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맨 오브 스틸>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⓵에서 계속> 아직도 생존하고 자연을 극복하기엔 나약하기 그지없는 인류는 어딘가 기댈 곳이 필요했다. 그런 이유로, 특히 지도자들이 앞장서 자신들의 권위에 당위성을 주기 위해 전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등에서 문명과 신화가 발생했으며, 지적인 사고가 발달한 발칸반도는 삶의 교훈을 담아 그리스신화를 완성하고 철학으로 승화하게 된다.

‘옛날 옛적에’로 시작된 가공은 어느덧 신화가 됐고, 지도자는 신의 전령으로서 인간을 다스리고 신의 명령을 전달하는 확실한 ‘왕’이 됐다. 이 지성과 교양이 넘치는-한때 남으로 아프리카까지, 동으로 인도까지 진출했던-헬라스들은 그러나 호전적인 게르만의 지류인 라틴족이 세운 로마의 제국주의의 군화에 짓밟혔고, 이름과 디테일만 살짝 바뀐 로마신화의 완성에 공헌한 뒤 고향 땅을 빼앗긴 유대인 일부의 기독교 설립에 자양분을 제공한다.

적지 않은 전문가들은 철학은 아직도 플라톤을 해체하고 연구하는 쳇바퀴라고 본다. 무늬만 민주주의일 뿐 자본주의에 이미 경도된 지 오래된 세계는 신학의 경건함에 심취하기엔 배금주의에 너무 깊게 빠졌다. 피론이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에 편승해 인도에서 육사외도의 한 사람에게 얻어온 불가지론이 아직도 생생한 유령으로서 전 세계를 배회하고 있는 건 우연이 아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로 보면 섬겨야 할 신은 하나다. 그런데 왜 하느님과 알라가 공존할까? 일단 역사적으로 그건 양 민족의 주관주의에서 비롯된 의견의 차이일 뿐 이름이 같은 한 사람이다. 제우스와 유피테르와 오딘이다. 지금까지 신을 봤다는 사람은 있지만 그 신이 디오니소스인지, 에피메테우스인지 정확하게 설명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나님’이란 일원론 자체에 모순은 없을까? 회의주의-불가지론-불교가 수천 년 동안 꽤 많은 사람들의 사유를 지배했고, 아직도 웬만한 사람은 반박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쉬운 논리와 그럴듯한 개연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만큼은 스펜서와 헉슬리는 옳았다.

▲ 영화 <액스맨 : 다크 피닉스> 스틸 이미지

‘신은 있는가?’, ‘그렇다면 어디에 있고,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는가?’라는 인식론적 관점에서 탈피해 신의 정의에 관해 관념론적으로 접근하는 걸 표제로 삼는다면 비교적 신의 근접거리에까지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왜? 신이 잘 안 나타나니까. 소원을 잘 안 들어주니까. 다수가 굳건한 신앙심으로 믿지만 그 숫자에 못지않게 안 믿거나 의심하므로.

역대 철학자 중 똑똑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럽다고 평가받는 칸트는 ‘인식주관으로부터 독립해 스스로 존재하는 현상의 궁극적 원인 그 자체’라는 물자체 이론을 내세웠다. 그건 곧 감각의 원인이고, 현상의 기원인 불가지물이다. 하이데거가 시간성으로 인간이란 존재 문제를 풀었다면 칸트는 신의 문제를 푼 듯하다.

