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나랏말싸미>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나랏말싸미’(조철현 감독)는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리는 우상화도, 훈민정음을 둘러싼 외전의 신화화도 아니다. 한글의 우수성을 세상천지에 알리자는 프로파간다는 더더욱 아니다. 아직도 진행 중인 기득권 세력의 욕심을 고발하고, 왜 민중이 스스로 깨야 하는지 한글을 매개로 웅변한다.

집권 말기의 세종(송강호)은 소갈증, 안질 등 각종 질병으로 노쇠했고, 소헌왕후(전미선)는 친정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아픔을 불교를 통해 달래며 살고 있다. 조정의 중신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명나라에 빌붙어 세종을 압박하고, 세종은 한글 창제로 고민하고 있다.

어느 날 일본 승려들이 입국해 자기들의 목숨을 담보로 왔으니 전에 정종이 약속한 대로 팔만대장경 원판을 달라고 시위를 벌인다. 당시 미개했던 일본의 막부 시대는 정신적 지주를 통한 단합이 필요했고, 그게 불교였던 것. 소헌이 단골 사찰 노스님에게 의논하자 신미(박해일) 일행을 보내준다.

산스크리트어로 논리정연하게 일본 승려들을 물리친 신미, 학열(임성재), 학조(탕준상)는 세종의 부름을 받는다. 세종은 그들과 산스크리트어를 논하며 그동안 막혀있던 우리말 창제의 실마리가 풀리는 것을 깨닫고 단박에 스카우트 제의를 한다. 신미는 사대문 내 사찰 건립을 조건으로 내건다.

▲ 영화 <나랏말싸미> 스틸 이미지

그렇게 세종과 세자(김준한), 둘째 수양(차래형), 셋째 안평(윤정일), 그리고 신미 일행의 한글 창제 공동 작업이 시작된다. 조선은 숭유억불 정책이 근간이다. 고려 패망의 원인이 불교라는 게 건국의 기조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미 일행은 내관 복장으로 신분을 숨긴 채 은밀하게 작업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구중궁궐에서 소헌이 불공을 드린다는 소문이 나돌고, 중신들은 그걸 빌미로 세종을 겁박한다. 세종의 건강은 나날이 악화돼 스스로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직감한다. 반골 기질이 강한 신미는 세종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아 사사건건 부닥치는가 하면 모음 창제에서 장벽에 막히는데.

이 작품은 문자 철학의 정수 ‘컨택트’(2016)와 허무주의적 누아르의 극적인 조합이다. 늦깎이 조 감독은 데뷔하자마자 드니 빌뇌브와 우위썬(오우삼)에 접근 중이다. 대다수는 그저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을 만들었다고만 알고 있을 뿐 당시의 국내외 정치 상황을 간과하는 경향이 짙다.

감독은 종교와 정치를 통해 아직도 진행 중인 기득권의 탐욕과 그 탓에 꽤 많은 권리를 빼앗긴 서민의 피폐한 삶을 우의한다. 문명 이래 권력은 국민의 집단 광기와 충성심을 유도할 종교가 필요했다. 고대 이집트는 태양신 라를 섬겼고, 그리스는 신탁을 받았으며, 중국은 공자가 정신적 지주였다.

▲ 영화 <나랏말싸미> 스틸 이미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종 이래 유럽 역사는 기독교 대 이슬람교의 구도로 전개됐고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겉으론 불교 대 유교였지만 사실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대 독립주의였다. 세종은 모든 걸 떠나 우리의 후진성과 문자의 필요성에 대해서만큼은 적확한 지점을 꿰뚫었다.

당연하지만 당시로선 이례적인 왕의 백성을 위한 봉사 사상은 민주주의적 발상이었고, 제 이익 챙기는 데 눈이 먼 다수의 양반들 입장에선 위협이었다. 세종은 하루아침에 개혁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린 백성이 쉽게 배우고 사용할 수 있는 우리 문자란 결론도 최고였다.

세종과 신미의 대화는 마치 플라톤의 ‘향연’을 연상케 할 정도로 철학적이다. 세종이 자신에게 절하지 않는 이유를 묻자 신미는 “나라가 중을 개 취급하지 않습니까? 개는 절하지 않습니다. 국법을 따를 뿐”이라고 답한다. 이런 신미에게 세종은 “중은 다 까칠한가, 자네만 그런가?”라고 묻는다.

세종이 “자네는 부처를 버리고 오게, 나는 공자를 버리고 갈 테니”라고 하자 신미는 “아뇨, 저는 부처를 타고 가겠습니다. 주상도 공자를 타고 오십시오”라고 받아친다. 세종이 정인지에게 “집현전은 그대로인데 사람들은 없어졌네”라고 하자 정인지는 “아뇨, 전하께서 변하셨습니다”라고 응한다.

▲ 영화 <나랏말싸미> 스틸 이미지

“복숭아 열매 안에 씨가 1개인 건 누구나 알지만 씨가 몇 개의 열매를 맺을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신미는 객관적 관념론자다. 세종은 겉으론 버클리(주관적 관념론자) 같지만 사실 그도 객관과 직관을 지킨다. 유아론에 빠진 사대부(유자)가 한자를 독점함으로써 기득권을 지키는 게 못마땅하다.

기우제를 지낼 때 신하가 어려운 한문을 낭독하자 “그러면 이 땅의 신이 알아듣겠냐? 우리말로 해”라는 데서 직관적인 유물론이 보인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지은 책들을 빗속에 내던지며 소헌에게 “관청에서 썩고 있는데 뭔 소용이 있냐”라고 탄식한다. 이게 진짜라면 그는 성군을 넘은 현자다.

하이데거는 언어를 ‘발성화를 지시하기 위한 용어적 표현’으로, 말을 ‘발성화를 위한 언어의 실존론적 본질’이라 규정했다. 감독은 문자를 하이데거적 관점에서 ‘말의 현상학적 기호’로 부각, 한글의 우월성을 환유한다. 뜻문자인 한자보다 아름다우며, 익히고 쓰기 쉬운 소리문자임을 부각시킨다.

진혼곡이 울리는 클라이맥스만큼 전반적으로 염세주의와 허무주의가 짙게 깔린 비극적 누아르의 분위기에 서스펜스까지 살짝 더해진다. 묵언수행 중인 학열의 반전과 학조와 궁녀의 멜로까지 유머도 꽤 넘친다. 인간의 계급, 종교, 문자 등의 기초존재론적 본질물음은 웅비, 장엄하다. 24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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