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100일 동안 100가지로 100퍼센트 행복찾기>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100 Dinge’(플로리안 데이비드 핏츠 감독)란 간단한 원제를 굳이 장황한 한국어 제목으로 바꾼 이유는 뭐든 짧게 축약하는 현대인의 언어 습관에 대한 도전이다. 이 독일 힐링 코미디는 할리우드식 구문론에선 벗어나지만 독특한 상업성을 갖춰 의외로 재미있는 우정과 멜로의 비빔밥을 선사한다.

앱 개발자 폴(핏츠)과 사업가 토니(마치아스 슈와바이어퍼)는 현재 IT기업을 공동 경영하고 있다. 고아와 다름없는 토니는 어릴 때부터 가족애가 남다른 폴의 부모와 한 가족처럼 자랐고 지금도 폴과 아래, 위층에 산다. 폴은 습관적으로 쇼핑에 집착하고, 토니는 외모를 가꾸는 데 모든 정성을 쏟는다.

폴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창의적인 능력을 지닌 앱 나나를 개발해 미국 IT업계의 거물 주커먼의 회사에 제안한다. 주커먼의 대리인은 폴의 프레젠테이션엔 시큰둥하더니 토니가 일방적으로 그 앱과 연관해 폴의 소비 성향을 조사한 결과를 발표하자 400만 유로에 계약을 체결할 것을 제안한다.

그날 밤 회사의 임직원은 파티를 열지만 폴은 자신의 사생활을 염탐한 토니가 괘씸하고 서운해 분을 삭이지 못한다. 토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들떠있고 결국 폴의 분노가 폭발한다. 둘은 다툼 끝에 회사 지분을 걸고 알몸으로 시작해 100일간 하루에 하나씩 아이템을 습득해 살아가는 내기를 시작한다.

▲ 영화 <100일 동안 100가지로 100퍼센트 행복찾기> 스틸 이미지

아파트의 모든 살림살이가 창고로 옮겨지고, 둘은 매일 자정 창고로 가서 오늘 어떤 아이템을 가져갈까 고민한다. 질 경우 주커먼 회사로부터 받게 될 각자의 몫 중 절반을 사원들에게 나눠줘야 한다. ‘절친’인 줄 알았던 두 사람의 사이는 오월동주가 돼 하루하루가 치열하고 비열한 전쟁으로 점철된다.

그들은 창고에서 묘한 분위기의 여인 루시(미리엄 스테인)를 만난다. 그녀는 엄청난 물량의 명품들이 넘쳐나는 창고에서 매일 밤 그것들을 걸치고 야릇한 나르시시즘에 빠진다. 둘은 모두 그녀에게 관심을 갖지만 항상 그랬듯 경주의 승리자는 토니였다. 폴의 엄마는 루비콘을 건넌 둘을 걱정하는데.

이렇게 대놓고 기계주의와 자연주의의 대립에 대한 논제를 던진 코미디는 근래 보기 드물다. 폴과 토니의 갈등은 2400여 년 전 데모크리토스(원자론)와 아낙사고라스(누스-정신)의 쟁투다. 제도권의 플라톤을 호모 플라토니쿠스라 비웃은 디오게네스의 도발이다. 칸트가 부활해서 중재해야 할 판이다.

중국으로 반환되는 1997년을 앞두고 홍콩 영화에 염세주의가 팽배했다면 1989년 통일된 후 현재의 독일 젊은이들이 안고 있는 허무주의의 고뇌가 엿보인다. ‘증조부는 신과 사후세계를 믿었고, 조부는 풍족한 미래를 믿었으며, 부모는 통일을 경험함으로써 꿈꿔온 미래를 실현했다’는 내레이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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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들은 지금은 자기애 표현법이 다르다며 그건 자유를 찾고 물건의 가치를 아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아디다스 카니예 웨스트 한정판을 재빨리 구매하고 오스카 드 라 렌타로 최신 유행 감각을 자랑한다. 그런데 노동의 값어치를 상징하는 땀 냄새를 굳이 데오드란트로 감춰야만 옳은 걸까?

짐작하겠지만 맥시멀리즘과 미니멀리즘에 대한 가치관을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이란 인식론으로 풀어간다. “돈을 못 내 인터넷을 못 하고, 인터넷을 못 하니 돈을 못 낸다”라는 식. 폴은 하루가 왜 이리 기냐고 푸념을 한다. 고작 오전 8시 45분에. 라즈니쉬는 몰라도 명상은 할 수 있지 않을까?

폴, 토니, 루시는 모두 자본주의에 경도된 표피적 개념의 유물론자들이다. 폴은 관성적으로 쇼핑을 하며 그게 행복이라 착각했다. 토니는 콤플렉스가 많기 때문에 겉치레에 매달렸고, 루시는 명품이 품격을 만든다고 착각했다. 모두 유물론에 지배당하는 줄 모르고 소비를 절대적인 신으로 숭배한 것.

그 어떤 이보다 가장 친한 친구인 줄 알았던 폴과 토니는 왜 원수가 돼 싸울까? 둘은 서로의 핸디캡을 모른다. 죽마고우의 자존심 대결의 코미디로 흐르던 드라마는 루시의 등장으로 갑자기 멜로로 전환된다. 토니는 패션 센스로 여자를 유혹하되 사랑은 안 한다. 컬렉션으로 트라우마를 이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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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순간 비로소 사랑을 느낀다. 폴은 슈트 대신 차를 선택함으로써 진짜 값어치를 깨우친다. 폴을 일깨운 건 할머니의 오래된 목각인형이다. 어머니가 할머니의 물건 중 필요한 건 가지라고 하자 그는 “우린 할머니를 모르고, 이 물건들은 할머니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거절한다.

이 얼마나 훌륭한 의미론을 상대화한 관념론인가! 할머니는 목각인형을 바가지를 쓰고 구매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목각인형도, 그 가격도 아니라 목각인형의 현상학적 추억이다. 할머니는 아낙시메네스주의자처럼 행복은 물 같은 것이라고 한다. 형태주의라기보다는 관념론적 인식론의 행복이다.

엄마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정부는 물 대포를 쐈다. 그래야 우리가 소비를 할 테니”라며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는 지금은 우익을 지지해”라면서 마르크스를 그리워한다. 결국 폴과 토니는 땅을 사서 코뮌식 스반홀름을 만들겠다며 지분을 사원들에게 배분하는 공산주의를 선택한다.

진주 목걸이를 걸친 배부른 돼지가 될 것인가, 거리의 자유로운 디오게네스가 될 것인가? 만약 한 달 시한부 인생이라면 양식을 선택할 것인가, 읽고 또 읽어도 다시 읽고 싶은 책 한 권을 집을 것인가? 에피쿠로스와 루소의 교집합이자 기계론과 관념론이 화해하는 훌륭한 코미디다. 9월 12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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