의 전조였습니다. 그러나 모의과정에서 정보가 누설되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이 사건과 연계된 것은 배재학당 동창인 이충구와의 관계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의료선교사인 조지아나 파이팅 양의 도움으로 머리에 붕대를 감아 여환자로 변장한 다음 잠시 숨어 있다가 누님이 있는 황해도 평산으로 가서 3개월동안 지냈습니다. 춘생문 사건 재판이 끝난 뒤 1896년 2월 서울로 돌아와 배재학당 내의 ‘협성회’ 토론회를 통해 대중 연설가로 훈련을 쌓는 한편 ‘협성회보’라는 잡지를 통해 근대 언론과 접하게 됐지요. ‘협성회’는 주로 계몽적인 주제부터 정치체제 개혁과 외세배격에 이르는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제 나이 24살 때인 1898년 7월 배재학당을 졸업하는데 졸업식에서 ‘한국의 독립’이라는 제목으로 영어 연설을 했습니다. 박수를 많이 받았습니다. 장차 한국을 이끌어갈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들 했어요. 허허. 어쨌거나 이때부터 청년 개혁가로 활동을 했다고 보면 됩니다.”

-춘생문 사건이 벌어지고 졸업때 영어 연설을 하는 등 사실 배재학당 학생들에 의해 일찍부터 지도자로 지목되지 않았습니까. 이후 어떤 활동을 하게 됩니까.
“배재학당을 졸업한 후에는 한글신문인 ‘매일신문’과 ‘국제신문’을 발간하면서 언론인으로 국민계몽에 나섰습니다. 독립협회에서도 열심히 활동했지요. 그때 독립협회는 서재필, 이상재, 남궁억, 정교와 같은 개화파 지도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조선정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때였는데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을 통해 러시아의 야욕을 맹비난했습니다. 또 만민공동회 같은 군중집회를 열어 정부의 무능함을 비판하고 개혁압력을 넣었지요.”

계속되는 가두 연설, 급진파로 유명

▲ 사진=kbs 방송화면 캡처

-만민공동회에서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1898년 3월 종로에서 제1차 만민공동회가 열렸을 때 나는 가두연설을 했습니다. 인기를 얻었던지 총대의원에 뽑혀 정부에 대한 투쟁에 앞장서게 됐고 이때부터 급진파로 유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1989년 11월 마침내 고종은 독립협회 탄압에 나섰고 서재필을 미국으로 추방시켰습니다. 그리고는 ‘익명서 사건’을 조작해 이상재, 남궁억, 양흥묵을 비롯해 17명의 독립협회 간부들을 체포했습니다.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도입하려고 역적모의를 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윤치호 회장과 함께 배재학당 구내의 아펜셀러 집에 숨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안되겠다 싶어 며칠 뒤 곧바로 밖으로 나와 수천명의 군중을 이끌고 경무청 앞으로 갔습니다. 체포된 독립협회 회원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연좌시위를 벌였지요. 나는 쉴 새 없이 연설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시위현장까지 찾아와 저에게 그만 둘 것을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6대 독자이니 더 이상 말썽 피우지 말고 집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간청을 물리치는 것이 가슴이 아팠지만 이 일은 젊은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펜셀러 박사도 찾아와 그만둘 것을 종용했습니다. 효과가 있었던지 고종은 태도를 바꿔 독립협회 간부들을 석방하고 개화파 성향의 민영환을 의정부 참정으로 하는 새 내각을 구성했습니다. 저는 이때가 가장 보람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독립협회 간부들과 함께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위대한 승리를 쟁취했다고 느꼈지요.

-그것으로 집회는 끝났나요.
“아닙니다. 독립협회는 계속해서 종각과 대한문 앞에서 계속 집회를 열었습니다. 그러자 정부는 급히 ‘황국협회’(皇國協會)를 조직하고 보부상 패거리들을 고용해 독립협회 시위대를 공격하고 집회를 해산시키려 했습니다. 나는 그들의 특별공격 목표였습니다. 보부상들은 무서운 기세로 몽둥이를 휘두르며 시위군중 사이에 난입했습니다. 새로 입각한 대신들도 집회장소에 나타나 해산할 것을 종용했습니다. 황제께서도 정부의 진정한 개혁을 도입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저와 동료들은 이전에도 그런 감언이설로 속아봤기 때문에 말뿐인 약속보다 실제행동을 요구했습니다. 보부상들은 저와 동료들을 에워쌌습니다. 뒤로 도망가다가는 맞아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들의 한가운데를 파고 들어 유유히 배재학당쪽으로 걸어갔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학생들은 환호를 지르며 다시 종로로 나갔습니다. 그날 밤 독립협회 회원 김덕구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시위대는 더욱 흥분됐습니다. 다음 날 거행된 장례행렬에는 수천명의 군중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일이 이쯤되자 고종은 개화파를 달래기 위해 왕의자문기관인 중추원을 운영하겠다고 했습니다. 나는 종9품인 의관이 되었습니다.”

