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레드슈즈>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그림 형제의 ‘백설공주’는 수많은 콘텐츠로 확대 재생산됐는데 ‘레드 슈즈’(홍성호 감독)는 아예 모티브만 빌려오고 확 다르게 변주한 애니메이션이다. 동화의 섬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가 발생하지만 멀린(샘 클라플린), 아더, 잭, 한스, 그리고 세쌍둥이 등의 왕자 해결사 ‘꽃세븐’이 수습한다.

그들은 용을 물리치고 요정 공주를 구하지만 그녀의 추한 용모에 마녀라고 오판함으로써 ‘세상에서 제일 예쁜 공주의 키스를 받아야만 저주가 풀린다’는 신탁을 받고 남들이 볼 땐 초록 난쟁이로 바뀐다. 화이트 왕은 왕비가 스노우(클로이 모레츠) 공주를 낳고 죽자 마녀 레지나에 홀려 재혼한다.

그러나 레지나는 화이트 왕을 축출한 뒤 영원한 젊음과 최고의 미모를 주는 빨간 구두가 열리는 사과나무를 키운다. 쫓겨난 스노우는 아버지를 찾기 위해 헤매다 성에 잠입해 나무에 열린 구두를 신고 날씬한 미녀 레드슈즈가 돼 마법의 빗자루를 타고 ‘꽃세븐’이 사는 ‘아찔한 절벽’으로 간다.

‘꽃세븐’은 레드슈즈의 미모를 보고 자신들의 저주를 풀어줄 주인공이라 확신한다. 레드슈즈는 창밖에서 아버지의 환영을 보고 숲속에 들어갔다 거대한 나무 토끼에게 쫓기지만 멀린이 나타나 토끼를 생포한다. 사악한 탓에 친구 하나 없는 아부라쥐 왕자는 자신의 생일잔치를 앞두고 고민 중이다.

▲ 영화 <레드슈즈> 스틸 이미지

예쁜 공주들을 초대해 명성을 드높이고 싶지만 그건 자신의 욕심일 뿐. 레드슈즈에게 현상금을 건 전단지를 뿌린 레지나가 아부라쥐를 찾아와 그녀가 있는 위치를 알려주며 그녀를 잡아와 파티를 열고, 자기에게 빨간 구두를 달라고 제안한다. 레드슈즈는 거리에 나갔다 전단지를 발견하는데.

할리우드 스타들이 목소리를 연기하고, 한국인 최초의 디즈니 수석 애니메이터 김상진이 캐릭터 디자인 등에 참여했으며, ‘백설공주’와 ‘미녀와 야수’를 적당히 결합했는데 한국적 요소도 짙다. 유럽 신화에서 아더와 멀린을, ‘잭과 콩나무’에서 잭을 빌렸고 한스는 ‘캡틴 아메리카’를 살짝 차용했다.

한국식 혹은 중국식 복장의 멀린이 ‘번개’라고 적힌 부적을 무기로 사용하는 건 ‘전우치’(2009)를 연상케 한다. 이 작품은 대놓고 어린아이는 물론 어른들에게 이 시대의 과도한 외모지상주의에 대해 일장 훈계를 쏟아낸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통해 스노우를 비만 캐릭터로 설정한 것도 그렇다.

레드슈즈는 멀린에게 “우린 같은 마법에 걸린 게 아닐까?”라고 묻는다. 스노우는 마법에 의해 날씬한 레드슈즈가, 멀린은 저주에 의해 통통한 초록 난쟁이가 됐다. 모두 의도치 않게 외모가 급변했지만 결과는 다르다. 물에 빠진 멀린을 구하기 위해 레드슈즈는 구두를 벗음으로써 본모습을 보여준다.

▲ 영화 <레드슈즈> 스틸 이미지

멀린이 떠나가자 스노우는 “우린 같은 마법에 걸린 줄 알았는데”라며 낙담한다. 멀린은 툭하면 “내 본모습은”이라며 원래 자신이 꽃미남 왕자였고, 전투력도 훨씬 월등했음을 자랑한다. 전우치다. 반면 레드슈즈는 “원래 힘셌는데 구두를 신은 뒤 약해졌다”고 고백한다. 같은 마법이 아니었다.

레드슈즈는 “구두가 잘 안 벗겨져. 그런데 진짜 편해”라고 말한다. 각박하고 편협한 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성형수술을 하고 가식을 진심처럼 포장한다. 잘 안 벗겨지는 게 아니라 본모습으로 돌아가기 싫은 것이고, 진짜 편한 게 아니라 그렇다고 자아에 최면을 거는 것이다.

멀린은 지상 최고의 미녀인 레드슈즈 앞에서 자신의 피부색과 작은 키를 부끄러워하지만 그녀는 “지금 느끼는데 눈을 감든 뜨든 넌 나의 멀린이야”라고 진심을 드러낸다. 레드슈즈가 자신의 본모습이 뚱뚱한 스노우인 줄 알기에 그 기준에서 초록 난쟁이를 보듯 멀린의 시각 역시 본모습에 있다.

마법을 풀고 잘생긴 본모습으로 돌아가기를 간구하는 멀린 등을 보고 “본모습으로 되돌아가면 행복할까?”라는 레드슈즈와 스노우의 관념론은 스노우를 본 뒤 어디론가 터덜터덜 걸어가던 난쟁이 멀린과 내면의 왕자 멀린의 “레드슈즈는 우리 중 누굴 좋아할까”라는 인식론의 논쟁으로 이어진다.

▲ 영화 <레드슈즈> 스틸 이미지

스노우와 ‘꽃세븐’의 변신 등 모든 설정이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으로 니체의 가치전도를 지향한다. 바위에 단단하게 박힌 엑스칼리버는 ‘선하고 진실하며 가장 용기 있는 자’만이 뽑을 수 있다. 그 장본인은 아더인데 현실은 다르다. 외려 힘이 나약해진 레드슈즈가 수저통에서 젓가락 뽑듯 빼낸다.

막아도 막아도 끝없이 공격해오는 악당과 괴물들에 지친 멀린이 “여긴 동화나라가 아니라 괴물나라야”라고 자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 그래서 전체적인 주제는 현대인의 어긋난 욕망에 대한 조롱과 고결한 의식에 대한 인식론이다. 레드슈즈는 한스의 도넛은 흔쾌히 먹지만 잭의 보석은 거부한다.

허영심을 불건전한 것으로 보고 소소한 만족에서 행복을 찾으라는 교훈. ‘구두는 욕망으로 가득 찬 유혹’ 역시 탐욕과 배금사상에 대한 준엄한 언명. 내내 명제로 삼는 ‘겉모습과 진짜 모습’은 과연 사람의 가치는 외모냐, 내면이냐다. 시험이라면 답은 쉽겠지만 내심은 그렇지 못한 게 인간 심리다.

‘꽃세븐’이 멀쩡하다가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면 난쟁이로 변신한다는 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내면에 소홀하고 외모 가꾸기에만 집착하는 현대인에 대한 조소다. 흥겨운 뮤지컬이 눈과 귀를 호강하게 해주고 귀여운 캐릭터들의 유머와 더불어 ‘타이타닉’ 등 각종 패러디가 재미를 준다. 25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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