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번번이 마블의 벽을 넘지 못한 한계를 보인 DC는 지난 4월 가족용이라는 명목의 ‘샤잠’(데이비드 F. 샌드버그 감독)을 야심 차게 내놓았지만 고작 65만여 명의 국내 관객을 동원하는 데 그쳤다. 그나마 자존심을 지킨 게 503만여 명의 ‘아쿠아맨’(2018)인 DC의 수준을 확인해줬을 따름이다.

샤잠은 산스크리트어의 ‘수리수리마하수리’, 즉 히브리어의 ‘아브라카다브라’ 같은 마법 주문이다. 고아 빌리는 악마들을 봉인하고 지키는 정의의 마법사의 간택을 받아 솔로몬의 지혜, 헤라클레스의 힘, 아틀라스의 체력, 제우스의 권능, 아킬레우스의 용기, 헤르메스의 스피드 능력을 갖게 된다.

샤잠은 정의의 상징이자, 영웅이 된 빌리고, 빌리가 샤잠으로 변신하는 주문이다. 그런데 시작부터 엉성하다. 10대 중반의 빌리에서 20년쯤 뛰어넘은 샤잠의 외모가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인종이 바뀐 건 어색하다. 빌리는 백인인데 샤잠은 인도인 색이 짙다. 의도였다면 설명의 친절이 부족하다.

마법사는 오래전 새디어스를 후계자로 지목했지만 악마의 유혹에 쉽게 흔들리는 것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이에 상처받은 새디어스는 오랜 연구 끝에 마법사의 세계로 가는 길을 열어 그곳에서 악마들의 봉인을 풀고 악의 기운을 얻어 마법사의 지팡이를 탈취한 뒤 샤잠의 힘마저 빼앗으려 한다.

▲ 영화 <샤잠> 스틸 이미지

그런데 어릴 적 새디어스는 누가 봐도 입양된 동남아 혈통 소년인데 박사 새디어스는 확연한 백인이다. 영화는 그럴듯하게 연기하고 연출해 관객을 속이는 작업인데 속임수가 통하려면 개연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빌리와 샤잠, 소년 새디어스와 박사는 맥락이 없고 오히려 뒤바뀐 듯 어색하다.

외양은 ‘스파이더맨2’(2004)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샤잠과 새디어스의 대결은 스파이더맨과 닥터 옥토퍼스의 그것이 연상되는 것. 마블은 북유럽 신화와 그리스 신화에 꽤 독창적인 우주론을 뒤섞었다. 그걸 뛰어넘기 위해 인도 등 동양적 신비주의를 도입한 DC의 시도는 좋았지만 용두사미였다.

마블은 대놓고 가족영화를 표방하진 않지만 12살 이상 관람 가 등급이고, 피터(스파이더맨)도 빌리처럼 청소년이다. 피터는 어벤져스에 합류하라는 퓨리 국장의 제안에 망설이고 MJ와의 연애에 설레지만 빌리처럼 호기롭게 캔 맥주를 마셨다가 쏟아내는 유치한 짓을 하거나 징징거리진 않는다.

성공하는 가족영화의 선택은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기보다는 남녀노소 모두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로의 집중이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로 컴백한 스파이더맨은 그 나이대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있긴 했다. 그 후에도 크게 변하진 않았지만 아이언맨의 제지와 진화하는 자제로 선은 지킨다.​

▲ 영화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스틸 이미지

또 샤잠과 새디어스의 비행 액션은 ‘맨 오브 스틸’의 슈퍼맨과 조드 장군의 혈투를 넘지 못한다.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 리그의 시작’에도 만족하지 못한 관객이 설마 원더우먼도 안 나오는 ‘샤잠’에 이끌리리라 기대한 건 아닐는지 의심스럽다. ‘마사’라는 허무개그가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일각에선 DC가 부진한 이유를 어두움 때문이라고 한다. DC에서 어둡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 중 ‘배트맨 비긴즈’만 부진했지 ‘다크 나이트’와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도합 1000만 명을 넘겼다. 과연 ‘배트맨 비긴즈’나 ‘맨 오브 스틸’이 ‘다크 나이트’의 분위기보다 침울할까?

외려 마블이 더 세기말적이다. 이미 ‘퍼스트 어벤져’부터 나치를 모델로 한 히드라를 설정하고 세계대전을 넘어선 우주전쟁을 예고하더니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선 퀵실버의 죽음과 종말론적 세계관으로 암울한 분위기를 이었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선 전 생명의 절반을 없앴다.

그런 면에서 ‘샤잠’은 마법사의 공간만 음울할 뿐 시종일관 가볍고 흥겨운 분위기다. 새디어스는 입양된 이국인이고, 빌리는 미혼모의 미필적 고의로 고아가 돼 위탁가정에서 자라지만 번번이 가출해 생모를 찾아 헤맨 불량 청소년이다. 현재는 마음 따뜻한 이인종 부부의 다인종 가정에 살고 있다.

▲ 영화 <다크나이트> 스틸 이미지

캐릭터들은 배경이 밝지 못함에도 불구, 개성과 생기가 넘쳐 빌리 역시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그가 목숨을 걸고 샤잠의 초능력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설득력이 약하고 개연성이 떨어진다. 배트맨이 슈퍼맨을 죽이려다 둘 다 엄마 이름이 마사라는 걸 알고 포기하는 수준이다.

결과가 그러다 보니 빌리가 샤잠으로 완성되는 과정 역시 어색하다. 하루아침에 마법사의 힘을 물려받은 그는 샤잠을 외치면 슈퍼히어로가 되는 건 알지만 그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모른다. 처음엔 헤르메스의 스피드, 헤라클레스의 힘, 아틀라스의 체력, 제우스의 번개 같은 히트 비전을 확인한다.

그러다가 ‘과연 날 수 있을까?’로 고민하지만 이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 그런데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그 능력이 있음을 깨닫는다. 아킬레우스의 용기는 조금씩 갖춰가지만 아직 솔로몬의 지혜와는 멀고 제우스의 권능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전투력은 슈퍼맨이지만 정신력은 엉성하기 그지없다.

오리엔탈 신비주의에 그리스의 영웅들까지 동원했지만 정작 크립톤에서 온 고아만도 못하고, 돌연변이보다 목적의식이 희박하다. 신화를 빌려올 땐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는 걸 ‘원더우먼’과 ‘아쿠아맨’을 통해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샤잠’에선 아틀라스의 반항기도 제우스의 낭만주의도 안 보인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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