5년 7개월 옥살이

▲ 사진=kbs 방송화면 캡처

-어떤 역할을 하게 됩니까.
“기다리던 중추원 첫 회의가 열렸을 때였지요. 저는 국정개혁의 방법으로 일본에 망명한 개혁파들을 사면하고 박영효를 중추원 의장에 등용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갑신정변으로 역적이 된 박영효를 언급했기 때문에 화가 난 고종은 중추원을 해산하고 중추원의 독립협회 의관들을 체포하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나는 남대문 인근의 감리교 병원으로 피신을 했습니다. 병원에 숨어 지내다가 의료 선교사인 해리 셔먼으로부터 환자를 왕진하는데 같이 가자고 해 따라나섰다가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옥살이를 시작했던 것이지요. 그러던 중 1899년 1월 경무청 고문인 미국인 스트리플링이 주시경과 면회를 왔을 때 권총 두 자루를 몰래 건넸습니다. 그들이 떠난 후 얼마 안돼 옥중 동지와 함께 간수들을 권총으로 위협해 감옥을 빠져나왔습니다. 곧바로 종로에 가보니 시위군중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이때 다시 체포됐습니다. 한성감옥에 끌려온 나는 황국협회 회원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했지요. 탈옥사건에 대한 재판때 고문의 후유증으로 진술도 못했습니다. 다행히 증거물로 제시된 권총이 한 발도 발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져 사형만은 면했으며 대신 종신형과 함께 곤장 100대가 선고됐습니다. 그 형벌을 치르고 7개월동안 손발이 묶인 채 독방에 수감되었다가 일반 감방으로 옮겨졌습니다. 이 무렵 제가 죽었다는 신문기사가 나서 아버지가 시신을 거두러 감옥에 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절망속에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1904년 8월까지 5년 7개월동안 옥살이를 했습니다.”

-감옥은 어떤 분위기였습니까.
“쌀 창고를 개조해 만든 감옥에는 좁은 통로를 사이로 15평정도의 큰 감방이 4개가 있었고 온기라고는 전혀 없는 감방에서 지내게 돼 죄수들은 침구를 알아서 각자 마련해야 했습니다. 바닥은 볏집이 깔려 있었고 죄수들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통로에는 호롱불이 하나 매달려 있었습니다. 다행히 가족들의 면회가 허용되어 그들이 가져온 음식을 먹으며 바깥 소식을 들을 수 있었지요.”

-대개 시위나 사회운동을 하다보면 투옥되기도 하는데 5년 7개월동안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감옥 생활은 저를 사회로부터 고립시켰습니다. 그러나 이때 근대 서양문물을 정확히 파악하고 독자적 사유를 확립하는데 많은 도움을 줬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지만 정치적 격변기였던 이 기간에 옥중에 있지 않았더라면 도미 유학은 불가능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옥중생활을 하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면 감옥소 소장이나 부소장이 수시로 찾아와 얘기를 나누었고 중노동도 면제됐습니다. 그러는 과정에 옥중에 도서실과 학교를 설치해 운영하고 자유롭게 집필활동도 했습니다.”

-그런 대우는 어떻게 해서 받게 됐습니까.
“알고 지내던 선교사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내가 체포된 후 알렌 주한미국공사, 배재학당 교사 겸 선교사 벙커 박사 등이 탄원서를 통해 석방을 요구했습니다. 장로교 교육자 호레이스 언더우드 박사도 감옥으로 찾아와 새로 찾게 된 신앙문제를 논의했으며 애비슨 박사는 의약품을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선교사들 외에 고종의 총애를 받았던 엄비(嚴妃)의 도움도 있었습니다. 엄비는 나의 글을 자주 읽은 독자인데다가 처 박승선과의 관계 때문에 호의를 베풀어줬습니다. 이런 분위기로 옥중생활동안 한문서적 328권, 한글서적 165권, 영문서적 20권 등 모두 523권의 책을 읽게 됐습니다. 또 영한사전을 쓸 정도로 영어에 밝아졌습니다. 특히 내가 옥중에 있으면서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나의 대외관과 정치사상을 집약한 ‘독립정신’을 집필했다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신화에 가린 인물 이승만(2002, 로버트 올리버 지음, 건국대 출판부), 이승만과 그의 시대(2011, 이주영 지음, 기파랑), 우담 이승만 연구(2005, 정병준 지음, 역사비평사), 독립정신(2010, 이승만 지음, 동서문화사). 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2009, 유영익 외 지음, 연세대학교 출판부), 김자동 회고록(2018, 푸른역사), 이승만 다시보기(2011. 인보길 엮음, 기파랑), 독부 이승만 평전(2012. 김삼웅 지음, 책보세). 임시정부 시기의 대한민국(2015, 김희곤 지음, 지식산업사)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김문 작가  gamsam10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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