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기 열강 외교 각축과 근대교육‧의학의 도입 [문화지평 답사기]

문화지평l승인2019.06.26l수정2019.06.26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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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 ‘문화지평’은 올 서울시 공익단체 지원사업으로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를 진행하고 있다.

[미디어파인=유성호 문화지평 대표의 문화‧관광이야기] 정동(貞洞)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 씨의 무덤인 정릉이 있었던 곳에서 지명이 유래한다. 신덕왕후는 이성계와 사이에 방번, 방석의 두 왕자와 경순공주를 낳았다. 방석은 정도전 등에 의해 세자로 책봉됐다. 첫째 부인 한 씨의 다섯 번째 아들인 방원은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숙적 정도전은 물론 신덕왕후의 두 아들을 모두 제거했다.

신덕왕후는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396년 방원이 일으킨 소란이 화근이 돼 병을 얻어 죽었다. 처음엔 현 주한영국대사관 또는 러시아공사관 부근에 능역이 조성됐으나 도성에 왕릉을 쓸 수 없다는 원칙에 따라 1409년 도성 밖 지금 자리인 성북구로 옮겼다. 신덕왕후와 대립했던 방원(태종)의 명분있는 복수였다.

방원은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강등시키고 능은 묘로 격하시켰다. 정릉 일부 석조물은 홍수로 유실된 광통교 기반석 등으로 갖다 썼다. 신덕왕후는 200년이 지난 후에야 송시열의 상소로 복위됐다.

조선 건국 초기부터 한(恨)의 역사를 품은 정동이란 공간은 일제 강점기 때도 일본과 열강들에 의해 갈리고 찢기는 등 민족의 한을 고스란히 담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지평 서울진피답사 4회 차는 6월 15일 서울도서관 앞에서 답사 여정을 시작했다.

정동, 이성계 둘째부인 신덕왕후 강 씨 무덤 정릉서 유래

▲ 지난 6월 15일 오전 10시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 4회 차가 정동 일대에서 진행됐다.

답사팀이 모인 서울도서관은 과거 일제가 경성을 관리하던 경성부청이었다. 1926년부터 해방까지 사용됐다가 광복 이후는 서울시청사로 썼다. 일제는 을사늑약 이후 식민도시 건설에 박차를 가하면서 대형 석조건축물을 짓기 시작했다. 그 무렵 들어선 것이 1912년 조선은행(한국은행), 1925년 경성역(서울역), 그리고 1926년 경성부청과 조선총독부 등이다.

이때 쓰였던 화강암은 시내서 그리 멀지 않았던 창신동 돌산에서 채석했다. 일제는 돌산을 아예 경성부 직영 채석장으로 바꾸고 식민지 조선의 속살을 자신들의 수탈 기관을 짓기 위해 유린했다. 경성부청과 같은 해 완공된 조선총독부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이다가 김영삼 정부 시절 민족정기 회복이란 명분아래 해체가 결정된 후 우여곡절을 겪다가 1996년 완전히 철거됐다. 창신동 절개지는 마침 오는 6월 29일에 답사를 통해 만나 볼 예정이다.

해설사는 서울도서관 앞 시청광장을 보면서 덕수궁의 궁역에 대해 설명을 이어갔다. 대한문은 지금보다 33m앞에 위치해 있었다고 했다. 원래는 경운궁(덕수궁 전 이름) 대화재 후 대한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태평로가 생기고 확장되면서 두 번이나 뒤로 물러 앉아 지금 자리에 위치하게 됐다. 을미사변, 아관파천, 그리고 대한제국 건설과 을사늑약 등 구한말 격동의 시대를 거치면서 덕수궁은 훼철되고 쪼개져 팔리는 수모를 당했다. 지금 남아있는 궁역은 원래의 3분의 1 정도로 줄어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해설사가 커다란 사진자료를 펼쳤다. 경복궁, 조선총독부와 일직선상 남산 자락에 위치해 있었던 조선신궁의 모습이다. 식민지를 지배하는 건축 행태를 담고 있다. 높은 곳에서 궁을 내려다보는 형세다. 남산자락은 일본인 집단거주지였다. 일제는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튿날 재빨리 폐쇄행사를 갖고 본국으로 들고 갈 것은 들고 가고 나머진 소각했다.

또 다른 사진은 해방 후 조선신궁 참배로 계단에 눈을 깔아 스키장으로 사용한 장면을 찍은 것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만 80세 생일이 된 1955년을 기념해 조선신궁 터에 자신의 동상을 세웠다. 높이가 무려 24m의 초대형 동상이었으나 1960년 4‧19혁명 때 파괴됐다. 동상 기단부는 2004년 한양도성 발굴작업 중 발견됐다.

다른 사진 자료를 펼쳤다. 1910년 당시의 덕수궁 평면도에 따르면 선원전 터를 포함하고 있다. 일제는 이곳에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경기여고)를 지었다. 길 건너 준비소 터에는 덕수초등학교를 세웠다. 경성방송국도 근처에 지었다. 지금은 일대에 성공회주교좌성당과 구세군회관 등이 들어서 있다.

