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이 독살됐다는 소문 [김문 작가]

김문 작가l승인2019.08.13l수정2019.08.13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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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이승만]

▲ 사진=kbs 방송화면 캡처

고종이 독살됐다는 소문

이와 관련 로버트 올리버가 쓴 ‘이승만’에는 이렇게 나온다.

일본측 발표에 의하면 뇌일혈에 의한 사망이었다. 그러나 혈압이 정상이던 고종이 뇌일혈로 사망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었다. 두 가지 소문이 전국을 휩쓸었다. 하나는 그가 독살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총애하던 아들 영친왕과 나시모토 노미야의 딸 마사꼬(方子) 사이의 결혼식이 다가오자 이를 비관하여 자살했다는 것이다. 일제는 고종의 사망소식을 이틀이나 숨겨 그가 독살되었을지 모른다는 의구심에 불을 지폈고 처음에는 특별 애도기간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마지못해 3월 3일 지역별로 추도식을 갖도록 했다.

-결국 고종의 사망은 3.1운동으로 연결됐고 3.1운동은 또 상하이임시정부 탄생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네요.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셈입니다. 애국동지들이 고대하던 기회는 강압에 의해 퇴위한 고종에 의해 제공됐지요. 상하이에 온 박용만은 일제에 대항하는 무장봉기를 일으켜 한국인의 결의를 보여주자고 했지만 평화 시위방식을 채택했습니다. 사상 처음으로 비폭력, 무저항 시위가 전국 규모로 조직된 것이지요. 3.1운동은 종교인들이 주도한 애국심이었죠. 특히 3.1운동은 괄목할만한 승리를 거두었는데 4월16일부터 23일까지 전국 각지 대표들이 비밀리에 서울에 모여 한성임시정부를 조직한 것입니다. 그들은 대의정치를 표방해 미국 헌법의 1차 수정조항 10개조에 포함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을 기초하고 나를 집정관총재로 선출했지요. 거의 때를 같이 해 시베리아와 상하이에 망명한 애국지사들도 모임을 갖고 서울 대표들의 결정을 지지했습니다. 현대사에 가장 장수한 망명정부는 그렇게 탄생됐습니다.”

짧은 상하이 체류 기간

-3.1운동 이후 최고 지도자로 부상했고 1919년 9월 9일 상하이 임시정부가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중심제를 도입하면서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됐습니다. 그런데 상하이 체류기간은 1920년 5월까지 그러니까 6개월 정도입니다. 왜 그렇게 짧았나요.
“프랑스 조계에 있는 임시정부에서의 활동은 아주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임시정부는 재정적으로 궁핍했고 지역과 이념이 갈라져 있었습니다. 국무총리 이동휘와의 갈등도 있었구요. 이동휘는 함경도 출신의 공산주의자로 소련의 도움을 받아 무장투쟁으로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나는 만주에서 무장 부대를 조직해 국내에 침투시켜 관공서를 폭파하고 관리들을 암살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 임시정부 청사를 시베리아로 옮겨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졌습니다. 미국의 지원을 전제로 하는 나의 외교독립론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지요. 나는 무장투쟁은 한국인의 희생만 불러올 것이라며 반대했습니다. 이동휘는 1921년 1월 국무총리 자리를 내놓고 시베리아로 떠났고 그 뒤를 이어 학무총장 김규식, 군무총장 노백린, 노동국총판 안창호 등도 연달아 사퇴했습니다. 특히 베이징에 있는 신채호의 비난이 거셌습니다. 신채호는 임시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외교를 통한 독립전략을 탐탁지 않게 생각해습니다. 의정원에 있는 안창호의 평안도 세력이 나에게는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안창호와 여운형은 군중대회를 열고 미국에 의존하려는 정의 독립운동 노선을 성토했습니다. 게다가 나를 살해하기 위해 김봉원의 의열단이 파견된다는 소문도 나돌았습니다. 이래저래 괴로웠습니다. 빨리 상하이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상하이 임시정부에 있는 동안 많이 괴로웠다는 것인가요.
“괴롭기도 했지만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모든 임정요원들은 이익집단을 형성하고 있는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임정의 재원은 동포들의 자발적인 헌금이 유일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헌금을 낸 사람들 대부분이 임정의 정책결정이나 인사문제에 참여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임정이 국제적인 승인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임정 참여자 모두가 자신의 지위와 권한을 높이기 위해 서로 각축을 벌였지요. 국제적인 인정을 받기 전에 자신의 위치를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는 계산 때문이지요. 그래서 반목과 다툼이 생겨나고 첨예화 된 정책대결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부 인사들은 러시아에서 정권을 쟁취한 공산당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지지했고 중국의 여러 파벌들과 가까이 하려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유격전, 일본 요인 암살 등 투쟁노선을 적극 지지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그들은 만주 국경에서 넘나들 광복군과 국내 무장세력을 연계해 활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나의 신념과 배치되는 전략이었죠. 나는 이들에게 무장투쟁은 승리를 거둘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일제의 무단통치를 강화할 우려가 있다고 설득했습니다. 임정 초기부터 그런 일들과 부딪히게 됐습니다.”

