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와 6.25전쟁으로 임정자료 분실 [김문 작가]

김문 작가l승인2019.09.14l수정2019.09.14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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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이승만]

▲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회

일제와 6.25전쟁으로 임정자료 분실

-그렇다면 이 대통령께서 남긴 자료들은 어떤 것입니까.

“우선 1919년 4월부터 1920년말까지, 그러니까 임정 초기에는 다른 기간에 비해 많은 영문자료들을 남겼습니다. 첫째는 임정 수반으로서 미국을 위시해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중국 등 조선왕국의 체약국(締約國) 원수들, 그리고 일본 천황에게 보낸 외교문서 및 상하이 임정의 임시의정원들에게 보낸 공문서 등입니다. 둘째는 서재필, 김규식, 정한경 등 미국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구미위원부를 이끌어갔던 인사들과 주고 받은 서한들입니다. 이밖에 ‘미국을 향한 호소’(1919년 4월 14일), ‘3.1운동때 일제의 만행에 대한 미국의 거중조정 요청’(1919년 6월10일), ‘1919년 4월 23일에 완벽한 자율정부가 수립된 사실 통고 및 신정부의 각료 소개’(1919년 6월 14일), ‘독립운동 지속선언서’(1919년 8월 27일) 등입니다.”

이 가운데 미국을 향한 호소문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다음은 유영익 전 연세대 국제대학원 석좌교수가 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반 이승만의 초기 행적과 사상’에 게재된 내용에서 부분 발췌했다.

일본의 군국주의적 정책 밑에서 차마 형언할 수 없는 고난과 야만적인 불법대우를 당하고 있는 1천8백만 한국 민족의 대표로서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필라델피아에 소집된 대한인회의에서는 이제 관후(寬厚)하고 위대한 미국에게 아래와 같이 호소합니다.

우리나라는 4천년간 완전한 자치를 누려왔습니다. 우리에게 당당한 역사와 국어와 문화가 있습니다. 또 우리는 일찍이 세계열강과 조약을 맺었고 열강은 우리의 완전한 독립을 승인하였는데 그 중에는 일본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1904년에 러일전쟁을 개시할 때 일본은 한국과 동맹조약을 체결하면서 한국의 영토적 안전과 정치적 독립을 담보하고 서로 힘을 합쳐 러시아를 대적하기로 했습니다. 따라서 한국은 일본군에게 길을 빌려주며 여러 방면으로 많이 협조하였습니다. 전쟁이 종결되자 일본은 한국과 체결한 조약을 유명무실한 휴지장을 돌리고 한국을 합병하여 마치 정복한 영토처럼 다루었으며 급기야 한국을 병탄하여 무단적 전제정치로 통치하였습니다. 일본이 자행한 이러한 악정의 원형은 벨지움 및 프랑스 북방에서 독일이 행한 악정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인들은 지난 10여 년간 일본의 압박 밑에서 인내력을 가지고 곤란을 겪다가 지금은 그 곤란이 극도에 이른 까닭에 금년 3월 1일에 예수교도, 천도교, 유교도, 불교도 및 각 선교학교 학생 등을 포함한 3백만명이 한인 교회 목회자들의 주도하에 대한독립을 선포하고 만주 접경에 임시 신정부를 조직하였습니다. 사사로이 접수한 전보와 통신에 의하면 3만2천여 명의 독립시위운동자들이 일본에게 체포되어 투옥됐고 또 10만명의 남녀노소가 죽거나 부상을 당했습니다.(중략) 따라서 우리는 인도주의, 자유 및 민주주의 이름으로, 조미조약의 이름으로, 그리고 세계 평화의 이름으로 미합중국 정부가 거중조정의 호의를 베풀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원컨대 호의를 발하여 자유를 갈망하는 우리 동족의 생명을 건지며 또 미국 선교사들과 그 자녀들의 생명 및 재산이 위태로운 것을 보호하십시오. 미국 선교사들은 우리 민족을 사랑하며 그리스도에게 신실하였기 때문에 저와 같은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미국 국민이 도의적 내지 물질적 원조를 우리에게 배풀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하면 한국에 있는 우리 동포들은 귀 국민의 동정이 저들과 함께 있다는 것과 귀 국민은 참으로 자유와 국제정의의 선봉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 사진=국방TV 화면캡처