경운궁 궁역에 미‧영국공사관 등 앞 다퉈 들어서

▲ 매주 토요일마다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해설 안내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김선동(사무엘) 성생님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성당의 내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동은 조선 말기 1883년 미국공사관을 필두로 각국 공사관이 들어서면서 ‘공사관길’로 불렸다. 같은 해 영국공사관이 들어서면서 종교인 성공회가 함께 들어와 공사관 앞에 자리를 잡았다. 성공회는 영국에서 로마 가톨릭교에 대항해 만든 교파다. 직제는 로마 가톨릭교, 교리는 개신교를 따르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성직자들이 결혼을 할 수 있다.

멋스런 건축양식을 자랑하는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은 로마네스크 건축양식을 띤다. 고딕양식과 함께 하늘에서 보면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다. 내부에 들어가면 머리 쪽은 사제가 설교를 하는 곳이고 좌우는 성가대, 십자가 장축은 성도들이 앉는 자리다.

1926년 부분 완성했고 예산부족으로 원 설계도인 큰 십자가를 완성하지 못하고 지냈다. 설계도가 사라진 것도 큰 이유였다. 이후 영국에서 설계도가 우연치 않게 발견됐고 광장 김원 대표에 의해 1996년에야 완성됐다. 한옥 건축 양식인 처마 서까래 형태와 기와를 사용해 한국인들에게 친근감을 준 게 특징이다.

이날도 어김없이 김선동(사무엘) 선생님이 방문객을 환하게 맞이했다. 지난 2016년에 뵙고 오랜만에 다시 뵙는다. 변함없이 매주 토요일 성당 해설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분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정정한 모습이다. 성당을 가로질러 나가면 영국대사관 정문이 보인다. 한옥 대문이 고풍스럽다. 개화기 때 자리 잡은 공사관 중 유일하게 현재까지 자리를 잡고 있는 곳이다. 처음엔 영사관으로 들어왔다가 1898년 공사관으로 승격했다.

영국대사관 때문에 덕수궁 둘레길이 일부 막혔다. 2017년 일부를 열었지만 영국대사관 측은 아직도 일부를 막아뒀다. 궁여지책으로 덕수궁 내부에 보행로를 만들어 선원전 쪽으로 나갈 수 있도록 했다. 하절기(5~10월)는 오후 8시30분까지, 동절기에는 5시30분까지 다닐 수 있다. 보행로에는 줄을 뛰어 넘어 덕수궁으로 스며들까봐(?) 경찰과 궁 관리인이 지키고 서 있는데 보기 좋진 않았다. 중명전과 접해있는 하비브하우스가 높은 철조망을 쳐 놓은 모습과 겹쳤다. 우리 국민의 민도(民度)를 얕잡아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골목을 빠져나오면 구세군 서울제일교회와 덕수궁 사이가 나온다. 정면에는 선원전과 미 대사관저인 하비브하우스가 접해 있었는데, 이곳에 ‘고종의 길’을 만들고 있다. 그 길로 들어서면 바로 러시아공사관이 나온다. 아관파천 길인 셈이다. 노중에는 조선저축은행 중역이 살던 집과 정원 터, 대문 기둥이 남아있다. 대문 기둥에는 흰돌로 된 문패가 걸려 있었으나 무슨 글자인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돼 있었다. 골목을 빠져 나오니 러시아공사관 터 아래에 있는 공원이 나왔다.

민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 이후 친일파의 득세로 신변이 불안했던 고종은 1896년 2월 덕수궁의 당시 이름인 경운궁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다. 이완용 등이 도왔다. 이완용은 친미파였다가 아관파천 당시는 친러파로 말을 갈아탔고 나중에는 친일파가 되는 처세의 달인이다.

러시아는 이를 빌미로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채벌권, 각지 광산채굴권 등을 헐값에 넘겨야 했다. 다른 열강들까지 은근한 압력을 가하자면 경인선, 경의선 철도부설권 등을 싸게 불하받았다. 구한말 나약한 조선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1년이 조금 넘은 이듬해 2월 고종은 자의반타의반으로 러시아공사관을 나와 경운궁으로 환궁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로 즉위한다. 강성대국은 아니더라도 외세에 이끌려 살지만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러시아공사관을 거쳐 내려온 중명전은 친일파가 된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 등이 이토 히로부미와 고종을 위협해 을사늑약을 체결한 곳이다. 중명전 내부에는 당시 강제 늑약 장면을 담은 정밀한 밀랍인형이 전시돼 있다.

아관파천 한 고종의 길 정비 중…선원전서 뒷길 열려

▲ 선원전과 미 대사관저로 쓰였던 하비브하우스 사이로 고종의 길이 새로 조성됐다. 사진 좌측이 선원전 쪽이다.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진다.

이화박물관 앞 주차장 입구에는 손탁호텔의 표지석이 있다. 러시아 공사관 수석통역관이었던 앙뚜아네트 손탁(Antoniette Sontag, 孫澤)이 지은 호텔이다. 프랑스 출신인 그는 베르사이유조약에 의해 출생지인 알자스로렌이 독일로 병합되면서 독일인이 됐다. 아관파천을 주도했던 러시아 초대공사 카를 베베르와 함께 입국했다. 경복궁의 양식요리사로도 일하고 명성황후와도 친분이 있었다.

