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진범>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복잡다단한 현대에서는 진실이 애매모호하다. 때론 법과 판결이 명석판명하게 인식되지 않을 때도 있다. 양현석이 ‘내사 종결’을 예상한 것만 봐도 그런 의구심을 가질 소지가 있다. ‘진범’(고정욱 감독)은 그런 진실을 매개로 관객에게 주변에 믿을 만한 진정한 친구가 있는지 묻는 스릴러 영화다.

영훈(송새벽)과 유정 부부, 준성(오민석)과 다연(유선) 부부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다. 유정은 준성의 대학 후배고, 그런 인연으로 다연이 영훈에게 유정을 소개해 결혼한 것. 그러던 어느 날 유정이 변사체로 발견된다. 경찰은 유정의 입술에서 준성의 머리카락을 발견하고 그를 용의자로 체포한다.

다연은 남편이 결백하다고 강력하게 믿고, 영훈 역시 그렇다고 인정한다. 선고 공판일이 다가오자 다연은 영훈에게 남편에게 죄가 없음을 증언해달라고 부탁한다. 영훈은 그날의 목격자 상민(장혁진)을 의심하고 집에 구금한 채 폭행한다. 그런데 다연이 거듭 증언을 부탁하러 왔다가 목격하는데.

별로 큰 제작비를 들이지 않고 이런 심리 스릴러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일단 제작진의 승리다. 감독은 먼 길을 떠나는 가장이 아내와 자식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친구 하나쯤 지녔는지 묻는 함석헌의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에서 모티프를 얻었다고 한다. 척박한 시대에 친구는 있을까?

▲ 영화 <진범> 스틸 이미지

시신의 입술에 묻은 응고된 피에 흡착된 머리카락 한 올. 경찰은 범인이 피해자를 죽인 뒤 머리카락이 사체에 떨어져 굳은 명명백백한 증거라고 못을 박고 다연은 “우리 부부가 그 집을 얼마나 자주 왕래했는데”라며 울부짖는다. 범인은 범행 뒤 건조대에 있던 수건으로 사체의 얼굴을 가렸다.

그런데 그 수건은 준성 부부의 딸의 돌잔치 때 답례품으로 돌린 것. 만약 준성이 진범이라면 그걸로 사체의 얼굴을 덮었을 리 없다는 게 영훈의 이론이고, 그에게 다연이 남편의 무죄를 증언해달라고 조르는 도발의 근거다. 관객은 내내 진범이 누구인지 미치도록 궁금해 감독이 꽤 미울 수도 있다.

그만큼 시나리오는 탄탄하고, 네 배우의 연기는 흠잡을 데 없다. 다만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다소 산만한 편집이 옥에 티. 플롯은 오리무중에 빠진 그날의 진실을 파헤치는 쫀득쫀득한 재미를 선사하고 인간관계의 믿음의 정체를 묻는다. 예수는 믿는 대로 된다고 했지만 그건 신성한 종교 얘기다.

천박하고 사악하며 악랄한 자들이 혼재된 현세는 다르다. 표리부동, 이율배반, 아전인수, 독단, 미신 등을 내면의 기둥으로 세운 인간이 뒤섞인 데서 ‘사람’이 진짜 ‘친구’를 가려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만물은 끊임없이 유전(흐르고 변함)한다고 주장한 헤라클레이토스는 26세기 전에 이미 옳았다.

▲ 영화 <진범> 스틸 이미지

심리학에 인지부조화 이론이란 게 있다. 이솝 우화의 여우가 포도를 못 따먹자 “틀림없이 저건 실 거야”라고 포기한다. 오류(자신의 무능)를 바로잡으려 한 게 아니라 생각을 바꾼 자기 합리화다. 과연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그건 철학이 생긴 이래 정신과 육체, 관념론과 유물론의 영원한 숙제였다.

수사가 마무리되고, 재판이 끝나갈 즈음 영훈이 몰랐던 증거와 정황들이 속속 드러난다. 준성이 카페를 차릴 때 유정이 거액을 빌려줬다고 한다. 그들은 어떤 관계였을까? 혹시 치정 문제라고 하더라도 살인의 동기로 보기엔 미심쩍긴 하다. 영훈과 다연은 그 내용을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었을까?

사건은 종결돼가지만 영훈은 집안을 사건 당시와 거의 똑같게 꾸민 뒤 ‘범죄의 재구성’에 나선다. 재판 결과에 관계없이 그날의 진실을 알고 싶은 것이다. 그는 경찰에게 준성이 진범이 아님을 어필했다 쓴 충고를 듣는다.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걸 확신이라 착각하는 인지부조화를 일깨워준 것이다.

그래서 “마음으론 알겠는데 증명이 안 돼 괴롭다"라며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 안에서 알아내겠다”라며 스스로 범인이 됐다, 유정이 됐다 하며 재연배우 노릇을 한다. 경찰은 사기 피해자에게 용의자의 진면목을 까발리면 가장 많이 나오는 답이 “절대 그럴 리 없다”라는 변론이라고 충고한다.

▲ 영화 <진범> 스틸 이미지

왜 그럴까? 자기 판단이 틀린 걸 인정하면 자신이 멍청이란 글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생각은 엔진, 감정은 연료’라고 했다. 감정에 불순물이 들어간다면 엔진에 걸맞지 않은 연료를 주입(경유 차량에 무연휘발유 같은 식)한 것처럼 올바른 생각이 형성될 수 없고, 행동은 망가진다.

영훈은 경찰의 충고에서 프로이트를 발견한 것이다. 이 정도 진행되면 대충 범인의 윤곽이 좁혀지지만 그 울타리 안에서의 인물들의 심리상태가 매우 극단적으로 흐르기에 관객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질 듯하다. 경찰은 또 묻는다. “지금이 최악이라고 생각하죠?”라고. ‘솔로몬 반지’의 교훈까지!

반지의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언명은 현 상태의 즐거움과 괴로움에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충고다. 확실히 신은 기계론적 결정론자인 듯하고 이 영화의 결과를 보면 감독도 그런 듯하다. 과연 선과 악의 경계는 무엇인가를 묻고 그걸 일사부재리 원칙과 분절이란 키워드를 통해 재차 질문을 던진다.

법은 진실을 규명해야 하지만 사람이 만들었고, 그걸 행사하는 재판관도 사람이니 실수는 있을 수 있다. 잘못이 드러나면 바로잡아야 하는 게 정의인데 일사부재리 원칙은 그걸 반대한다. 인식주관은 정의를 향해 진화해야 하는데 현실을 향해 분절하기 때문이 아닐까? 101분. 15살. 7월 10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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