유 교수는 이 호소문의 의미에 대해 “이승만이 3.1운동 후 한국 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 부상하는 과정에서 처음 작성한 글로서 그의 친미 외교독립노선을 잘 요약하며 추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내지 대통령으로서의 작성 다른 외교문서들의 원형을 이룬다는 점에서 역사가들의 주목을 요한다.”고 말하고 있다. 유 교수는 또 “이승만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명의로 작성, 발송한 외교문서 가운데 연구자들의 특별한 관심을 끌만한 것은 1919년 6월18일에 작성된 일본 천황에게 보내는 통고문이다. 이 공문은 한국독립운동사를 다루는 학자들과 이승만 전기 저술가들에 의해 간간이 논급되었지만 그 내용이 어떠한 것인지는 알려진 바 없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천황폐하
본인은 우리들이 일본 국민과 한국 국민간에 영구한 평화와 선의 및 협력관계를 수립할 진정한 의도가 있음을 폐하와 일본 국민에게 확언하고자 합니다.

본인은 한국 국민이 본인에게 부과한 의무에 따라 한국이 1919년 4월 23일을 기해 완전하게 조직된 자율국가가 되었음을 아무런 노여움, 증오심 혹은 공격적 의도없이 공식적으로 폐하에게 통고하는 바입니다. 대한민국 건국과정에서 모든 형식적 절차가 엄격히 준수되었습니다. 1919년 3월 1일에 한국민의 동의와 의지에 따라 마련된 대의원 선출 요구와 독립 선언서가 한국의 300여개 장소에서 동시에 봉독되고 반포되었습니다.

이 선언서와 요구에 따라 대의원들이 13개도에서 국민들에 의해 선출됐습니다. 대의원들은 1919년 4월 23일에 서울에서 회동하여 그곳에서 그 날 한국을 통치할 대의 입법기구로서 대한민국 의정원을 창설했습니다. 대한민국 의정원은 그 날 회의에서 영광스럽게도 본인을 대통령으로 선출했으며 다른 행정 각료들도 선출했습니다. 기왕에 한국과 거중조정을 약속한 조약을 맺은 열강들에게는 위 사실이 정식으로 통보됐습니다. 의문의 여지없이 폐하도 다른 정보망을 통해 이미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한국은 이제 스스로 원하는 대로 자치(自治)하는 입장에 놓였습니다. 한국 국민은 정상적이고 질서정연한 절차에 따라 주권이 인민에게 부여된, 인민에 의한 대의제 정부 형태를 선택했습니다. 본인은 대한민국의 명의와 권위에 입각하여 일본이 한국에 모든 무장된 군대와 모든 일본인 관리 및 민간인 등을 철수시킬 것을 요구합니다. 이는 본인에게 부과된 의무이며 한국인의 바람입니다. 우리는 폐하가 대한민국을 분명히 독립된 주권국가로 정식으로 인정하고 아울러 이 취지에 위배되는 모든 조약 조항들은 무효임을 인정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제 한일 양국은 지난 날의 이견과 분쟁들을 조절 내지 제거하고 영구한 평화와 선의가 지배하는 새로운 시대로 함께 진입합시다.

이 통고문은 이승만의 비서 임병직을 통해 워싱턴 주재 일본대사관에 접수시키려 했으나 일본 대사관 정문에서 1등서기관 히로다 코오이찌에 의해 거부당했다고 유 교수는 설명했다. 또 “통고문이 거부되자 이승만은 미 국무성을 상대로 일본의 부당하고 악랄한 신민지의 종식을 위해 거중조정을 요구하기로 결심하고 폴크 국무장관 서리 앞으로 공문을 보내게 됐다.”고 했다.

임시정부의 군사활동

▲ 사진=국방TV 화면캡처

-초창기 임시정부의 군사활동은 어떻게 진행됐나요.

“임시정부가 출범하면서 만주 지역의 독립군과 단체들도 착착 귀속됐습니다. 3.1운동 이후 군정부를 내세우던 세력들이 임시정부와 협의를 거치면서 그 지휘 아래 조직으로 편제됐습니다. 한족회와 서로군정서, 대한민국회와 대한군정서가 대표적입니다. 안창호가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할 수 있었던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초창기 임시정부의 군사활동은 주로 시베리아와 만주 일대의 독립군 단체에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 짓는 국제회의에 대응책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수립되고 또 그 회의에 대한 활동에 비중을 두고 있었던 임시정부로서는 당장 독립전쟁을 수행할 만한 처지가 못됐습니다. 그래서 무장독립군을 많이 거느린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에게 그 역할을 맡겼지요.”

