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이승만]

미당 서정주 ‘우남 이승만 전’을 펴내다

-미당 서정주가 이 전 대통령의 전기를 쓴 것으로 압니다.
“1947년인가 그래요. 여름과 가을 두 번에 걸쳐 미당에게 구술했습니다. 책 발간할 때 해위 윤보선 선생에게도 많은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한일합병초 고국에 돌아와 시간이 날 때마다 남산에 올라 연을 날렸습니다. 뭇슨 의미인가요.
“물어볼 줄 알고 내가 메모를 해왔소.”

다음은 ‘우남 이승만 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아직도 집집마다 통곡이 끊이지 않은 장안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올라서서 몇몇 어린이들도 더불어 한겨울 하늘을 쳐다보며 연만 날리고 지냈다 하여도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가 있다. 이 민족의 통곡을 능히 대표할 감정과 의리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 통곡의 때에 연같은 걸 날리고 있던 심정도 알 수 있단 말이다. 그렇다 그는 1910년 합병되던 해의 한겨울을 날마다 남산 마루턱에 올라 종이연을 하늘에 띄워 놓고는, 자새에 감긴 실을 풀었다 감았다 하며 수두룩이 짓밟고 있는 조국의 혼을 모조리 그의 속에 불러들이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가 또 시행한 것은 통곡하는 동포들과 일종의 기도와 어린이들에게 준 일종의 세례였다.

11월27일 서울시 YMCA동포들과 같이 기도.
12월11일 크리스마스 휴가에 세례를 받기 위해 32명이 성명과 주소를 알리러 왔다.
12월12일 어린 학생들이 세례받기를 신청해 왔다.

이상은 1910년 겨울의 그의 수첩의 기록 중 한 토막이거니와 이 기도와 세례를 역시 우리는 그의 이 무렵의 연놀이와 거진 비슷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될까. 그의 이 무렵의 연놀이가 얼마나 많은 통곡과 민족애와 부동의 신념을 표현하는 것인가를 우리는 위에서 보았다.(1949년 공덕리 미당 서정주)

-연이 갖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독립투쟁을 위한 모든 준비를 끝내고 귀국했지만 한일합병의 현실을 보면 볼수록 통곡스럽고 그 통곡을 다스리려는 마음에서 연을 날리며, 그래도 미래로 향하자는 뜻이 담겼다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서정주 시인과는 인연이 있었나요.
“개인적인 만남은 없어요. 나도 책을 쓰고 많이 읽었던 터라 한국의 작가들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한 지인이 그동안 독립운동을 위해 고생도 많이 했으니 책 한 권을 남기는 것도 괜찮다는 얘길 해요. 오해가 될까봐 처음에는 반대를 했는데 한 작가로서 바라보는 시선이 있을 테니 책을 써도 좋겠다고 해서 승낙을 했습니다. 그래서 구술의 시간을 가졌고 서정주 시인도 다른 몇 사람한테 추가로 얘기를 들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화제를 돌리겠습니다. 미국에서 돌아와 전국 강연을 다니면서 신변의 위협을 많이 느끼셨나요.

미국 망명길에 오르다

▲ 하버드대학 시절의 이승만(뒷줄 왼쪽)

“그렇습니다. 그래서 약간 겁도 나고 해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종로학당 교장으로만 일을 했습니다. 5년7개월의 감옥생활을 겪었던 나에게 체포의 악몽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지요. 때문에 순전한 종교 운동가로서 정치활동과 아무런 연관을 맺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신중한 처신을 했으나 오래 갈 수 없었습니다. 1912년 일제가 ‘105인 사건’을 조작해 개신교 세력의 민족운동을 타도하려고 했습니다. 나에게도 파장이 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미국 미네아폴리스에서 개최되는 국제감리교대회에 한국 평신도 대표로 참석한다는 명목으로 37회 생일인 3월 26일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서울을 떠났습니다.”

