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 ‘문화지평’은 서울시 비영리공익단체지원사업으로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를 진행한다.

[미디어파인 칼럼=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 수도로서 서울의 역사는 2천년에 이른다. 그 시작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서울 송파구 일대에 도읍하면서부터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기원전 18년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하남위례성(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몽촌토성)에 도읍하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비류와 온조는 남행하여 마침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 지금의 북한산)에 올라 살 만한 곳을 살펴보았다. …… 열 명의 신하들이 간하여 말하기를 ‘오직 이강 남쪽의 땅이 북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동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기름진 벌판을 바라보고 있고 서로는 큰 바다에 막혀 있어서, 하늘이 내린 험준함과 지리적 이점이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함이 마땅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이때를 시작으로 백제의 역사는 660년까지 이어졌다. 백제의 역사는 한성백제시대(BC 18~475), 웅진백제시대(475~538), 사비백제시대(538~660)로 구분된다. 우리들에게 각인된 백제의 역사는 185년(475~660) 동안 도읍지였던 웅진과 사비시대다. 반면 678년의 백제 역사 중 493년 동안 이어진 한성백제시대는 기억되지 못한다.

백제의 전성기는 한성에 도읍했던 시대이다. 한성백제기인 고이왕대(234~286)에 이르러 백제는 고대국가로서 기틀을 세웠고, 근초고왕이 집권(346~375)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정복군주로 평가받는 근초고왕은 남으로는 마한을 정복하고, 북으로는 평양성을 공격(371)해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죽였다.

그러나 475년에 이르러 백제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고구려 장수왕이 3만 대군을 이끌고 한성을 침략했다. 장수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왕성을 장악하고 개로왕을 죽이는 한편, 8000여 명의 백제군을 사로잡았다. 이때의 패배로 백제는 웅진(공주)으로 천도하면서 한성백제시대를 마감했다.

하남위례성(백제한성) 위치는 오랜 논쟁거리

▲ 하늘에서 본 풍납토성의 현재 모습.

백제 첫도읍지인 하남위례성 위치는 오랜 논쟁거리였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온조왕이 위례성에 도읍했는데, 사천(蛇川)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직산(稷山)이다”라는 기록에 따라 충남 천안시 직산면이 지목되기도 했고, 다산 정약용은 그의 저서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경기도 하남시 춘궁리 일대를 하남위례성이라고 비정(比定)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1925년 을축년대홍수는 하남위례성의 위치를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 7월 기록적인 집중호우로 서울 이촌동을 비롯한 뚝섬, 잠실, 신천, 풍납동 일대가 물에 잠겼다. 이때 물난리로 400여 명이 사망하고, 가옥 1만2000 채가 유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기록적인 피해를 몰고 온 을축년대홍수는 뜻밖의 선물을 남겨놓았다. 서울 암사동의 선사유적지와 한성백제의 왕성이 있었던 풍납토성을 역사의 깊은 잠에서 깨워 놓은 것이다. 한강의 범람으로 암사동 선사유적지에서 빗살무늬토기 조각과 석기들이 햇빛을 보게 됐고, 풍납토성에서는 청동초두, 금귀걸이, 유리옥 등 백제 유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를 근거로 1937년 일본 학자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은 ‘풍납토성은 하남위례성’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반면 역사학자 이병도는 1939년 ‘진단학보’에 기고한 글을 통해 아유카이 후사노신의 주장을 반박한다. 풍납토성은 백제 초기에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한 사성(蛇城)이라며, 하남위례성은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 춘궁리 일대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병도는 원래 사성(蛇城)으로 ‘배암들이’라 불리던 것이 변화되어 ‘바람들이’ 즉 풍납(風納)토성이 되었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1925년 을축년대홍수 때 모습 드러낸 풍납토성

▲ 을축년 대홍수는 큰 피해를 줬지만 암사동 선사유적지와 풍납토성이란 역사의 선물을 남겨주기도 했다.