-임시정부 자체에서 독립군을 조직할 계획은 없었나요.

“1920년에 들어서 스스로 독립군을 조직하거나 군사력을 기르는 방안이 추진됐습니다. 직할부대를 편성하거나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약하던 군사조직을 임시정부 아래로 편입하는 정책을 세웠습니다. 무관학교 설립이나 비행대 편성 시도 등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지요. 당시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는 독립전쟁을 펼치던 대표적 단체였습니다. 또 대한청년단연합회와 대한광복군총영은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육군주만참의부는 임시정부의 직할 단체로 활동했습니다.”

-당시 독립군 단체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나요.

“1920년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만주에 파견된 최동오의 보고에 따르면 독립군단체는 모두 22개이며 무장군인이 2,000명이 넘는다고 했습니다. 이 가운데 대한광복군총영은 임시정부의 직속기관으로 독립전쟁을 펼치는 유일한 단체였습니다. 대한광복군총영은 1920년 5월 7일 상하이에서 안창호, 김희선, 이탁 등이 논의하기 시작하여 6월 남만주에서 대한독립단과 대한청년단엽합회의용대가 합쳐 결성됐습니다.”

-외국에는 없었나요.

“있었지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비행사 양성소를 설치하여 비행대 편성을 시도했습니다. 비행기를 이용해 국내에 선전 전단을 뿌린다는 목표를 두었습니다. 이를 실천에 옮긴 인물은 군무총장 노백린과 캘리포니아주 북쪽 글렌카운티의 윌로스에 있던 ‘쌀의 왕’ 김종림이었습니다. 이들은 1920년 2월 윌로스 농장 부지에 한인 비행사 양성소를 설치했습니다. 그러나 재정적인 어려움에 부딪혀 동포들의 지원이 줄어들자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미국에는 이 정도였지만 중국 관내 지역의 독립운동은 임시정부에 절대적인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난징, 광저우, 텐진 등에도 독립운동 조직들이 만들어졌고 이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망을 가지고 움직였습니다. 러시아 지역의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계도 밀접하게 전개됐습니다. 이동휘가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부임하면서 통합됐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곧 연해주로 돌아가면서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 사이에 연결이 느슨해지고 말았습니다.”

-나라 밖의 독립운동 조직들과 느슨해진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 사진=국방TV 화면캡처

“임시정부 수립 초기에는 독립운동 조직들과 활발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다가 1920년을 넘어서면서 독립운동계를 이끌어가는 데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는 안팎의 문제가 얽혀 있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임시정부 스스로 난관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었고 외부적으로는 임시정부의 생명줄을 차단하는 일제의 정책이었습니다. 국내의 지원 연결망을 모조리 잘라버렸던 것이지요. 또 만주지역을 침공하면서 독립군 조직이 크게 위축됐지요.”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많은 없었겠지요.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1923년에는 국민대표회의를 통해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아울러 1926년에는 국무령제로 체제를 바꾸게 됩니다. 1927년 국무위원제를 채택했고 1930년에는 한국독립당을 조직한 것을 비롯해 한인애국단을 중심으로 의열투쟁을 벌여나가게 됩니다. 아울러 흩어졌던 독립군과 다시 연계를 하면서 활로를 찾게 됩니다. 임시정부 직할 아래 남만주 군정부를 인정하고 지휘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합니다. 이에 조직이름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로 바꾸었습니다.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국외 독립운동의 관계를 과시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신화에 가린 인물 이승만(2002, 로버트 올리버 지음, 건국대 출판부), 이승만과 그의 시대(2011, 이주영 지음, 기파랑), 우담 이승만 연구(2005, 정병준 지음, 역사비평사), 독립정신(2010, 이승만 지음, 동서문화사). 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2009, 유영익 외 지음, 연세대학교 출판부), 김자동 회고록(2018, 푸른역사), 이승만 다시보기(2011. 인보길 엮음, 기파랑), 독부 이승만 평전(2012. 김삼웅 지음, 책보세). 임시정부 시기의 대한민국(2015, 김희곤 지음, 지식산업사)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김문 작가  gamsam10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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