니체가 신을 죽인 뒤 차라투스트라와 어깨동무를 하고 위버멘시(초인, 극복인)라는 뮤턴트 신을 세웠다면 칸트는 신을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볼 수도 알 수도 없지만 느낄 수는 있는 존재로 상정했다. 신은 저 먼 우주에서 개미집 같은 지구를 바라보는 티탄족 조종자인 기계론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화를 통해 존재하기도 하며, 외적 존재로서는 공간을 갖지 않고도 존재하는 것으로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신은 영생불사인가?’라는 질문엔 명석판명하진 않아도 느낌은 온다. 철학자들은 신을 떠받들거나 만들었고, 어떤 이는 부정하기도 했다. 철학자들은 신은 영속하다고도 했지만 죽인 이도 있다. 결국 니체의 위버멘시와 칸트의 물자체는 아프로디테와 비너스가 아닐까? 토르는 또 다른 세계의 엑스맨이다. 그린랜턴이 활동하는 영역에서 아주 먼-아스가르드와 지구와의 거리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는-은하계의 초인이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간다. 그러나 죽음 뒤에 하데스의 영역으로 가는지, 베르길리우스의 손을 잡고 단테의 여정을 누비는지, 아누비스 앞에 불려가 심판을 받는지 아무도 모른다. 과연 천국과 지옥은 있기나 하는 건지, 타노스의 핑거스냅의 결과처럼 그냥 먼지가 돼 사라지는 건 아닌지 불가해하다.​

▲ 영화 <어벤져스: 엔드 게임> 스틸 이미지

베이컨은 아리스토텔레스(논리학)와 싸우느라 귀납법에 몰두했고, 과학에 공헌하느라 뜬금없이 한겨울에 눈과 닭고기로 냉장고 발명에 기여하다 죽었다. 하지만 출세욕에 불탔고, 철학자로서 법무장관이란 최고위직에 올라 부정부패로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급급했던 오점을 남겼다. 심지어 그는 신을 선입견과 편견으로 보고 4명의 우상을 만들어 인류에 경고장을 던졌다.

인간중심 사상의 의인화의 오류인 ‘종족의 우상’, 주관의 착각인 ‘동굴의 우상’, ‘지라시’를 믿는 한심함의 ‘시장의 우상’, 유명한 사람의 말과 행동이 진리라 맹신하는 ‘극장의 우상’이다.

고대의 마지막 위대한 종교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청년 시절 방탕한 생활을 했다는 점에서 이원론은 옳다. 과학은 자꾸만 밖으로 나가려 하지만 그는 안으로 들어갈 것을 설파했다는 것도 그렇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자신의 영혼이 주의 품에서 안식을 취하는 걸 궁극의 목표로 삼았고, 지금까지 그렇게 피안에 있을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로 봐도 신은 충분히 개체의 내부에 존재할 수도 있다.

신이 어떤 존재인지, 있기나 하는 건지 등에 대해선 인류가 살아있는 한 영원한 숙제라는 아이러니! 죽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는. 혹시라도 신이 지구에 염증을 느끼고 인류를 멸절시킨 뒤 마지막 개체 앞에 나타나 ‘사실은 이러저러해서’라고 설명해주지 않는 한, 니체의 위버멘시가 현현해 인류에게 진실과 진리를 깨우쳐주지 않는 한, 영원한 숙제이긴 하지만 현자에 가까운 사람은 이미 깨달았을 것이다.

만약 특정 종교에 귀의하고 싶거나, 개종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어느 방향이 바람직할까에 대한 문제는 개개인에 달렸겠지만 이토록 많은 종교인들이 있고, 인도에 그토록 많은 신들이 있는 것만 봐도 안 믿는 것보단 믿는 게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개종의 의도를 품은 건 기존의 신보다 더 나은 신을 발견했기 때문일 테니 옳다. 단지 이직한 죄로 전 직장으로부터 응징을 당했다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

과연 할리우드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어떤 새로운, 혹은 기발한 신을 창조해낼 것인가? 아니면 확대 재생산해낼 것인가? 혹시 그 상상력이 신탁에 의한 것이라면 마이클 잭슨이 외계인이었다는, 엘비스 프레슬리도 어딘가에 생존해있다는 외계인 지배설은 맞을 것이고 할리우드에도 외계인이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어벤져스’를 보면 왠지 현대의 신은 자본주의자인 것 같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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