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이승만]

▲ 사진=kbs 방송화면 캡처

대통령 탄핵의 과정

-이런 시기에 이 대통령 탄핵이 이루어지게 되지요.

“그렇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에 대한 탄핵작업이 진행되게 됩니다. 내가 대통령직에 물러나게 된 과정은 1924년 6월에서 1925년 3월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개조파 그룹에 의해서였지요. 이 그룹은 박은식 내각의 외무총장 겸 재무총장 이규홍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듯 ‘삼방연합’이라고 했습니다. 지역연합적 성격을 띤 정치세력인 셈이지요.”

-어떤 조직인지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신다면.

“개조, 창조, 정부 옹호파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평안남북도인, 황해도인으로 구성된 ‘국민대표파’, 함경북도인으로 구성된 ‘공산당파’, 경기 충청인으로 구성된 ‘임시정부파’로 불렀습니다. 이들이 대통령 유고에서부터 탄핵에 이르는 주요 과정을 주도했지요.”

-원래 개조파 그룹의 목표는 무엇이었습니까.

“개조파 그룹의 목표는 위원제를 중심으로 한 헌법개정이었습니다. 나는 반대파 입장이었지요. 헌법개정안이 통과되더라도 위원제에 반대할 나의 개입여지를 봉쇄하기 위해 대통령 유고안을 통과시켰던 것입니다. 이처럼 개조파 그룹이 자신들의 목표를 추진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임시 의정원을 장악하는데 있었습니다. 사실 의정원은 1924년에 들어오면서 판세가 달라집니다. 3월28일, 부의장이었던 조상섭이 윤기섭에 이어 의정원 의장에, 여운형이 부위원장에 당선이 됐습니다. 이어 5월8일에 여운형이 의장, 최창식이 부의장에 당선됐으며 이들은 회기를 1925년 2월까지 연장합니다.”

-대통령 유고안을 제출한 의원은 누구 누구인가요.

“제가 알기로는 조상섭, 김붕준, 최석순, 박진, 강경섭, 임득산, 박계천, 김문회 등 8명입니다. 이들은 ‘이승만은 속히 임소로 귀환해야 하며 귀환일까지 국무총리가 직권을 대행해야 한다’고 의정원에 제의하고 가결하게 됩니다. 나는 유고안에 대해 재의결을 요구했지만 1924년 8월 17일 자로 재의결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결국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1925년 3월 11일 임정부 의정원 의원인 곽헌, 최석순, 문일민, 강창제, 강경신, 나창헌, 김현구, 임득신, 채원개의 명의로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이 발의되고 임시대통령 심판위원장에 나창헌, 심판위원에 곽헌, 채원개, 김현구, 최석순이 선임됐다. 심판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임시의정원에서 ‘임시대통령 이승만 심판서’를 의결하고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면직한다’고 공표했다. 이렇게 해서 1919년 44세에 임시정부 대통령이 된 지 6년만에 면직됐다. 독립신문 3월 23일자에 게재된 면직 사유의 일부다.

이승만은 외교에 언탁(言托)하고 직무지를 떠나 원양 일우에 격재하면서 난관수습과 대업진행에 하등 성의를 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허무한 사실을 제조 간포하여 정부의 위신을 손상하고 민심을 분산시켰음은 물론 정부의 행정을 저해하고 국고 수입을 빙의하며 의정원의 신성을 모독하고 정부의 행정과 재정을 방해하고 임시헌법에 의하여 의정원의 선거에 취임한 임시 대통령으로서의 자기 지위에 불리한 의결이라 하여 의정원의 결의를 부인하고 한성조직 계통이라 운운함과 대한민국의 임시헌법을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행위이다.(중략)

작년에 의정원 회의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유고안이 통고된 후로 대통령의 행동은 더욱이 위법적 과실이 많은지라 이로 인해 의정원 내에서는 대통령에 대한 의론이 불일(不一)하던 바 마침내 대통령 탄핵안이 상정되어 면직안이 결의로 통과됐다.

두 번의 탄핵

다음은 김삼웅씨의 ‘독부 이승만 평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대한민국은 헌법전문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법통’이란 ‘법과 전통’을 의미할진대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은 불행하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더욱 부끄러운 것은 이로부터 35년 뒤인 1960년 4월 시민의 궐기로 정식 대통령직에서 다시 쫓겨난 사실이다. 임시정부에서 탄핵된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머물면서 활동하고 두 번 째 탄핵 후에도 역시 하와이에서 망명생활하게 됐다.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탄핵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승만의 범과(犯過) 사실’을 직시했다.