‘이승만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오영섭 연세대 현대한국학교수가 쓴 당시 상황을 잠시 들여다보면 이렇다.
임정 초기에 대통령 이승만은 반대파의 비판과 지지세력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의 소재지인 상하이에 부임하지 않았다. 1920년 12월부터 1921년 5월까지 약 6개월간 상하이에 체류한 것을 제외하면 그는 나머지 기간의 대부분을 워싱턴에 머물며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서신과 직접 왕래를 하려면 적어도 3~4주 걸리는 워싱턴과 상하이 사이의 원거리에서 이승만은 어떻게 대통령직을 수행했을까. 이승만은 공간적인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통치장치를 개발했으며 그의 통치구상은 임시정부와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이승만 통신원들의 활동을 깊이 들여다보면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다소나마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919년 3.1운동 전후 동북아의 국제도시 상하이는 저명한 독립운동가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이들은 3.1운동 전부터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동제사 및 신한청년단 임원들과 합류하여 프랑스조계 보창로에 임시 독립사무소를 정하고 임시정부 수립에 착수했다. 1919년 4월 10일~11일 양일간 29명의 독립운동자가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에 모여 회의를 가졌고 그 자리에서 이동녕을 임시의정원 의장에, 손정도를 부의장에 선출하고, 이어 대한민국의 국호, 연호, 관제, 정부관원, 임시헌장, 선서문과 정강 등을 결정하였다. 이로써 임시정부가 출범하였다. 임정은 출범초부터 국제정세의 변화와 내부경쟁의 격화에 따라 언제든지 대립하고 분화할 수밖에 없는 위태로운 처지에서 출발했다. 민족적 협력과 통합이 절실히 요구되던 임정초기에 이승만이 자칫 정치적 분란이나 파쟁을 초래할지 모르는 통신원과 같은 비밀요원을 임명하거나 파견했을 것이다.

▲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회

내부경쟁의 대립과 분화

-대체적으로 임정 초기에는 모든 것이 정립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10~30년대 이승만 대통령의 활동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미주 지도자간의 관계노선이 어떠했는지 비교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미주 지도자 중 박용만과 안창호, 그리고 내가 주축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박용만은 무력투쟁노선, 안창호는 실력양성노선, 그리고 나는 외교노선을 중시했습니다. 그에 따른 추종세력들이 형성됐는데 나는 동지회, 안창호는 흥사단, 박용만은 국민군단으로 대표되는 자신의 독자적 지지기반을 갖고 있었지요. 그렇게 세 사람은 3.1운동 이후 각지의 임시정부에서 중요한 지위에 추천될 정도로 명망을 가지게 됩니다. 당시 일제 자료에는 박용만을 하와이 ‘무단파’(武斷波)의 수령으로 나는 문치파(文治波)의 수령으로 분류했습니다. 원래 나와 박용만은 대한제국때 감옥에서 형제결의를 했는데 1915년 하와이 한인 사회의 분쟁때 서로간의 갈등이 생깁니다. 그 밑바탕에는 독립노선의 차이, 한인 사회 지도권과 재정권 장악을 둘러싼 일들이 깔려 있지요. 그러면서 둘 사이에 안창호가 개입되면서 문제는 복잡해지게 됩니다. 안창호는 외교론과 실력양성론에 공감하며 경제조직이 연계된 사조직을 이끈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으나 워싱턴 국축회의가 실패한 1920년대 중반부터 세 사람의 노선이 분명하게 달라집니다. 그러다가 박용만은 1928년 암살되고 안창호는 일제에 체포돼 두 차례 감옥생활을 하다가 1938년 병사하게 됩니다.”

-상하이에 머무는 5년여 동안 주로 한 일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첫번째는 임정요원들이 갖고 있는 서로 다른 노선을 한 데 모으는 것이고 두 번째는 국제무대에 임시정부의 당위성을 알리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활동을 하려면 재원이 필요하니까 재원확보에 주력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원만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921년초 미국의 찰스 에반스 휴즈 국무장관은 윌리엄 보라 상원의원의 제안에 따라 태평양지역 이해당사국들의 워싱턴 국축회담을 제의하게 됩니다. 나는 그 회담을 망명 애국자들의 의견을 결집하고 한국문제에 국제적인 관심을 고조시킬 좋은 기회로 여겼습니다. 회담은 11월 12일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포르투갈, 그리고 중국과 일본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릴 예정이었습니다. 나는 동양에 항구적인 평화가 정착되려면 한국의 독립회복이 먼저 이루어져 동북아시아에서 완충국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열강 대표들을 설득해보려고 했습니다. 이성의 승리를 믿는 것이지요. 그러던 중 1921년 5월 28일 나는 평화를 되찾기 위해 임정요원들과 결별하고 컬럼비아호를 타고 상하이를 떠났습니다. 마닐라를 거쳐 6월 29일에 호놀룰루에 도착했는데 교민들로부터 많은 환영을 받았습니다. 상하이에서 받은 마음의 상처를 달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분위기를 등에 업고 지지자들을 모아 대한동지회를 조직했습니다. 그렇게 지인들과 유쾌한 시간을 보내다가 군축회담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군축회담이 열리게 될 워싱턴에 도착한 것은 8월 27일이었습니다. ”