-그때 망명할 생각을 하게 됩니까.
“미국으로 향하면서 일본에 잠시 들러 한인 유학생들에게 강연을 한 뒤 1912년 4월 10일 미국행 배를 탔습니다. 항해 도중 그 유명한 호화 여객선 타이타닉호가 북대서양에서 빙하와 부딪혀 침몰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러저런 소식을 들으며 마음이 착찹하던 차에 망명을 선택했습니다. 국제감리교대회에 참석한 뒤 뉴저지주 캄덴 시의 YMCA에서 잠시 일을 하다가 1913년 1월말 감옥 동지 박용만의 초청으로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하와이로 향했습니다. 박용만은 한인학교 건립을 위한 모금활동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박용만은 강원도 철원 출신으로 하와이에서 ‘국민회보’ 편집일을 맡고 있었습니다. 하와이에서 나는 옛친구인 와드먼 박사의 권유로 호놀룰루의 한인기숙학교를 맡게 됐습니다. 교민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여러 섬지역을 찾아 다녔습니다. 교민들은 파인애플 농장에서 고된 노동으로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급한 것이 자녀교육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여자 아이들은 아예 교육받을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우선 교포들의 도움을 얻어 ‘한인기독여학원’을 세웠습니다. 그러다가 1916년 한국문화 보급과 이민2세들을 애국자로 양성하는 것을 교시로 남녀공학인 ‘한인기독학원’을 열었습니다. 교민사회는 그 학교를 열성적으로 지원했고 학생수는 개학한 지 얼마 안 돼 140명정도 늘었습니다.”

-하와이로 가게 된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요.
“하와이에 처음 왔을 때 그 곳에는 한인 단체로 ‘대한인국민회’가 있었으며 서북(西北) 출신의 안창호, 옥중 동지인 박용만이 주도하고 있었지요. 아마 나는 하와이 교민들에 의해 지도자적 위치로 특별하게 초청된 것 같아요. 독립협회에서의 활동과 그로 인한 옥고(獄苦), ‘독립정신’ 집필, 한인 최초의 박사 등의 이력으로 지도자로 적임이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특히 조선의 독립을 끈질기게 주장한데 따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하와이에는 안창호를 지지하는 사람도 많았을 텐데요.
“맞습니다. 그는 정규 교육을 받지는 않았습니다만 뛰어난 지성과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였습니다. 나는 그와 기꺼이 협력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쉽게 그렇게 되지는 못했습니다. 안창호는 ‘대한인국민회’의 산하단체인 흥사단의 지도자였습니다. 흥사단은 서북지방 출신들이 이끌고 있었지요. 그들은 충성심으로 강하게 뭉쳐서 자신들의 특별한 이해관계를 추구했습니다.”

-그런 배경에는 뭐라고 생각했습니까.
“그들에게는 오래 된 역사적 배경이 깔려 있습니다. 1392년 조선왕조가 개국될 때 가장 강력히 반발한 사람들이 서북인들이었습니다. 왜냐 하면 태조 이성계는 서북인들의 고위직 임명을 배제했지요. 그러다보니 일제에 합병된 1910년까지 서북인들의 원한은 계속됐지요. 이런 것을 알기에 과거의 불공평을 시정학고 흥사단과 협조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서북인들의 등용을 위해 힘을 썼고 그들과 함께 일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흥사단 사람들은 ‘지배하지 않으면 망한다’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와이에서 나와는 적대적 관계였습니다. 특히 안창호는 영국과 미국의 위대한 민주주의의 전통을 이해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구체적인 정치적 문제보다 특유의 웅변술로 충성심을 호소했습니다. 안창호는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연루되어 체포됐고 1937년 서울에서 다시 체포되어 고문후유증으로 1938년 10월 숨을 거두었지요. 그는 높은 존경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거국적 민주적인 독립운동을 함께 하기에는 잘 맞지 않았다고 봅니다. 60세로 생을 마감했지만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위대한 애국자입니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신화에 가린 인물 이승만(2002, 로버트 올리버 지음, 건국대 출판부), 이승만과 그의 시대(2011, 이주영 지음, 기파랑), 우담 이승만 연구(2005, 정병준 지음, 역사비평사), 독립정신(2010, 이승만 지음, 동서문화사). 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2009, 유영익 외 지음, 연세대학교 출판부), 김자동 회고록(2018, 푸른역사), 이승만 다시보기(2011. 인보길 엮음, 기파랑), 독부 이승만 평전(2012. 김삼웅 지음, 책보세). 임시정부 시기의 대한민국(2015, 김희곤 지음, 지식산업사)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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