문화지평의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 6회차는 ‘수도시대의 서막, 한성백제’라는 주제로 7월20일 전상봉 역사문화해설사(서울시민연대 대표)의 해설을 들으며 진행됐다. 풍납토성은 1963년 1월 사적 11호로 지정됐다. 이듬해인 1964년 서울대 김원룡 교수는 고고학과 개설과 함께 풍납토성을 발굴 조사한다. 이때의 발굴조사로 풍납토성은 백제초기 유적으로 확증됐다. 그후 1970년대에는 몽촌토성 일대가 하남위례성일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제기되기도 했다.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왕성터로 인정받게 된 계기는 우연한 사건에서 비롯됐다. 1997년 1월 1일 선문대 학술조사단을 이끌고 풍납토성을 찾은 이형구 교수가 터파기 작업이 한창이던 아파트공사장에 잠입, 수많은 백제 토기 파편이 박혀 있는 현장을 목격했다.

이형구 교수는 이 같은 사실을 언론에 제보했고, 이를 계기로 국립문화재연구소와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이 즉각적인 현장검증과 긴급구제발굴에 들어갔다. 1500년 동안 땅 속에 묻혀 있던 한성백제의 실체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1997년 긴급구제발굴을 시작으로 풍납토성 일대에 대한 발굴은 여러 차례 진행됐다. 성벽 절개 발굴을 비롯, 왕성터로 추정되는 경당지구와 미래마을에 대한 발굴을 통해 수많은 유물들을 수습했다. 이를 토대로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왕성터였다는 것이 입증됐다.

풍납토성은 한성백제의 왕성으로 입증

▲ 1997년 긴급구제발굴 통해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왕성터였음을 입증했다. 사진은 1997년 현대연합주택 재건축 부지 발굴 모습.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온조왕이 하남위례성에 도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9대 왕인 책계왕대에 이르면 위례성과 같은 의미로 도성을 지칭하는 한성이 등장한다. 비류왕 24년(327)에는 북한성(北漢城)이라는 명칭이 쓰이고, 392년 아신왕 원년에 다시 한성이 등장한다. 그후 전지왕대와 한성백제의 마지막왕인 개로왕대에 이르기까지 한성이란 명칭이 지속적으로 사용된다.

이 같은 사료와 그동안 발굴된 유적과 유물을 토대로 학계에서는 백제의 첫 왕성인 위례성(慰禮城)은 한성(漢城)으로 발전한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한성은 두 개의 성으로 이루어진 이성(二城) 체계였을 것이라는 추정이 학계의 지배적인 견해이다. 즉, 평상시에 왕이 거주하는 풍납토성과 유사시를 대비한 왕성이 몽촌토성이라는 것이다.

평지에 자리 잡은 풍납토성은 평상시 왕이 생활하는 왕궁이었고, 외적이 침입할 경우 남성인 몽촌토성으로 이동해 전투를 치르는 성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런 연유로 2012년 4월 올림픽공원 안에 신축 개관한 박물관의 명칭은 한성백제박물관으로 명명됐다.

풍납토성의 주변 지세를 살펴보면 북서쪽으로 한강이 흐르고, 동쪽으로는 검단산에서 뻗어 내린 이성산과 남한산으로 이어진 구릉과 평야지대가 펼쳐진다. 서쪽으로는 봉은사가 위치한 수도산과 평야지대가 있으며, 남쪽은 몽촌토성이 위치한 남한산자락과 방이동, 가락동으로 이어진다. 이 지역 역시 평야지대다.

타원형에 가까운 사각형 모양으로 축성된 풍납토성은 연인원 138만 명이 동원됐다. 지금으로 치면 8톤 트럭 20만대(150만톤) 분량의 흙으로 최고 5층 아파트 높이로 쌓은 거대한 토성이다. 문화재청이 2014년 12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풍납토성의 동쪽 성벽의 경우 3세기 중후반에 착공하여 4세기 중반 이전에 처음 완공됐다. 이후 4세기 말과 5세기 중반 두 차례에 걸쳐 증축되면서 규모가 확대됐다고 한다.

현재의 풍납토성은 한강에 인접한 북서쪽 성벽은 대부분 사라지고, 동남쪽을 비롯한 3면만 남아 있다. 몽촌토성의 2배 크기인 풍납토성의 전체길이는 3500m이며, 현재 남아 있는 서벽 일부와 북벽, 동벽, 남벽의 길이는 2100m 정도다. 평지토성으로 쌓은 성의 하부 폭은 40m이며 높이는 9~15m로, 성벽을 포함한 넓이는 26만 평에 이른다.