1. 임시대통령 이승만이 그 직임에 피선된 후 선서를 이행하지 않았으며 정부 행정을 집정하지 않았고 직원들과 불목하여 정책을 세워보지 못했다.

2. 임시대통령 이승만이 대미 외교사업을 목적으로 설립한 구미위원부를 가지고 국무원과 충돌했고 아무 때나 자의로 법령을 발포하여 질서를 혼란하게 하였으니 정부의 처사가 자기의 의사에 맞지 않으면 동조자들을 선동하여 정부에 반항했다.

3. 임시대통령 이승만은 그 직임이 국내 13도 대표가 임명한 것이라 하여 신성불가침의 태도를 가지고 임시의정원 결의를 무시하며 대통령 직임을 황제로 생각하여 국부라 하며 평생직업을 만들려는 행동으로써 민주주의 정신을 말살했다.

4. 임시대통령 이승만이 미주에 앉아서 구미위원부로 하여금 재미동포의 인두세와 정부 후원금과 공채표 발매금을 전부 수합하여 자의로 처리하고 정부에 재정보고를 하지 않아서 재정범위가 어느 정도까지 달했는지 알지 못하게 했다.

5. 임시대통령이 민중단체의 지도자들과 충돌하여 정부를 고립상태로 만들고 재미 한인사회의 인심을 선동하여 파장을 계속하므로 독립운동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다.

임시의정원은 탄핵의결서를 이승만에게 송부하면서 이의가 있으면 공소하라고 했으나 그는 끝내 함구했다. 그리고 워싱턴에서 1924년 10월 25일 하와이로 귀환하여 임시정부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이승만은 불신임과 탄핵을 당한 후 상하이 임시정부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안현정, 이종관, 민찬호 등과 자신을 중심으로 조직한 동지회를 강화시키는 한편 구미위원부 등의 조직을 완전히 개인 조직화 하고 독자행동으로 일관하면서 한인사회의 분열을 심화시켰다. 그러자 임시정부 의정원은 1925년 4월 10일 이승만이 주도하고 있는 구미위원부의 폐지령을 공포했다.

이승만은 하와이에 체제하면서 한인사회의 여러 단체를 자기 중심으로 개편하면서 여전히 아집과 독선을 일삼아 교포사회의 분열이 심화됐다.

이승만의 독재성은 윤치영이 초안을 작성했다는 동지회 규정이나 구미위원부 규약에 잘 나타나 있다.

“본회의 사명은 총재의 명령을 절대복종하며 상하이임정의 위신을 타락시키거나 불충불의한 국민이 있으면 본회가 일심하여 상당한 방법으로 조치한다.”(동지회 규정)

“집정관총재 이승만은 직권으로 구미위원부를 조직, 구미 각지에서 실행한 정부행정을 대행하고 미주에서 출납되는 정부재정을 관리하여 집정관총재의 승낙을 얻어서 이행한다. 또 구미위원부 위원의 임기와 출척은 집정관총재가 자의 처단한다.”(구미위원부 규약)

헌법개정을 앞두고 의견충돌

▲ 사진=kbs 방송화면 캡처

-이 대통령을 두고 독재자이니 민족의 영웅이니 하는 평가가 엇갈립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평가는 일관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각자 견해에 따라 다르지요. 상하이임시정부 시절에도 그렇습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일을 하려면 반대하려는 세력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제가 추진하려는 정책과 여러 일들이 정지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저는 임시정부 시절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습니다. 일제 35년간 대표적인 독립투사를 꼽으라면 이승만과 김구를 언급합니다. 하지만 김일성의 공작에 말려들어 대한민국 건국을 끝까지 반대했던 김구만 진정한 애국자로 포장돼 있습니다. 제가 독립운동을 했던 사실들은 매장된 셈이지요. 내가 24세되던 1899년부터 1904년 8월 7일까지 한성감옥에 있을 때 첫 번째 완전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다짐했고 두 번째는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저술하면서 정치이념과 국가철학을 완성했습니다. 그런 바탕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탄핵됐다고 생각했습니까.

“헌법개정을 앞두고 의견충돌이 있었지요. 앞서 얘기했지만 개조파 그룹의 목표는 위원제를 중심으로 한 헌법개정이었습니다. 저는 반대파 입장이었지요. 헌법개정안이 통과되더라도 위원제에 반대할 나의 개입여지를 봉쇄하기 위해 대통령 유고안을 통과시켰던 것입니다. 개조파 그룹이 자신들의 목표를 추진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임시 의정원을 장악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됐지요.”

