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언더 더 실버레이크>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만약 데이빗 린치가 ‘다빈치 코드’ 같은 미스터리 스릴러를 만든다면 ‘언더 더 실버레이크’(데이빗 로버트 미첼 감독) 같은 작품이 되지 않을까? 그만큼 이 영화는 내내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명쾌한 대답은 내놓지 않고 몽롱한 신비주의와 모호한 구조주의를 매개로 부유하는 현대문화를 조소한다.

청년 실업자 샘(앤드류 가필드)은 LA 빈촌에 사는데 집세가 밀려 퇴거를 통보받는다. 그는 배우를 꿈꾸며 오디션을 보는 여자와 사귄다. 이웃엔 앵무새를 키우는 노출광 여인이 살고, 아래층 수영장이 있는 너른 집은 미모의 사라(라일리 코프)가 세 들어 있다. 샘은 망원경으로 그녀들을 훔쳐본다.

어느 날 사라의 몰티즈 코카콜라에게 간식을 주던 샘을 사라가 발견하더니 음료 한잔하자며 집으로 끌어들인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 그녀의 친구들이 들이닥치고, 아쉬운 샘은 내일의 데이트를 보장받고 발걸음을 옮긴다. 다음날 사라의 집을 찾은 샘은 그녀가 밤새 이사한 사실을 알고 놀란다.

동네엔 이유 없이 계속해서 애완견을 죽이는 살인마가 출몰해 민심이 흉흉한 상황. TV에 갑부 제퍼슨 세븐스가 실종됐다는 뉴스가 나온다. 샘은 몰래 사라의 집에 들어가 박스 하나를 발견하지만 인기척이 들리자 도로 나온다. 밖에서 보니 한 여자가 들어와 그 박스를 가져가고 샘은 그녀를 쫓는다.

▲ 영화 <언더 더 실버레이크> 스틸 이미지

그렇게 ‘수사’가 시작되고 다양한 경험을 한다. 인기 밴드 예수와드라큘라의신부들이 공연하는 파티장에 가서 ‘예수’와 ‘신부들’과 알게 되고 잡지에 ‘언더 더 실버레이크’라는 음모론을 제기한 유명 작가를 만나 흥미로운 사실을 듣게 된다. 그는 모든 광고, 음악 등 대중매체가 메시지라고 주장한다.

샘은 예수 밴드의 히트곡 속에 메시지가 있다는 그의 충고에 백워드매스킹 등을 통해 그 속에 담긴 ‘제임스 딘의 머리를 문지르고 아이작 뉴턴 아래서 기다린다’는 메시지를 찾아내고 행동에 옮긴다. 그러자 노숙자 왕이라는 정체불명의 사내가 나타나 그의 눈을 가린 뒤 은밀한 곳으로 인도하는데.

139분이라는 짧지 않은 러닝타임과 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플롯, 그리고 쉽게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다양한 등장인물들 때문에 호불호가 엇갈릴 것이다. 적지 않은 매체가 지평이 없다고 혹평을 하는데 그건 상업영화적 구문론으로 봤기 때문일 듯. 의미론으로 봐야 하는 예술영화도 있기 마련이다.

이 영화는 소쉬르의 구조주의를 확장한 롤랑 바르트의 신화론과 기호론이다. 작가는 샘에게 모든 미디어, 심지어 컴퓨터 게임과 과자상자의 그림까지도 어떤 표상을 담고 있다고 웅변한다. 그는 미디어의 목적은 힘 있는 자들의 교신에 있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는 결국 부자들만의 리그라는 얘기다.

▲ 영화 <언더 더 실버레이크> 스틸 이미지

어떤 시대건 정태적 신화가 사회적 의식과 고정관념을 지배한다는 바르트를 LA에 적용해 스타 지망생의 현실과 한계를 처참하게 그려낸다. 그들은 미디어에서 랑그(규칙)만 볼 뿐 파롤(작전)을 못 읽는다. ‘함축 의미의 기표와 기의 사이의 관계는 계급 간 이해와 가치에 의해 구조화되는 것’인데.

할리우드가 있는 LA엔 세븐스 같은 갑부도 있지만 샘 같은 ‘루저’도 넘친다. 샘은 ‘이젠 또렷이 보여’라는 카피가 적힌 빌보드를 수시로 응시하며 상념에 잠기다가 광고의 주인공을 만난다. 스타로 성공한 그녀는 샘의 전 연인. 할리우드의 정상에 올라야 세상이 보이지만 ‘루저’에겐 하늘의 별 따기.

결국 샘도 과거에 스타 지망생이었던 것. 그를 스쳐 지나가는 여자들은 전부 한 번 이상 영화에 출연했거나 계속 오디션에 응시하는 연예인 지망생이다. 그녀들은 낮에는 연예계의 각종 행사와 파티에 참석하지만 생계가 어려워 밤에는 매춘에 나선다. 샘이 피우는 담배 몰리는 카렌 몰리를 뜻한다.

1930~40년대 할리우드를 풍미했던 몰리는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히면서 급전직하한 비운의 스타다. 사라의 개가 코카콜라인 것도 자본주의를 비웃는 설정. 사라는 수영장까지 딸린 집에 살지만 결국 매춘부다. 할리우드라는 엘리시움에 입성하고자 몸을 내던지지만 자본주의는 개에 불과할 뿐인데.

▲ 영화 <언더 더 실버레이크> 스틸 이미지

예수와드라큘라의신부들이란 밴드 이름은 불경스럽다. 알고 보니 예수는 히트곡 중 대다수를 작곡하지 않았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신비주의 밀교 집단과 레이블에서 철저하게 숨긴 실력파 작곡가는 대립쌍이지만 일의적이다. 밀교파는 자본으로 승천을 꿈꾸고 작곡가는 노래로 그 꿈을 만족시킨다.

인트로의 트레몰로 기타가 나른한 어소시에이션의 ‘Never my love’는 밀교와의 수미상관이다. 소년들이 샘의 차에 그린 음경과 Intelligentsia(지식계급)라는 미장센, 수영장에서 파티를 하는 부자들에 대한 샘의 친구의 “해변이 지척인데 웬 수영장?”이라는 질문 등은 할리우드의 양면을 비웃는 것.

엄마가 샘에게 프랭크 보제이즈 감독의 무성영화 ‘제7의 천국’을 적극 권유하는 것 역시 사람들의 감성을 뒤흔들어 이성을 흐리게 만드는 할리우드와 더불어 미디어 전체에 대한 풍자다. 부자가 유명 인사들의 데드 마스크를 보관하고 있는 것도 할리우드나 유명 인사들이 가면을 쓴 채 산다는 은유다.

샘에게서 나는 스컹크 냄새는 ‘기생충’과 유사하다. 그런 자본주의와 미디어에 대한 비판은 뒤에서 ‘호루스의 눈’ 문양과 ‘올빼미의 키스’라는 킬러를 통해 종교적 신비주의로 전회한다. 올빼미는 지혜와 죽음이라는 양면의 상징이다. 그렇다면 밀교의 승천 신앙은 당위성을 지니게 된다. 9월 19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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