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인비저블 위트니스>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스페인 오리올 파울로 감독의 스릴러 ‘인비저블 게스트’의 국내 리메이크를 앞두고 이탈리아의 스테파노 모디니 감독이 리메이크한 ‘인비저블 위트니스’가 오는 28일 국내 개봉된다. 승승장구하는 사업가 아드리노는 아내 소니아와 딸을 사랑하지만 유부녀 사진작가 라우라와 부적절한 관계다.

그는 도시에서 떨어진 스키장 내 호텔 방에 라우라와 들어갔다 잠시 후 머리에 둔기를 맞고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난다. 라우라는 꽤 큰 액수의 지폐들이 널브러진 한 가운데에서 시체로 발견되고 경찰이 들이닥친다. 창문 손잡이는 없고 내부 안전 고리는 채워져 있어 외부인의 침입 흔적은 없다.

아드리노는 침입자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재판은 그의 재력과 변호사 파울로의 실력으로 유리하게 변한다. 그런데 은행원 다니엘레 실종 사건이 라우라 사건과 연결돼 새 변수가 된다. 검찰이 결정적인 증인을 확보했다는 소식에 아드리노는 30년 동안 패한 적 없는 변호사 페라라를 고용한다.

페라라는 3시간 뒤면 증인이 검찰청에 출두할 것이니 그 시간 안에 자신에게 진실을 털어놓아야만 무죄로 유도할 수 있다고 설득한다. 그러자 아드리노는 두 살인 사건의 전모를 차근차근 설명한다. 3달 전 그는 프랑스 출장을 간다며 아내와 비서를 속이고 라우라와 시골 별장에서 밀회를 즐겼다.

▲ 영화 <인비저블 위트니스> 스틸 이미지

다음날 늦잠을 잤기에 서둘러 별장을 나와 BMW로 이동하던 중 갑자기 나타난 사슴 때문에 마주 오던 다니엘레의 차와 사고를 내고 다니엘레는 즉사한다. 서둘러 현장에서 도망치려 하는데 시동이 안 걸린다. 설상가상으로 다른 차 한 대가 나타난다. 거짓말로 그 목격자를 그냥 지나가게 한다.

아드리노는 다니엘레의 차를 운전해 호수에 유기하고, 라우라는 아드리노의 차에서 견인차를 부르는데 때마침 레인지로버를 탄 노인 토마소가 나타나 젊었을 때 BMW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수리할 수 있다며 여기서 가까운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한다. 그는 BMW를 견인해 집에 가 수리해준다.

그동안 라우라는 집안에서 토마소의 아내가 주는 차를 마신다. 아내는 “자식이 있냐”고 물은 뒤 자식 예찬론을 늘어놓으면서 사진을 보여준다. 그 속의 청년은 조금 전에 아드리노가 유기하러 간 다니엘레. 때마침 차 수리가 끝나고 라우라는 간신히 운전해 그 자리를 벗어나 아드리노를 태우는데.

감독과 지적인 게임을 즐기고 싶다면 딱 좋은 미스터리 스릴러다. 현대 산업사회가 만든 자본주의, 혹은 자본주의가 만든 성공 신화의 추악한 이면을 까발리는 재주가 탁월하다. 아드리노와 라우라는 사랑하는 배우자가 있고, 이혼할 마음도 없는데 일종의 계약 관계로 서로의 육체를 탐닉한다.

▲ 영화 <인비저블 위트니스> 스틸 이미지

마음에 없지만 애사심을 가진 척하는 샐러리맨, 그들을 존중하지 않지만 아끼는 척하는 경영진. 바로 아드리노와 라우라의 관계고, 자본주의와 국민과의 관계가 아닐까? 토마소는 라우라에게 셰익스피어를 좋아한다며 “모든 사람은 배우”라는 명제를 던진다. 라우라와 아드리노가 배우니까.

토마소 집의 가면은 의미가 깊은 미장센이다. 아드리노는 라우라에게 “난 위선자고, 당신이 내 유일한 위선. 우린 다 가질 순 없다. 뭔가 포기해야 한다. 그러니 각자의 자리를 지키자”라며 이별을 통보한다. 그 말 자체가 위선이고, 외려 라우라를 제외한 그의 모든 게 위선이라는 의구심을 준다.

대다수 영화의 플롯이 선과 악의 이원론이다. 이 작품 역시 뭣이 선이고 악인지, 뭣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묻는다. 주인공들은 “망가진 나를 감추려고 가면을 썼다”며 마치 아우구스티누스처럼 ‘고백론’을 펼치지만 그것조차도 가면이다. “걱정 마, 길은 열리기 마련”이라고 자위하는 게 그 증거다.

그런 면에서 토마소 부부는 둔스 스코투스에 가깝다. 경찰의 자료 삭제로 아들이 횡령 후 잠적한 것으로 사건이 왜곡되는 상황에 토마소는 각고의 노력으로 진실을 파헤친 뒤 아드리노를 찾아가 “제발 시신이라도 수습하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원죄를 인정하고 신에게 아들을 돌려보내려 한다.

▲ 영화 <인비저블 위트니스> 스틸 이미지

‘고통 없는 구원은 없다’는 대사가 결정적이다. 주인공들은 철저한 일규주의자다. 라우라는 “청년은 안전벨트를 안 맸고, 운전 중 휴대전화를 사용했으니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라며 “청년은 어차피 죽은 사람이지만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며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합리화의 오류.

라우라의 말인지도 의심스럽다. 아드리노는 ‘만약 늦잠을 안 잤다면 사슴과 맞닥뜨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사고도 안 났을 것’이라며 라우라에게 책임을 전가하려 한다. 그는 원죄를 인정하지 않는 인간의 이중성이고, 돈으로 호강하는 게 최고라 여기는 자본주의 가치관의 추악한 민낯이다.

라우라는 웬일인지 2세 계획이 없다. 부부관계도 멀쩡해 보이는데 바람을 피운다. 아드리노는 아내와 딸을 사랑하고 사업의 성공에 집착한다. 그 탄착점은 성취욕일까, 가족의 행복일까, 지배욕일까? 토마소 부부는 “아이가 생기면 인생이 충만해진다”고 한다. 존재적 관성이 아니라 삶의 순리다.

일관적 소재는 에드워드 드 보노의 수평적 사고 이론(창의력, 응용력, 임기응변)과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다. ‘똑똑하다 착각하지 마’, ‘성공은 모두 허상’이란 대사다. 토마소는 늑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겁먹은 늑대는 몸집을 부풀리기 마련이니. 풍광과 주인공들의 외모가 플롯 못지않게 화려하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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