▲ 사진=kbs 방송화면 캡처

군축회담 참석불발

-군축회담을 위해 어떤 것들을 준비했나요.
“할 일들이 많았습니다. 우선 나의 활동이 공식적인 입장이라는 것을 강력 심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한 임시정부가 회의에 초청받지도 못한 상황에서 특별히 신경을 쓸 일이 많았지요. 임시정부 전권대사 자격으로 한국의 독립청원서를 제출했습니다. 서재필도 대표단에 합류했습니다. 나의 평생 친구가 될 제이 재롬 윌리엄스의 도움으로 언론인들을 상대로 억압받는 한국 민족의 영웅적 노력을 부각시키는 데 주력했습니다. 기자회견도 열렸는데 비판적인 기사들도 보도되었습니다. 이승만은 지도자로 자처하는 인물들 중 한 사람에 불과하며 민족전체를 대표하는 것도 아니라는 내용도 더러 있었습니다. 그런 기사를 볼 때 상당히 괴로웠지요. 그러는 한편 한국 독립문제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일깨우기 위해 1년 전에 시체를 넣은 관틈에 숨어 상하이까지 몰래 간 과정을 기사화 하도록 해 적지 않은 흥미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뭔가 일이 순조롭지 않았겠네요.
“상하이 임시정부에 연락해 공식 신임장을 요청해 휴즈 장관에게 전달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일본의 방해 때문이었죠. 차선책으로 옵서버 자격이라도 얻으려 했으나 군축회담에서 문제를 제기하려는 노력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중에서 가슴 아픈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세계가 힘의 정치라는 낡은 체제의 지속을 수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강자에 의한 약자의 지배라는 것입니다. 3.1독립선언문에서 그토록 찬양한 ‘정의의 신세대’는 열강들의 편의에 의해 희생되었고 그것은 곧 세계 2차대전의 출발이었습니다. 약소국에 대한 강대국의 주장을 당연시 하는 서구열강들의 논리에 당황하고 분개했습니다. 특히 내가 만나는 외국인들마다 일본의 입장을 지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늘어나는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해외로 팽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입장이었지요. 이런 것들이 절망감으로 다가왔습니다.”

-군축회담 참석불발로 임시정부와 인연이 끊어지게 됩니까.
“상하이에서 미국으로 돌아온 이후 상하이에서는 이승만 퇴진운동이 벌어졌고 결국 오늘날 국회에 해당하는 의정원은 박은식을 구무총리 겸 대통령 대리로 선정했습니다. 워싱턴 국축회의에서 외교독립노선이 별로 효과를 보지 못하자 한국인들 사이에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게 됩니다. 그래서 ‘한인기독학원’과 ‘한인기독교회’의 운영에 전념하게 됩니다. 가끔 미국 본토에 드나들면서 독립운동 기구인 ‘구미위원부’의 일을 감독했습니다. 워싱턴의 구미위원부는 미국의 여론을 한국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선전기구였습니다. 언젠가는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할 것이고 그때 한국이 독립할 것이라는 생각을 널리 알리는 일을 주로 했습니다.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일본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고 계속 경고했지요. 이럴 무렵 상하이 임시정부 의정원은 1925년 이승만 대통령 탁핵안을 통과시키게 됩니다. 이와 동시에 미국에서의 활동기반인 구미위원부도 폐지했습니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구미위원부가 하던 일을 안창호 지지세력들이 쥐고 있는 국민회 중앙총회에 넘기게 했지요. 이렇게 해서 나와 상하이 임시정부의 공식적인 관계가 16년동안 끊어지게 됐습니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신화에 가린 인물 이승만(2002, 로버트 올리버 지음, 건국대 출판부), 이승만과 그의 시대(2011, 이주영 지음, 기파랑), 우담 이승만 연구(2005, 정병준 지음, 역사비평사), 독립정신(2010, 이승만 지음, 동서문화사). 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2009, 유영익 외 지음, 연세대학교 출판부), 김자동 회고록(2018, 푸른역사), 이승만 다시보기(2011. 인보길 엮음, 기파랑), 독부 이승만 평전(2012. 김삼웅 지음, 책보세). 임시정부 시기의 대한민국(2015, 김희곤 지음, 지식산업사)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김문 작가  gamsam10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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