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제공=KBS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오는 6일 방송되는 KBS1 ‘거리의 만찬’-‘하얀 거탑’은 이승우 단국대병원 전공의, 최원영 서울대병원 중환자실 간호사, 캐나다에서 온 차현주 간호사로부터 병원 근무자들의 업무 실태를 듣는다. 일주일에 100시간이 넘도록 일해온 길병원 소아과 신형록(31) 전공의가 지난 2월 과로사로 숨졌다.

지난해 서울 아산병원 박선욱 간호사와 서울의료원 서지윤 간호사가 병원 관계자들은 조문을 오지 말라는 유서를 남긴 채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들로 인해 ‘수련 과정’이란 명목 아래 관행적으로 지속돼온 살인적인 노동 강도가 수면 위로 드러난 건 지나치게 늦은 감이 있다.

사람을 살리려 의료계에 입문한 그들은 그러나 그 업무로 인해 죽어가고 있다. 간호사들의 극단적 선택의 이유는 ‘영혼이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뜻의 은어 ‘태움’이다. 생리대를 교체할 시간도 없기에 바지에 생리혈을 묻힌 채 일해야 하는 이 비참한 현실은 과연 21세기에 있을 법한 일인지 방송은 논제를 던진다.

그래서 전공의 33%가 36시간 이상 연속 근무를 한 경험이 있다는 대한전공의협의회가 전국 82개 병원 전공의들을 조사한 자료를 인용했다. 간호사의 현실 역시 더하면 더했지 나을 게 없다. 고강도 업무로 밥 먹을 시간은 물론 수면 시간조차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니 개인 시간은 머나먼 얘기다.

▲ 사진 제공=KBS

의사가 수술 중 과로로 쓰러지는 일도 비일비재한 열악한 근무 현실은 의료인들뿐만 아니라 환자와 보호자들의 2차, 3차 피해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식사를 제때 못 챙길 만큼 과로에 시달리는 그들의 컨디션이 좋을 리 없으니 최상의 의료 서비스를 펼치기 힘든 건 명약관화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전문직 곳곳엔 도제 시스템이란 게 오래전부터 전승돼왔다. 교육 시스템을 통해 전문 교육을 받더라도 실습과 사태는 상황이 다르다는 이유다. 그런 측면에선 경험론이 강력한 지위를 갖는다. 때문에 스승과 선배는 신입에게 절대적인 우위에 선다. 후배는 무조건 복종으로 일을 빠르고 정확하게 배워야 한다.

영화계의 도제 시스템과 언론계의 선후배 관행이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시대는 변하기 마련이고, 그 변화에 따라 체계와 패러다임도 바뀌는 게 보편적이다. 타 직종에 비해 개인주의가 팽배하지만 업무 효율은 오히려 높은 IT업계를 보면 이해가 쉽다. 개성과 실력이 일규주의와 계급과 서열을 무너뜨린 지 이미 오래다.

소쉬르는 공시태와 통시태 이론을 통해 언어의 공시적, 정태적 중요성을 설파했다. 그 뒤를 잇는 바르트는 기호학으로 언어는 물론 이 사회의 구조론을 더 깊게 파고들었다. 그는 신화를 특정 시기의 지배 집단의 산물로 보고 그게 그들의 지배 논리를 합리화한다는 신화론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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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업계에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도제 시스템을 본다면 소쉬르와 바르트는 맞았다. 병원 경영진은 자본주의의 논거로 의료인들의 고혈을 쥐어짜고, 선배들은 서열과 교육의 논리로 후배들을 혹사시킨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서열이 낮을수록 노동 강도는 더욱 심해진다.

이런 악순환은 “넌 아직 잘 모르고, 업무에 숙련되지 않아서”라는 논리로 그럴듯하게 포장돼 “더욱더”라는 강도를 부여한다. 특정 직업의 우열은 없어야 하겠지만 사람의 건강과 생명을 다루는 병원이 각별한 건 사실이다. 그러므로 의료인이 아닌 관리자 및 정부 관계자들의 노동 강도를 높여야 한다.

의료인이 건강해야 환자가 건강해지고, 환자가 줄지는 않아도 최소한 늘지는 않는다. 관리자 및 정부 관계자가 다치면 1차로 끝나지만 의료인들이 쓰러지면 환자와 그 보호자들에게 그대로 피해가 이어진다. 공무원은 산술급수적이고, 의료인은 기하급수적이다.

동아일보 기자로 시작해 KBS 사장을 역임하는 등 평생을 저널리스트로 살아온 정연주 씨는 최근 한 매체에 몸으로 경험한 50년의 한국 언론 실태를 고발하는 글을 기고했다. 내부 고발자가 늘지 않는 한 자본주의의 추악한 이면이 조성한 부패한 권력과 자본가의 극단적 이기주의는 철옹성이다.

이 논객처럼 의료계의 선배들이 자성의 목소리로 정밀한 진단서를 작성함으로써 후배들을 살려야 하고, 의료인이 되려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줘야 한다. ‘거리의 만찬’은 의료인들이 감격적으로 받을 ‘만찬’의 첫 접시를 차림으로써 공무원을 움직이려면 언론이 앞장서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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