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조남주의 동명 소설을 김도영 감독이 데뷔작으로 스크린에 옮긴 ‘82년생 김지영’은 원작의 논란을 넘어서 양극으로 분화된 우리나라의 자화상을 거시적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사회 공통의 현상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분깃점이 될 듯하다. 지영(정유미)은 대현(공유)과 결혼해 딸 아영을 낳은 전업주부다.

설날을 앞두고 대현은 제 고향에 가지 말자고 제안하지만 지영은 시어머니가 용인하겠냐며 시큰둥할 뿐이다. 시댁에서 1박2일에 걸쳐 제사상을 차린 뒤 친정으로 가려 하는데 시누이 내외가 들어온다. 시어머니가 상을 차리라고 하자 지영은 갑자기 친정엄마 미숙(김미경)인 듯한 말투로 돌변한다.

지영은 공무원인 명수와 청계천 미싱 노동자 출신 미숙 사이에서 은영(공민정)에 이은 둘째 딸로 태어나 막내아들 지석(김성철)을 동생으로 뒀다. 아들 선호 사상이 극단적인 명수는 대놓고 아들과 딸을 차별 대우한다. 대학 졸업 후 열심히 회사생활을 했던 지영은 그러나 육아를 병행할 순 없었다.

요즘 그녀는 ‘알바’를 알아보고 있지만 만만치 않다. 전 직장 선배가 당시 사내 여성 사원들의 롤 모델이었던 김 팀장에게 연락해보라고 귀띔한다. 퇴사 후 홍보회사를 차렸으니 일손이 부족할 것이라는 것. 김 팀장은 쌍수로 환영한다. 들뜬 마음으로 대현에게 얘기했더니 자신이 육아휴직을 하겠단다.

그러나 현실은 매우 달랐다. 베이비시터 구하는 게 만만치 않았고, 뒤늦게 이를 알게 된 시어머니는 고질적 고정관념에 냉정한 현실까지 더해 절대불가론을 펼치니 지영은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직도 지속되는 명수의 딸에 대한 편견에 화난 미숙은 정신이 크게 병든 지영을 보고 충격을 받는데.

페미니즘의 명확한 반대말은 없다. 다만 일각에서 안티페미니즘, 마초이즘 등으로 대체하지만 여권신장에 반대한다고, 또 남성의 거칢을 앞세운다고 남녀의 인격이 동등해질지는 미지수다. 페미니즘은 지금까지 여성이 불이익을 받아왔고, 남성이 여성을 아래로 깔봤다는 명명백백한 불평등의 증거다.

지영은 커피숍에서 아영의 투정에 그만 커피를 바닥에 쏟는다. 뒤에서 ‘맘충’이란 말이 들으란 듯이 흘러나온다. 지영은 “내가 어떤 일 겪었는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아세요? 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상처를 주려는 거죠?”라고 어필한다. 그 우는 애들이 자라 바로 이 나라의 주인공이 된다.

‘지영’을 무시하면 그녀의 애들이 자라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흔들 것이다. 손가락질 말자. 유모차를 끌고 공원에서 커피를 마시는 지영을 보고 한 남자가 “나도 시집이나 갈까?”라고 하자 일행 여자는 “나도 남편 돈으로 커피 마시고파”라고 맞장구친다. 지영은 남편 덕에 편하게 애나 키우는 걸까?

육아와 가사에 지친 지영이 팔목이 아파 병원에 갔더니 의사조차도 ‘빨래는 세탁기가, 밥은 전자밥통이 해주는데 왜?’라는 반응이다. 대현은 ‘전자결재가 생겼다고 회사원이 편한가?’라고 지영을 다독여준다. 어릴 때 은영의 꿈은 세계여행이었다. 단, 한국인이 없는 곳. 아직 미혼이지만 결혼 계획은 없다.

미숙은 은영, 지영 후 세 번째로 지석을 낳았다. 시어머니는 얼굴만 마주치면 아들 하나 더 낳으라 성화였다. 처녀 시절 그녀는 청계천에서 미싱으로 오빠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안타까워하는 지영에게 “그땐 다 그랬어”라고 달랜다. 지금 같으면 오빠가 막노동을 해서 여동생을 가르치는 게 마땅할 텐데.

명수는 영국 출장에서 돌아오며 딸들에겐 공책을, 지석에겐 썩 앤티크한 만년필을 사줬었다. 이번에도 한약을 지어왔는데 달랑 지석이 것 하나다. 명수는 지영이 어릴 때 여자로서의 도리를 ‘굴러오는 바위를 못 피하는 여자가 잘못’이라고 가르쳤다. 제도적, 관습적 불합리성과 남성적 폭력성은 빼고.

이른 아침 한 중년 여인이 점포 앞에서 망설이며 “나 첫 손님 아니지?”라고 주인에게 묻는다. 첫 손님이 여자면 재수 없다고 꺼리던 때가 있었다. 어이없다. 아줌마들이 수다를 떨며 각자의 전공을 묻는다. 현실과 아무런 상관없다. 아영과 지하철로 이동 중이던 지영은 화장실 사용을 포기하고 참는다.

대현의 회사 워크숍에선 성희롱 방지 교육이 열린다. 고모는 지영에게 좀 꾸미고 다니라며 “여자가 예뻐야지”라고, 은영에겐 “결혼 안 하니?”라고 빈 캔을 휴지통에 던지듯 내뱉는다. 대현이 지영의 재취업 포기에 찬성하며 “그래 좀 쉬자”라고 말하자 지영은 “애 보는 거 쉬는 거 맞아?”라고 묻는다.

남편들은 가사와 육아에 참여하며 ‘돕는다’고 말한다. 제 자식을 키우고, 제 가정을 지키는 게 자원봉사인가? 중국을 지배한 공자의 유교사상은 삼국시대 이후의 우리 생활에 깊숙이 뿌리내렸다. 여기서 남자들이 여자의 인권을 묶는 데 전가의 보도로 써먹던 게 삼강오륜이고 부위부강과 부부유친이다.

이렇게 1000년 넘게 남자의 입맛에 맞는 교의를 만들어준 유교 덕에 여성의 인권은 거론조차 될 수 없이 열녀문 하나가 모든 이데올로기를 지배했다. 이런 흐름은 동쪽 끝만의 얘기는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무신들은 동성애, 매매춘을 동시에 즐기면서도 당당하게 결혼생활을 유지했다.

감독의 장편 첫 연출은 매우 유려하고 세련됐다. 워낙 조연진이 탄탄해 지영처럼 주먹을 풀 수 없다. 정유미의 TV에서 굳어진 수세적 여인의 고치를 뚫고 벗어나려는 혁명적 용틀임이 돋보인다. 이 훌륭한 다크 판타지 드라마가 불편하다면 검찰개혁이 싫은 사람들의 그것과 같은 맥락이다. 23일 개봉.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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