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암전> 포스터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김진원 감독의 데뷔작 ‘암전’은 한여름 더위를 피하는 데 가성비가 좋다는 호러영화의 목적론에 딱 부합한다. 8년째 공포영화를 준비 중인 감독 지망생 미정(서예지)은 피디로부터 보름 안에 기막힌 시나리오를 가져오지 못하면 영화사 대표에게 함께 해고될 것이라는 경고를 듣고 바짝 긴장한다.

영화과 후배들에게 아이디어를 구하던 중 10년 전 공개돼 시사 때 관객 절반이 극장 문을 뛰쳐나가고, 한 명이 심장마비로 사망한 전설의 공포영화가 있다는 정보를 듣고 대전으로 간다. 대학 영화과 교수로부터 아무런 단서를 얻지 못한 채 시내 주점에서 술을 마시던 중 영화과 학생들과 합석한다.

그들로부터 그 영화 제목이 ‘암전’이고 부천국제영화제에 출품됐었다는 얘기를 듣고 영화제 사무국에서 일하는 선배를 찾아간다. 웬일인지 프로그래머는 작품 열람을 불허하고, 선배와 프로그래머가 통화하는 틈을 타 미정은 잽싸게 메이킹필름 등 자료를 휴대전화에 복사해 집에 와서 열어본다.

더욱더 구미가 당긴 그녀는 감독인 재현(진선규)에게 전화를 걸지만 서비스가 중단된 번호다. 할 수 없이 SNS에 메이킹필름을 올리고 이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연락을 달라고 호소한다. 그러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온 뒤 자신이 재현이라며 글을 내리라고 협박하고 미정은 그와 약속을 잡는다.

▲ 영화 <암전> 스틸 이미지

재현 앞에서 글을 삭제한 미정은 몰래 그의 뒤를 쫓아 숙소를 알아낸 뒤 잠복했다 그가 외출하는 것을 확인하고 들어간다. 집안은 온통 촛불과 십자가로 장식돼있고, 벽에는 기괴한 그림으로 도배가 돼있다. 수상한 장롱을 발견한 그녀는 그 안을 뒤진 끝에 ‘암전’이란 제목의 테이프를 발견하는데.

거의 모든 요소가 상징적이거나 유비적이거나 대비적이다. 제목은 연극에서 장치나 장면을 바꾸기 위해 무대 조명을 끄는 것을 뜻하는데 여기선 그런 전환, 변환과 더불어 절망과 끝을 의미한다. 미술에서 비계를 설치하고 결계의 의미의 소품을 배치한 건 과도한 욕망과 벼랑 끝에서의 방어다.

무대가 폐쇄된 극장인 건 욕망과 그에 대한 집착, 그리고 그게 무너진 뒤 내면의 몰락의 상징성. 한때 문전성시를 이뤘지만 여배우 순미의 의문의 죽음 이후 망해 지금까지 흉물스러운 건물로 방치된 국도극장과 순미가 공포의 중심. 감독은 애써 오컬트 등으로 포장하지 않는 단순함으로 승부한다.

공포를 위해 이런저런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지 않고 군더더기 없이 스피디하게 진행된다는 흐름에서 뚝심이 느껴진다. 피디의 “난 신인 감독이랑 일하는지 거장이랑 일하는지 헷갈려”라는 대사는 마치 자신에게 바치는 헌사로 들린다. 재현과 미정을 통해 자신의 지난한 과정을 설명하려는 듯하다.

▲ 영화 <암전> 스틸 이미지

존재만으로도 공포영화 자체인 국도극장과 영화 속의 영화라는 설정은 ‘곤지암’(2017)이나 유사 파운드 푸티지 장르를 연상케 하고, 전체 플롯은 ‘비열한 거리’(2006)도 엿보인다. 그래서 영화의 큰 틀은 픽션과 팩트라는 이원론이다. 영화 속 인물들이 ‘암전’을 귀신이 찍은 영화라고 하는 것도.

한 스태프가 재현에게 “영화 왜 해요?”라고 묻자 “한때 왕따였는데 ‘엑소시스트’를 보니 무서운데 고통이 사라졌어요. 사람들의 고통을 잊게 해주기 위해 공포영화를 찍어요”라고 답한다. 그건 자살 경험이 트라우마로 남은 미정이 과거 병실에서 그걸 본 것과 오버랩 되며 둘의 내면을 연결한다.

이렇게 플롯도 외형도 모두 자전적이다. 10년째 미정의 스태프로 일하는 한 후배는 “꿈을 위해 사는 선배가 멋있다”고 한다. 재현은 “난 그냥 미친 거야”라고 말한다. 희망과 광기의 이원론. 미정의 시나리오를 본 후배가 주인공들의 결말을 묻자 “공포영화니 해피엔딩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암전’을 접한 후로 미정의 주변엔 괴기스러운 현상과 형상이 출몰한다. 그게 팩트라면 귀신일 것이고, 픽션이라면 파레이돌리아다. 광기에 휩싸인 재현이 미정에게 “너 순미지?”라고 묻고, “꺼져, 대체 내게 뭘 원하는 건데”라고 절규하더니, “이제 영화를 끝낼 때”라고 독백하는 것까지도 그렇다.

▲ 영화 <암전> 스틸 이미지

주제는 고대, 중세, 근대의 사상가들을 끌어들인다. 메피스토펠레스가 “항상 악을 원하면서도 항상 선을 창조하는 힘의 일부”라고 자신을 소개한 ‘파우스트’만큼이나 기독교의 교리에 충실한 기류도 보인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선과 악은 하나라 했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은 악을 모른다고 했다.

메피스토펠레스다. ‘암전’엔 타락의 심연까지 가려 그에게 영혼을 파는 파우스트가 등장한다. 과연 ‘암전’은 누가 찍은 걸까? 진짜 귀신일까? 파우스트는 누구일까? 궁극의 지식인 파우스트마저 타락시키는 인간의 욕심의 끝은 어디일까? “내일부터 교회라도 나가”라는 재현의 충고는 꽤 의미있다.

많지 않은 예산과 거창한 멋 부림 없이도 피서용으로 썩 괜찮은 데뷔작을 만들었다. 독창적이진 않지만 개성이 강하고, 개괄적이지만 개연적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침체된 호러의 장르적 발전에 터닝 포인트의 일례가 될 듯하다. 극장의 액자에 광주민주화운동이 발생한 1980년이 선명하게 적혀있다.

박정희의 쿠데타는 전두환의 권력욕에 대한 비뚤어진 욕망의 에너지원이 됐지만 결국 광주민주화운동에 이은 1987년의 항쟁으로 그 잔혹극은 비극으로 끝났다는 걸 대놓고 상징하는 미장센. 미정이 펼친 판타지도 좋지만 그녀의 과거에 대한 설명이 누락된 건 옥에 티다. 15살 이상. 8월 15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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