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변신>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본떠 신을 만들었고, 기독교에서 하느님은 자신이 만든 인간 형상의 독생자 예수를 도성인신으로 세상에 내보냈다. 그렇다면 악마(사탄)도 체화할 수 있다는 데서 영화 ‘변신’(김홍선 감독)은 시작된다. ‘사자’와는 달리 호러 장치가 극대화된 또 다른 오컬트다.

구마 사제 중수(배성우)는 소녀 지은의 구마 의식을 하다 그녀를 죽이려는 악마를 막지 못한 자책감에 시골로 들어간다. 그를 향한 악의적 소문은 함께 살던 형 강구(성동일)와 명주(장영남) 부부의 딸 선우(김혜준)와 현주(조이현), 막내아들 우종(김강훈)에게 미치고, 일가족은 외진 데로 이사한다.

이사를 마친 날 밤 이웃집에서 수상한 소음이 계속 들린다. 다음날 강구가 출근한 뒤 창가에 걸린 고양이 사체를 보고 현주가 기절한다. 강구는 병원에 달려와 가족을 태우고 집에 돌아온다. 여러모로 이웃이 피해를 끼친 데 분노해 그리로 달려가니 문이 열린다. 안에 들어가니 동물의 사체투성이다.

그는 집주인인 듯한 중년남성의 서늘한 표정에 주눅 들어 도망치듯 뛰쳐나온다. 갑자기 강구와 명주가 교대로 평소와 달리 폭력적으로 돌변하고 아이들은 공포에 휩싸인다. 강구는 악마가 가족으로 변신해 나타나는 걸 깨닫고 중수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하지만 오늘 밤 출국한다며 거절하는데.

▲ 영화 <변신> 스틸 이미지

‘엑소시스트’, ‘검은 사제들’, ‘사자’ 등과 비교될 수밖에 없는 범주적 지평이 태생적인지라 감독은 공포 장치를 극대화함으로써 변별력을 갖추는 데 꽤 신경을 썼다. ‘콘스탄틴’처럼 대부분의 오컬트는 악귀가 인간의 몸을 빌려 체화하지만 이 작품은 스스로 질료와 형상을 갖춘다는 차별성을 둔다.

플롯의 중심은 중수와 악귀의 대립인데 악귀가 이처럼 유물론적이라면 중수는 유목론(질 들뢰즈)적이다. 기존의 사탄은 육화하기 위해 매개체가 필요했지만 여기서의 악귀는 전지는 아니지만 어떤 사람으로라도 변신할 수 있다는 것만큼은 전능하다. 그 현현의 목적은 전지전능의 신이 되는 것이다.

그는 “우린 신이 있던 시절부터 있었다. 아니 그 이전부터 있었다. 신은 너희를 버렸다”라고 외친다. 그의 가장 큰 무기는 속임수다. 사제와 같이 기도문을 읊조리고, 마치 신의 계시 같은 가르침을 암송한다. 현대 자본주의는 덕, 선, 정의를 가르치지만 현실적으론 모든 가치관을 돈으로 정립한다.

중수는 그게 헷갈려 방황한다. 지은의 구마 의식 때 낭패감을 맛본 뒤 시골로 내려가 배추를 키우며 은거하다 선배 최 신부에게 해외 파견을 부탁한다. 신앙으로써도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없었던 한계다. 들뢰즈는 “우리가 부모를 소비하게 된 것은 자본주의와 함께다”라는 유명한 잠언을 남겼다.

▲ 영화 <변신> 스틸 이미지

그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변화를 추구하고, 닥치는 환경에 적응하는 자유로운 사고로 소유의 개념 없이 자본주의의 코드화를 거부하는 유목론을 주창했다. 중수가 떠나려 한 건 탈코드화의 유목론이었지만 결국 자본주의적 공무원인 형의 제 가족을 지키려는 이기주의에 발목이 붙잡힌 것이다.

최 신부의 “세상살이란 좌회전도 하고, 우회전도 한다”는 말도 그 뜻이다. 이리저리 유목한다는 것과 더불어 때론 이념도 이리저리 유전(流轉)한다는 헤라클레이토스다. 강구 가족이 주변의 눈길을 피해 이사 온 데가 막다른 골목집이다. 척박한 자본주의 구조에서의 생존이냐 멸절이냐의 낭떠러지.

그래서 중수는 형과 가족에게 “절대 아무도 믿지 말라”고 내내 충고한다. 그가 환속을 신청했던 건 어쩌면 탈코드화의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스승인 발타자르 신부는 꽤 중요하다. ‘콘스탄틴’의 발사자르는 별 의미 없이 플롯의 구성상 콘스탄틴을 괴롭히는 한 악마 캐릭터에게 부여한 것이다.

이 작품에선 17세기 에스파냐 예수회 회원 발타자르 그라시안이다. 그는 마키아벨리처럼 인간의 내면에 선과 악이 공존한다고 봤다. 그 사상은 이 영화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라시안은 이 세계를 위선과 기만으로 가득 찬 곳이라며 부정적으로 봤기에 신중하라고 권고했다. 믿지 말라는 중수 같다.

▲ 영화 <변신> 스틸 이미지

그 세계관이 유신(唯信)의 교단과 충돌했음은 당연했다. 그는 ‘인간의 삶은 곧 인간적 사악함과의 투쟁’, ‘인생의 첫 여로는 죽은 자들과의 여흥이니 둘째 여로에서 좁은 곳에선 모든 걸 발견할 수 없으므로 산 자들과 보내면서 좋은 것들을 찾고, 셋째 여로는 자기 자신 안에서 보내라’고 적었다.

들뢰즈 정도의 천재가 그라시안을 안 읽었을 리 없다. 중수는 신학대학에서 분노한 자는 신을 원망하고 자아를 상실하기 때문에 악마가 타깃으로 노린다고 가르친다. 심리학의 ‘좌절-공격 이론’은 새롭게 ‘상대적 박탈감 이론’을 낳았다. 중수가 가르치는 분노 이론이고 그게 자본주의의 현실이다.

한 집에 동시에 두 명의 강구가 등장한다. 한 ‘명’은 당연히 사람이 아닌 악귀지만 어쩌면 그건 감독의 인간의 내면엔 선과 악이 공존한다는 ‘카인과 아벨’ 논리다. 곡식을 바칠 것이냐, 양을 바칠 것이냐의 자유의지가 선과 악을 결정한다는 인간의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일면에 대한 통렬한 환유다.

그래서 중수는 거부하는 데도 구마의식을 강요하는 강구에게 “나는 가족 아냐?”라고 울부짖는다. 불교의 신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득도에 따라 누구라도 부처가 될 수 있다. 이 영화는 그 반대를 상정한다! 여러 호러물을 빌려 공포를 극대화했고 반전이 섬뜩하다. 15살. 8월 21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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