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비스트>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프랑스 영화 ‘오르페브르 36번가’(올리비에르 마샬 감독)를 리메이크한 ‘비스트’(이정호 감독)는 선입견을 비판하는 인식론과 인생을 해체하는 허무주의의 연무가 가득하다. 인천 중앙경찰서 강력1팀장 한수(이성민)와 2팀장 민태(유재명)는 한때 파트너였지만 현재 과장 승진을 다투는 경쟁자다.

2팀은 한 여고생 실종사건을 맡았다. 그러나 실적 없이 17일 만에 피해자가 처참한 변사체로 발견된다. 한수는 종찬(최다니엘)과 함께 피해자의 마지막 행선지인 성당으로 가 부제를 체포한다. 그의 집에선 여성의 속옷이 발견된다. 뭔가 미심쩍은 민태는 부제가 범인이 아님을 밝혀내고 풀어준다.

마약 브로커 춘배(전혜진)가 한수를 전화로 불러낸 뒤 그가 보는 앞에서 자신을 3년간 복역하도록 만든 브로커 조두식을 사살한다. 그녀는 당황한 한수에게 여고생 살인의 진범과 그 주소까지 가르쳐주겠다며 자신의 알리바이를 조건으로 내세운다. 다음날 한수는 과장에게 용의자 정보를 전한다.

과장은 1팀과 2팀을 합동수사팀으로 꾸려 한수에게 지휘권을 주고 그들은 기동대와 함께 범죄의 온상인 창신아파트로 출동한다. 오늘날까지 한수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배경엔 별거 중인 국과수 부검의 아내 정연(안시하)의 조력과 춘배, 바를 운영하는 오 마담(김호정) 등 정보원의 도움이 있었다.

▲ 영화 <비스트> 스틸 이미지

창신아파트엔 토착 폭력조직부터 중국인 폭력조직, 태국인 마약 카르텔 등 다양한 범죄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경찰이 노리는 용의자는 화려한 전과의 괴물 같은 최철기와 그를 도왔거나 최소한 범행을 방조했을 것으로 의심되는 그의 아버지 최원식이다. 과연 그가 진범일까? 잡을 수 있을까?

영화엔 전체적으로 회의주의와 허무주의가 짙게 흐른다. “누구나 마음속에 짐승 한 마리 키우고 있다”는 대사다. 겉으론 ‘출세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라이벌 한수와 민태 중 누가 괴물인가’가 플롯의 축이지만 실은 춘배, 고 마담, 폭력조직 수괴, 경찰 조직까지 모두 괴물을 키운다.

종찬의 “형, 세수했어?”라는 질문에 한수는 “어차피 내일 할 건데”라고 답한다. 한수가 불법, 탈법을 저질러가며 용틀임을 하는 건 형식적으로는 진급을 위한 것인데 그게 오직 출세 때문이라고 보긴 어렵다. 정연은 명민하고 미모까지 갖췄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 한수와의 사이가 나쁘지도 않다.

그런데 왜 별거 중이고 곧 이혼서류를 제출할 예정인가? 한수는 오 마담과도, 춘배와도 내연관계였던 듯하다. 범죄 도시에서 바를 운영하는 여자와 범죄 세계에서 생존해야 하는 여자에게 강력계 형사는 경계의 대상인 동시에 제 편으로 만들면 매우 든든한 방어벽이다. 그런 입장은 한수도 마찬가지.

▲ 영화 <비스트> 스틸 이미지

오 마담은 “그렇게 힘들면 그만두라”고 위로한다. 한수의 육체는 습관적, 기계적으로 일을 해왔다. 그건 범죄를 향한 만유인력의 법칙이고, 조직의 처세술에 대한 중력의 법칙이었다. 육체가 관성적으로 운동하는 사이 그의 정신세계도, 인생도 피폐해졌다. 오 마담의 “인생은 원래 X 같은 것”이란 대사.

현직 과장은 한수에게 승진을 약속하며 “세상이 변했으니 너도 변해”라고 충고하지만 변전하기엔 늙었고, 지쳤다. 내내 연무가 스크린을 꽉 채우는 건 그런 한수의 내면세계이자 오리무중인 인생을 의미한다. 오 마담의 “나 이제 쓸모없어졌나?”라는 질문은 답을 구하려는 물음이 아니라 그런 자조다.

첫 번째 용의자였던 부제는 대학 때 여대생을 성폭행한 전과가 있다. 그는 이미 회개하고 하느님에 귀의했다며 마치 면죄부를 받은 듯 주장하지만 한수는 “피해자는 자살하고 그 부모의 삶은 무너졌는데 너는 고작 회개했으니 됐다고?”라고 분노한다. 시종일관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인식론을 묻는다.

민태는 “잡고 싶은 놈을 잡을 게 아니라 범인을 잡아야지. 난 네가 악당인지 경찰인지 헷갈려”라고 한수에게 비수를 던진다. 정연은 “우리가 거꾸로 보는 건 아닐까?”라고 결정적인 인식론을 펼친다. 베이컨의 ‘동굴의 우상’이 만든 선입견과 ‘시장의 우상’이 만든 편견이 많은 착오를 일으킨다는 뜻.

▲ 영화 <비스트> 스틸 이미지

마약 브로커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악당이 살해됐다. 한수는 “나쁜 놈이 죽었으니 다행”이라고 하지만 민태는 “살인사건”이라며 형사로서의 사명감을 외친다. 인트로에서 한수는 종찬과 함께 깡패 한 명을 납치해 린치를 가한다. 형사가 깡패보다 더 나쁜 청부폭행을 저지르는 이 독단론적 시퀀스.

민태는 확실한 독단론자고, 만수는 독단론적 회의주의자다. 모두 비판주의와 합리주의에 의해 개선돼야 할 사람이다. 이렇게 사사건건 충돌하는 두 사람의 앞날은 짙은 안개로 가려져있다. 주변의 암초가 너무 많기에. 오 마담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이고, 춘배는 지나치게 무모해 믿을 수가 없다.

민태의 유일한 후원군은 감찰반의 동기인데 그러나 그 역시 조직의 생리대로 움직일 따름이다. 이성민과 유재명의 연기 솜씨는 캐릭터들의 대결을 뛰어넘어 이정표를 세웠다. 특히 후반부 이성민의 오열 시퀀스는 유사 장면의 교과서가 될 듯하다. 피어싱과 문신과 욕으로 뒤덮은 전혜진의 변신은 놀랍다.

워낙 뛰어난 연기력을 소유한 베테랑들이 포진돼있어 진중한 분위기와 스토리를 만끽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으면서도 왠지 진수성찬이 잔칫상 위에 효율적으로 차려지진 않은 듯한 게 옥에 티다. 마약반에서 뭔가 있을 것 같아 2팀으로 전출 온 미영(이상희)의 회의주의와 ‘진범은 둘’에 집중! 26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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