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지금이야 한류열풍으로 전 세계의 대중예술과 문화를 쥐락펴락하는 한국이지만 20세기만 하더라도 구경꾼이었다. ‘씨받이’로 강수연에게 베니스에서 여우주연상을 안긴 당시의 거장 임권택 감독은 ‘가장 한국적인 게 가장 세계적’이라며 2002년 ‘취화선’으로 칸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판소리 복서’(정혁기 감독)는 임 감독의 정신을 명확하게 꿰뚫은 아이디어가 돋보이고, 진정한 보수가 뭔가 명석하게 제시한다는 점에서 빛을 발한다. 재개발이 한창인 소도시 한구석의 불새 권투 체육관. UFC가 모든 격투기를 제압한 이 시대에 복싱이 젊은이들에게 먹힐 리 없어 파리만 날린다.

29살 병구(엄태구)가 여기서 먹고 자며 허드렛일을 하고, 49살 박 관장(김희원)은 대부분의 시간을 교회에서 보낸다. 10년 전 병구는 판소리를 하는 친구 지연과 호흡을 맞춰 판소리 복싱이라는 독특한 전법을 창안했고, 챔피언이 유력했지만 도핑 때문에 선수 자격을 박탈당해 나락에 떨어졌다.

현재 체육관의 유일한 선수는 병구의 친구 교환. 그러나 수년째 그에겐 경기가 없다. 알고 보니 병구 때문에 권투계에서 이 체육관의 이미지가 나빠져 경기 제안이 없었던 것. 이를 안 교환은 병구에게 분노한다. 어느 날 여대생 민지(이혜리)가 다이어트 목적으로 등록하자 병구의 활기가 살아난다.

병구는 다시 권투를 하겠다고 글러브를 끼고, 웬일인지 관장은 그를 무시한다. 민지는 착한 병구에게 점점 빠져들지만 병구는 가끔씩 뜬금없이 그녀를 지연이라 불러 마음 상하게 만든다. 병구가 약을 먹는 걸 본 관장은 그 약을 처방한 병원을 방문해 병구의 뇌 손상이 심각하다는 걸 알게 되는데.

참으로 신선하면서 역동적이고, 아담하지만 아기자기하며, 슬프면서도 흐뭇한 영화다. 큰 주제는 ‘진정한 보수와 진보’, ‘마음대로 살되 삼류가 되진 말자’ 두 가지다. 민지가 이상형을 묻자 병구는 ‘위아래 하얀색 한복이 잘 어울리는 여자’라고 답한다. 그 이유가 ‘내가 좀 보수적이어서’라고 말한다.

TV가 고장 나서 수리 기사를 부르자 기사는 부품 값이 더 드니 새로 사는 게 낫다고 좋은 뜻으로 충고하지만 병구는 고집스럽게 고쳐달라고 생떼를 쓴다. 그는 ‘고장 나면 고치면 되잖아. 왜 버려?’라고 뇌까린다. 시대가 변했다고 모든 게 바뀌는 것도 굳이 바꿀 필요도 없다. 사람의 쓸모가 그렇다.

이종격투기는 시대의 요구일 수도 그저 하나의 유행일 수도 있다. 대세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권투나 레슬링 등이 사라져야 할 이유는 없다. 시대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변화는 수용하되 오래 전승된 걸 애써 없앨 필요는 없다. 그게 진정한 보수지, 진보에 역행하는 게 보수가 아니라는 현명함!

병구는 고장 난 TV였다. 이제 종잇장처럼 얇고 구겨지기까지 하는 TV가 나왔다고 굳이 만화책을 버릴 필요는 없다. 책은 책대로 컴퓨터는 컴퓨터대로 쓸모가 따로 있는 것. K팝은 장르가 아니라 하나의 유행적 형식이다. R&B와 슈가팝에 유럽의 댄스뮤직과 랩을 접목한 첨단 디지털의 스타일이다.

그게 유행한다고 판소리를 없앨 일은 아니다. 우리의 고유의 문화고 민족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민지의 취미는 필름 카메라 촬영. 졸업 후 진로를 걱정하는 그녀는 ‘공무원 시험이나 칠까’라고 말한다. ‘이나 칠까’라는 말에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가득 차있다. 게다가 필름 카메라 촬영이 취미라니.

병구는 오랫동안 곱게 간직했던 니콘 FM2를 민지에게 선물하고, 그걸로 기념사진을 찍은 민지는 코닥 필름으로 인화를 한다. 사진관 아저씨는 인화비를 절반 할인해준다. 곧 가게 문을 닫기 때문이다. 골동품이 돼버린 FM2와 아무도 쓰지 않는 코닥. 재개발로 인간미가 사라진 그들이 사는 작은 도시.

병구, 민지, 관장은 삼류인생이다. 현재가 불안할 뿐만 아니라 내일은 아예 암울하다. 그래서 민지는 ‘한 번 사는 인생 내 마음대로 살자’고, 관장은 ‘삼류는 되지 말자’고 이를 악문다. 병구는 유일한 판소리 복서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그게 진짜 취권인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건 병구의 신념이다.

그게 참다운 보수다. 관장은 경제적 압박에도 불구하고 체육관을 지키려 애쓰지만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는 없다. 그는 항상 홀로 교회에 앉아있다. 자본주의는 신념마저도 흐리게 만든다는 설정. 체육관이 사라지면 뭘 하겠냐는 병구의 질문에 관장은 신학이라 답한다. 믿음의 중요성이다.

플라톤은 기독교에 영향을 줬고, 중세 스콜라주의자는 모두 철학자였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중국 철학은 중용이라는 맥락으로 결속을 맺고 있다. 관장은 기독교, 병구는 민족정신과 보수, 그리고 민지는 이타주의라는 각자 다른 종교를 지녔지만 결국 하나로 뭉치는데 그 매개체는 사랑, 중용, 배려다.

민지만 정상적인 듯하고, 병구가 바라보는 세상은 몽롱하다. 어떤 게 환상이고 어떤 게 현실인지 모호하다. 그래서 그는 시작과 끝에 ‘길고 이상한 꿈을 꾼 듯하다’고 말한다. 어쩌면 모든 인생이 ‘장자’의 호접지몽이 아닐까? 민지의 꿈은 ‘착한 사람과 손잡고 산책’이다. 이웃에게 손을 내밀자는 교훈.

내내 중모리로 느리게 흐르다 병구와 민지의 교감이 서로를 관통하고, 병구에게 드디어 경기의 기회가 주어지는 중중모리를 넘어서면, 자진모리로 빨라지더니 휘모리로 절정에 이른다. 마구 웃기더니 후반에 슬픔과 충격을 준다. 잘하는 엄태구보다 성장하는 이혜리의 연기력이 더 돋보인다. 9일 개봉.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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