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폴란드의 스타니슬라브 렘의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솔라리스’(1972,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 스탠리 큐브릭 감독)와 함께 미래의 우주를 배경으로 한 철학의 쌍두마차라고 할 수 있다. 소련은 머나먼 행성 솔라리스 탐사를 위해 우주정거장을 세웠다.

그러던 중 탐험가 몇 명이 실종되자 당국은 생존자 베르톤을 소환한다. 그에게선 심한 쇼크에 의한 환각증상이 의심되는 황당한 진술만 나온다. 정부는 3명만 생존한 정거장에 정밀한 조사를 위해 심리학자 크리스를 파견한다. 도착한 크리스는 친구인 기바리안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놀란다.

남은 스나우트는 크리스에게 우호적인 듯하지만 뭔가 숨기는 듯하고 사르토리우스는 대놓고 배타적이다. 그러면 2명이 전부일 텐데 크리스의 눈앞엔 난쟁이가 앙탈을 부리고, 소녀가 왔다 갔다 방황한다. 기바리안의 방에서 그가 남긴 영상을 보고 이 안에서 뭔가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을 깨닫는다.

자기 방으로 돌아온 크리스는 10년 전에 자살한 아내 하리를 만난다. 스나우트에게 물으니 솔라리스가 인간의 내면을 읽고 그 기억을 물질화한 ‘방문자’를 만든다고 설명해준다. 자신의 과거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크리스를 정확하게 알아보는 하리에 두려움을 느낀 크리스는 그녀를 우주로 추방시킨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다음날 다시 나타나고 심지어 심한 상처를 입으면 자가치유 능력으로 감쪽같이 치료한다. 그런 그녀를 환상이라 여겨 거리를 뒀던 크리스는 아내로서 인정하고 사랑의 감정까지 품게 된다. 하리 역시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점점 인간이 돼가는 자신에게 공포를 느낀다.

타르코프스키는 원래 그런 성향이긴 하지만 여기선 아예 대놓고 서양철학의 거의 모든 사상을 망라한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성 아우구스티누스 등의 미장센도 노골적이다. 과학의 비약적 발달로 딸에게 권좌를 내준 철학은 18세기 말~19세기 초 심리학까지 새 주류로 우뚝 서자 큰 위기를 맞는다.

오죽하면 후설은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이란 책을 썼을까? 한마디로 압축하자면 유물론과 과학에 치우친 관성적인 심리학자가 선험적 현상학을 만나고, 거기서 실존주의의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가진 존재론이냐, 살아 있다는 실존주의냐’의 해법을 찾는 철학의 정수다.

솔라리스는 2개의 태양을 자전하는 다른 태양계의 행성이다. 그러니 배경은 지금보다 미래다. 인간은 지금보다 더 나약해지고 오만해졌다. 인류 지식의 경계는 고작해야 인트로와 아웃트로의 개울 속에서 수류에 따라 흔들리는 수초 정도다. 그건 곧 갈대와 같이 얄팍한 인간의 심리를 의미하기도.

하나의 은하에 태양 같은 별만 해도 무려 1000억 개다. 태양에 9개의 행성이 있다는 걸 감안하면 한 은하계에 지구 같은 행성이 1조 개다. 그런데 우주 안에 그런 은하가 1000억 개가 있다. 웬만한 인간의 스케일로는 우주의 사이즈가 가늠이 될 수 없다. 지구와 인간은 하나의 먼지만큼도 못하다.

우주에 문명을 가진 생명체는 반드시 있다. 당연히 우리보다 훨씬 앞섰을 것이다. 지구 나이 고작 45억 살이니. 그러나 우리가 영화에서 접한 형상과는 달라도 아주 다를 것이 확정적이다. 4차원이거나 더 고차원적일 것이다. 한라산만한 거품일 수도, 호수 하나를 뒤덮을 아메바 형태일 수도 있겠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지구 생명체와는 무조건 다른 형상과 화학적 구성으로 형성됐을 것이라는 것. 탐사에서 살아남은 베르톤은 솔라리스 궤도에서 “키가 12피트나 되는 아이 같지만 역겨운 괴물을 봤다”고 말한다. 이렇게 편협한 생각을 가졌으니 ‘에이리언’, ‘화성침공’ 수준에서 답보상태인 것이다.

솔라리스의 정체는 무엇인가? 감히 신학이 대두된다. 특정 종교인 외에 천지창조론을 믿는 이는 없다. 영화는 ‘의식의 바다’인 솔라리스를 신으로 상정하는데 절대적인 신은 아니다. 과거 크리스는 하리에게 잘못을 저질렀다. 충격으로 그녀는 자살했으며, 그 고통을 크리스가 그대로 물려받은 것.

솔라리스는 인간을 다스리는 이성과 직관,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맞선 감각과 욕망 중 후자의 지배자다. 크리스의 결핍이 커질수록 방문자의 자의식은 더욱 또렷해진다. 자신이 누구인지, 뭘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몰랐던 그녀는 크리스의 내면의 결계가 해제되자 자아정립과 사랑 탐닉에 몰두한다.

소크라테스 흉상을 비롯해 유사 시대 인물들의 흉상과 아우구스티누스 등 중세의 스콜라 철학자를 연상케 하는 그림들이 자주 등장한다. 크리스의 아버지는 대놓고 말을 키우고 우주정거장엔 말 그림이 걸려있다. 삶과 죽음의 초월, 자유, 회개다. 아버지가 집안에서 비를 맞는 건 아들을 대신한 회개.

스나우트는 크리스가 방문자에 대해 묻자 “보는 자에 달렸다”며 슬며시 칸트를 초대한다. 그리곤 “기적? 그건 우리 고정관념이 낳은 신비주의”라고 유물론으로 넘어간다. 죽어도, 죽여도 되살아나는 하리는 보드리야르다. 그녀는“난 인간이 돼가고 있어”라고 하지만 인간은 진화로 오늘에 이르렀다.

결국 지구에서와 달라지면서까지 우주에서 행복을 찾으려 했던 크리스는 진리가 내면에 있음을 깨닫고(아우구스티누스) 귀환한다. 비를 맞으며 책을 정리 중인 아버지를 발견하곤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 방탕한 생활과 이교 숭배의 방황 끝에 주 앞에 무릎 꿇고 ‘고백록’을 바친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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