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광대들: 풍문조작단>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광대들: 풍문조작단’(김주호 감독)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연출한 감독답게 코미디로 시작하지만 시퀀스가 거듭될수록 과정이 중요한가, 결과가 중요한가의 목적론과 인식론의 진지한 대결을 풀어낸다. 조카 단종을 제거하고 즉위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세조(박희순)는 여전히 불안에 떤다.

세조는 아직도 자신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 민심과 단종 출산 뒤 3일 만에 눈을 감은 현덕왕후의 원귀의 허상에 시달리면서 심한 피부병까지 앓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충절을 지키며 죽음을 기꺼이 맞이한 사육신을 기리는 ‘육신의 충’이란 서책이 세간에 나돌아 집권 세력을 불안에 떨게 만든다.

영의정 한명회(손현주)는 여론을 바꿀 묘책을 찾던 중 풍문을 조작하는 사기꾼 광대패 정보를 듣고 그들을 부른다. 달변가인 덕호(조진웅)를 리더로 기술자 홍칠(고창석), 무녀 출신 근덕(김슬기), 미술가 진상(윤박), 신출귀몰한 재주를 지닌 팔풍(김민석) 등은 사면을 조건으로 제안을 수락한다.

3일 뒤. 속리산 법주사로 불공을 드리러 떠나는 세조의 행차 앞에 커다란 소나무 가지가 길을 가리고 늘어져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행차가 지날 때 저절로 가지가 올라가더니 행렬 끝을 보내고 자연스레 내려온다. 그뿐만이 아니라 양주 회암사 불공 행차 땐 부처가 현신하는 등 세조 찬양 일색이다.

▲ 영화 <광대들: 풍문조작단> 스틸 이미지

급기야 오대산 상원사 행차 때 계곡물에서 몸을 담그자 문수보살이 현현해 세조의 몸을 씻어 피부병을 낫게 해준다. 이는 모두 덕호 패거리들의 기획력과 기술력이 낳은 결과였다. 민심은 크게 돌아 세조는 하늘이 내린 제왕이란 여론이 형성되고 사육신의 충절은 점점 백성의 뇌리에서 사라진다.

광대패는 천민 신분을 벗고, 작은 벼슬을 얻으며, 으리으리한 대저택도 받는 등 팔자가 바뀐다. 재담꾼 말보(최귀화)는 여전히 저잣거리에서 세조를 풍자하는 1인극을 하며 살아간다. 덕호는 말보의 조카이자 제자였다. 말보는 성공해 나타난 덕호에게 충고를 하고 덕호는 삼촌의 안위를 걱정한다.

민심이 바뀌었지만 세조는 죄책감 때문에 어른거리는 원귀에 시달리고, 한명회, 홍윤성, 양정을 주축으로 한 실세들의 세력이 제어할 수 없이 커짐에 따라 세자의 안위에 대한 근심이 나날이 커져만 간다. 어느 날 한명회는 덕호를 불러 경천동지할 만한 제안을 하고, 광대패는 자중지란에 빠지는데.

세조실록에는 40여 건의 비현실적인 내용이 적혀있다. 실록 전체가 실제인지, 실재인지는 현대인으로선 알 도리가 없다. 언로가 막히고, 임금과 왕가의 언행마저도 제도에 의해 통제된 시대상에 비춰 ‘그러려니’ 여길 따름이다. 감독은 과학적 상상력으로 당시의 신비주의를 현대의 마술로 환원한다.

▲ 영화 <광대들: 풍문조작단> 스틸 이미지

세력가들이 역사 왜곡의 목적으로 사관들에게 황당한 판타지를 적게 했다는 의심을 지운 채 실록 자체를 팩트로 인정하고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그 시대에 일어날 수 있었는가’라고 고심한 노력은 인정받을 만하다. 공갈패들이 한명회와 만나고 평판을 바꾸는 재주를 부리는 과정은 코미디다.

덕호가 자신은 “명령을 안 듣는 유일한 천민”이라 주장하며 한명회와 기 싸움을 벌일 때마다 바짓가랑이를 적시는 홍칠이 유머의 첨병인데 뜬금없이 등장하는 근덕의 존재감을 보는 재미가 의외로 크다. 그 어떤 여배우도 부처나 보살로 변신한 김슬기의 존재감을 따라가기는 힘들 것으로 느낄 만큼.

인트로는 당시 암울했던 시대상과 달리 활기찬 저잣거리의 생기 넘치는 풍광으로 펼쳐지는데 그 중심엔 한 양반가 가장의 애첩이 있다. 그의 아내는 덕호에게 그녀를 처리해달라고 의뢰한다. 덕호는 지적이고 점잖은 태도로 그녀에게 접근해 수작을 부리는데 ‘아비정전’(왕자웨이)의 대사를 빌린다.

아비가 수리진과 처음 만났을 때 말했던 “너와 난 1분을 함께했어. 난 이 소중한 1분을 절대 잊지 않을 거야”와 수시로 읊는 내레이션 “발 없는 새가 있지. 늘 날아야 하는데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쉬고 평생에 한 번 땅에 내려앉지. 그건 바로 죽을 때야. 난 이젠 너한테 내려앉고 싶어”라고 유혹하는 것.

▲ 영화 <광대들: 풍문조작단> 스틸 이미지

하지만 한명회 일당의 방자한 안하무인이 하늘을 찔러 법도가 무너지고 백성의 삶이 파탄에 이를 즈음 덕호는 변한다. 그 동인이 양정의 성폭력에 단호하게 맞선 근덕과 한명회의 신성모독에 결연하게 바른말을 쏟아낸 진상이었다면 동력은 ‘육신의 충’ 원본을 고이 간직한 정의의 표상 말보였다.

덕호는 평소 “난 내 눈으로 본 것만 믿어”라며 사육신이 충신이란 사실을 거부했을 만큼 철저한 유물론자이자 경험론자였다. 말보는 비록 세조가 즉위 후 나름대로 훌륭한 치적을 이뤘지만 원론적인 관념론으로 그를 정통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여기서 역사는 과정이냐 결과냐의 갈림길에 놓인다.

말보의 제왕과 천민의 이중 복장과 “공갈패 끝 진실패 시작”이라는 덕호의 테제와 맞물린다. 인과론자 한명회는 “광대란 불길에 뛰어드는 부나방”이라지만 선을 깨달은 덕호는 “당신이야말로 최고의 광대”라고 비아냥댄다. 공갈패의 평판을 바꾸는 재주는 작금의 가짜뉴스와 여론조작에 다름없다.

약간 과장된 코미디로 잔재미를 주더니 가슴 뭉클하게 만드는 정의와 진리의 추구로 대의명분을 강조한다. ‘정치는 프로파간다’라는 강한 울림은 국민으로서 정치인을 어떻게 평가하고 심판해야 하는지 강렬한 포퓰리즘을 설파한다. 역사의 중요성에 대한 메시지만큼은 정말 장엄하다. 21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