고종의 총애를 받아 덕수궁 근처 황실 소유 가옥과 부지를 하사 받았고 1902년 2층 25개 객실 규모의 호텔을 지어 지배인이 된다. 주변에 구미 공관들이 즐비하던 시절, 손탁호텔은 또 하나의 외교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명전 맞은편에 위치한 터라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늑약을 체결하기 위해 기다렸던 곳이라고도 전해진다. 고종이 하사한 땅에서 이토가 나라를 빼앗기 위해 기다리는 부조리와 아이러니의 장소, 구한말 손탁호텔이다.

손탁호텔은 영국 총리를 지낸 윈스턴 처칠이 묵은 적이 있다.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4년 말경 런던 데일리 텔레그래프 종군기자로 특파된 처칠은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로 들어왔고 만주로 취재를 가는 도중 하루를 손탁호텔서 묵었다. 손탁이 본국으로 돌아간 이후 이화여고에서 사들였다.

열강의 영사, 공사와 함께 들어 온 것이 종교다. 종교는 포교를 하기엔 조선이란 땅이 척박한 환경이었기 때문에 의료와 교육을 적절히 앞세우고 들어 왔다. 감리교는 정동의 랜드마크 같은 정동교회를 세웠다.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는 배재학당과 스크랜턴 부인은 이화학당을 만들어 근대교육의 불을 지폈다.

아들 스크랜턴은 감리교 의료선교 담당자로 시병원과 최초 여성병원인 보구여관을 세웠다. 스크랜튼의 한국이름은 시란돈(施蘭敦)이라서 고종은 시병원으로 병원이름을 하사했다. 보구여관은 여성병원의 명성을 이어받아 이화여자대학병원의 모체가 됐다. 해설사는 그 사이 장로교는 포교활동에 집중해 감리교와 비교가 되지 않는 교세를 일궜다고 했다.

우리나라 개신교는 구교인 서학인들이 뿌린 피를 밟고 편안하게(?) 입성했다는 ‘가시 같은’ 소리도 있다. 그래서 낮은 데로 임해야 하는데 자꾸 바벨탑을 쌓는다. 이날 지나가면서 얼핏 본 신축한 새문안교회는 그런 의문을 들기 충분한 거대 건축물이다. 교회 건축의 방향이 자칫 대형화로 흐르지 않을까 우려되는 대목이다.

그에 반해 정동교회는 새로 신축한 건물도 기존 본당과 조화를 맞추기 위해 적벽돌로 지었다. 지금 보면 어느 건물이 나중에 지은 것인지 쉽게 알 수 없을 정도로 ‘깔맞춤’을 했다. 정동교회는 교회건축의 방향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지표인 셈이다.

정동교회, 교회건축의 지향점 보여주는 좋은 사례

▲ 이번 답사를 이끈 배건욱 역사문화해설사는 서울KYC 공동대표를 역임했고 도성길라잡이, 평화감성해설사, 한성백제길라잡이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답사팀은 서울시립미술관에 다다랐다. 정초석을 어렵사리 읽어보니 ‘定礎 昭和二年十一月 朝鮮總督 子爵 齋藤實’이라고 새겨져 있다. 쇼와 2년은 1927년이다. 齋藤實는 당시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한자 이름이다.

이 건물은 건축 당시 경성재판소로 지어졌다. 조선 말기에는 평리원(한성재판소)가 있던 자리다. 대법원이 1995년 서초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사용했다. 과거에는 이혼 업무를 했던 가정법원도 같이 있었다. 그래서 덕수궁 돌담길이 ‘이별’을 상징하는 곳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건물 전면만 보존하고 새로 건축해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미술관 뒷문으로 빠져 나오면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이 나온다. 우리나라 근대 교육의 효시다. 배재학당은 고종이 내린 교명이다. ‘선교+의료’가 주특기인 스크랜턴과 달리 아펜젤러는 ‘선교+교육’이 주특기였다. 배재고등학교는 1984년 쌍둥이 건물 중 동관을 남기고 강동구 명일동으로 이전했다. 남은 동관은 배재역사박물관으로 조성해 배재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명소로 만들었다. 독립신문 터도 근처에 표석으로 남아 있다. 여기서 독립은 일제가 아닌 청나라로 부터의 독립을 의미한다.

이번 답사를 이끈 배건욱 역사문화해설사는 서울KYC 공동대표를 역임했고 도성길라잡이, 평화감성해설사, 한성백제길라잡이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협동조합 발로품는서울 감사로도 활동 중이다.

■ 답사코스
서울도서관 - 성공회성당 - 구세군교회 - 러시아공사관 - 손탁호텔 - 중명전 - 정동제일교회 - 서울시립미술관 - 배재학당 - 독립신문사 터 <글=김범준·유성호 문화지평 대표, 사진=권택상 사진작가>

[문화지평]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2016)
역사도시 서울답사(2017)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2019)
기업‧단체 인문역사답사 다수 진행

문화지평  moonwhajipyu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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