-탄핵된 이후 사실상 임시정부와 단절이 된 셈입니다. 그렇다면 특별한 활동이 없었을텐데요. 관계회복의 노력은 없었나요.

미국측에 무기대여 요청

“1933년 임시의정원에서 국무위원 9명 중 한 명으로 선출됩니다. 김구와 개인적인 친밀관계로 스위스 제네바의 국제회의연맹 회의라는 공식적인 외교의 필요성 때문이었죠. 이에 앞서 1932년 11월10일 국제연맹에 탄원할 전권대사로 임명되고 제네바행이 끝난 후 1933년 12월30일 국무위원직에서 물러났습니다. 1934년초에는 임시정부의 주미외무행서 위원으로 선임하게 됩니다. 외무행서는 외교를 담당하는 외무부 산하기관으로 미주 책임자로 임명된 것이지요. 이후 1939년 미국 본토로 건너가 대한국민위원부라는 명칭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외교활동의 역할로 임시정부와 다시 관계를 맺었다는 뜻입니까.

“임시정부와 관계가 복원된 것은 1941년 4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나를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정에 추천한데서 시작됩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하와이와 미주 9개단체가 참가한 해외한족대회의 결과로 결성됐습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대미외교에 나섰지요. 임시정부의 신임장을 백악관과 국무부 등에 직접 임시정부 승인을 청원하고 한미협회, 기독교친한회 등 외곽단체를 조직해 국무부에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지요. 또한 국제회의에 참석해 독립호소와 임정승인을 요청하는 일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아울러 1942년부터 1945년까지 30여 차례에 걸쳐 국무부, 전쟁부, 백악관 등에 임시정부의 승인과 무기대여를 요청했습니다.”

-성과는 있었나요.

“미국 정보기관을 통해 한인 게릴라부대의 창설과 대일 무장투쟁의 전면화를 지속적으로 주장했습니다. 국무부를 상대로 한 임정 승인 외교시도는 성공적이지 못한 반면 정보기관을 상대로 한 시도는 적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연세대 출판부에서 펴낸 ‘이승만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책에 정병준 이화여대사학과교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이승만은 임정 외교부 산하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에 선임됨으로써 임시정부와의 공식적인 연계를 재개할 수 있었다. 나아가 김구 등 임정 핵심과의 긴밀한 연대를 맺음으로써 해방 후 스스로를 임정계 인물로 부각시킬 단초를 마련하였다. 엄밀하게 보면 이승만은 임정 외교부 산하의 부서장에 불과했지만 다른 임정 인사들보다 한달 빨리 귀국함으로써 국내 정계에서는 임정의 최고 지도자로 부각될 수 있었다. 급변하는 해방정국에서 한 달이라는 시간은 이승만에게 충분한 정치적 공간 확보를 가능케 했다. 이승만은 해외에서 최초로 귀국한 독립운동가였고 우파는 물론 좌파 역시 지지하고 있던 임시정부의 전직 대통령이었으며 같은 맥락에서 남한 주둔 미군정의 영접을 받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주미 외교위원부는 단순히 임정과의 관계를 회복시킨 차원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이승만이 해방직후 임정의 명의를 활용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 것이다.

인터뷰를 마친 이승만 전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청와대쪽을 바라보면서 “저 곳에서 여러 대통령이 거쳐갔지요. 참 어렵고 힘든 곳입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는 죽는다는 말이 생각납니다.”라고 중얼거린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이 전 대통령이 한 말중 유명한 어록으로 회자된다. 1945년 10월17일 환국 환영회때 한 말이고 한국전쟁때인 1950년 10월27일 평양 탈환때 한 말이다. 멀리 북악산을 건너 낙산이 있는 쪽을 바라본다. 까마귀 두 쌍이 까악 까악 울어댄다.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가 뒤를 돌아봤다. 이 전 대통령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신화에 가린 인물 이승만(2002, 로버트 올리버 지음, 건국대 출판부), 이승만과 그의 시대(2011, 이주영 지음, 기파랑), 우담 이승만 연구(2005, 정병준 지음, 역사비평사), 독립정신(2010, 이승만 지음, 동서문화사). 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2009, 유영익 외 지음, 연세대학교 출판부), 김자동 회고록(2018, 푸른역사), 이승만 다시보기(2011. 인보길 엮음, 기파랑), 독부 이승만 평전(2012. 김삼웅 지음, 책보세). 임시정부 시기의 대한민국(2015, 김희곤 지음, 지식산업사)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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