경당빌라 있던 자리에 역사문화공원 세워

▲ 경당빌라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역사문화공원.

역사문화공원은 경당빌라가 있었던 자리여서 흔히 경당지구라 불린다. 역사문화공원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곳에서 많은 유물과 유적이 발굴됐기 때문이다. 위치로 보더라도 역사문화공원이 위치한 지역은 풍납토성의 중앙에서 약간 위쪽에 위치한 곳으로 왕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1999년 경당연립 재건축 공사를 시작하면서 이곳을 발굴한 결과 많은 유물과 유적이 발굴되었다. 그중 눈에 띄는 유적은 여(呂)자 모양의 건물터이다. 발굴된 정남향 건물 유적은 동서로 18m, 남북으로 16m에 이른다. 도랑에는 숯이 발굴되었고, 자기 파편들과 함께 말 머리뼈(말머리 뼈 9, 소머리뼈 1)가 발굴되어 이곳이 제례의 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와당과 전돌이 발굴되어 역사문화공원이 위치한 이곳이 왕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문화공원 남쪽에서는 우물터가 발견됐다. 정(井) 모양의 우물터에서는 주둥이가 깨진 호리병을 비롯한 많은 그릇이 발굴됐다. 우물터에서 수습된 주둥이가 날아간 다량의 호리병과 적지 않은 그릇이 묻히게 된 사연에 궁금증이 인다. 타임머신을 타고 1600년 이전의 역사 속으로 돌아가 보지 않은 이상, 이 궁금증을 완벽하게 풀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보인다.

이밖에도 역사문화공원에서는 대부(大夫)가 새겨진 토기들이 발굴되어 당시 백제의 관직 체제의 단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또한 이곳에서는 사악한 기운을 쫓기 위한 주술적 의미의 정(井)가 새겨진 토기가 발굴되기도 했다.

미래마을연립 자리엔 풍납백제문화공원

▲ 미래마을연립 자리엔 풍납백제문화공원을 조성했다.

역사문화공원 인근에는 풍납백제문화공원이 위치하고 있다. 흔히 미래마을이라 불리는 이곳은 애초 미래마을연립이 위치한 곳이다. 풍납백제문화공원에서는 크고 작은 건물지가 발굴됐다. 여러 채의 움집 유적이 발굴돼 당시 서민들의 주거양식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움집터에서는 불가마 유구와 풍로, 그리고 슬러지가 발굴돼 이곳이 왕궁에서 사용할 기와, 전돌, 칼 등을 제작하던 공방지로 추정된다.

움집 말고도 풍납백제문화공원에거 큰 규모의 건물지가 발굴됐다. 관청 터로 추정되는 가장 큰 규모의 건물은 정면 8칸, 측면 5칸에 이르며, 이보다 약간 작은 규모의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4칸이다. 이곳에서는 500상자에 이르는 기와가 발굴됐다. 이처럼 많은 양의 기와 파편은 건물 규모를 입증하는 동시에 건물이 화재 등의 이유로 일순간 파괴됐을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풍납백제문화공원에서 발굴된 유적과 유물 중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도로 유구이다. 도로 유구는 남북으로 이어진 폭 4m, 길이 41m의 길과 동서로 뻗은 폭 4m, 길이 22m이다. 남과 북, 그리고 동과 서로 교차하는 도로 유구는 이곳이 풍납토성이 백제왕성이 있었던 왕성 터라는 추정에 힘을 더하는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이번 답사는 전상봉 역사문화해설사가 이끌었다. 그는 서울시민연대 대표, 협동조합 발로품는서울 이사장으로 활동하면서 ‘역사와 인문학으로 보는 서울’, ‘한성백제 시민강좌’ 등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교양강좌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한성백제 전문가다.

▲ 풍납토성을 배경으로 찍은 답사 단체사진.

■ 코스

풍납근린공원(천호역 10번) - 풍납토성 북단 절개지 - 풍납시장 - 경당지구 - 풍납백제문화공원 - 풍납토성 동벽 <글=전상봉 서울시민연대 대표‧유성호 문화지평 대표, 사진=권택상 사진작가, 전수정 님>

[문화지평]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2016)
역사도시 서울답사(2017)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2019)
서울미래유산 시장 아카이빙(2019)
기업‧단체 인문역사답사 다수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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