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1982년 만우절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 김지영(정유미)은 꿈에 그리던 취업에 성공했고, 대학 때 가슴 콩닥거렸던 선배 대현(공유)과의 결혼에 성공했지만 직장인과 아내까지가 한계였다. 여기에 엄마 역할까지 더할 순 없는 게 대한민국의 냉엄한 현실이었다. 딸 아영을 낳고 퇴직해 전업주부가 됐다.

100만 부나 팔린 조남주의 소설을 김도영 감독이 영화화한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남성들의 신경질적인 반응에서 왜 페미니즘이 필요한지 명명백백한 근거가 드러난다. 여성에 대한 상대적 불평등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변증법이다. 수천 년 된 남존여비의 억견의 유령이 에피스테메인 양 행세한다.

영화가 집중하는 지점은 한 곳 30대 중후반의 젊다면 젊고, 웬만큼 살았다면 살았다고 할 수 있는 전업주부의 인간학적 존재론이다. 칸트의 인간학은 자연이 인간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연구하는 생리적 인간학과,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어떻게 형성하는가를 탐구하는 실천적 인간학으로 나눴다.

지영의 생리적 인간학은 이미 여성성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아영이 5살쯤 됐으니 한동안 수유 등 육아에 전념하느라 닫았던 성욕의 문을 열고, 딸을 재운 뒤 대현과 와인이라도 한잔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됐지만 육아 스트레스가 발목을 붙잡는다. 아영은 이유식은 뗐지만 아직 돌볼 데가 많은 것.

그녀는 누가 있건 없건, 집에서도 친정에서도 무시로 멍하니 창밖을 내다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어떤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생각을 생각하는 건 아닐까? 나는 어디서 온 누구며, 왜 왔는지, 지금 가는 길이 맞는지, 그래서 제대로 목표를 정해놓고 그곳을 향해 바른길을 가는 건지.

그렇게 그녀가 허공에서 허상을 그릴 때 가족들은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어 표정을 읽을 수 없으니 속내를 알 수 없다. 지나치게 두드러지지 않아서 고요한 존재의 공허, 존재자의 외로움이다. 대현의 “지영아, 지영이 맞지? 네가 가끔 다른 사람이 돼”는 대답을 기대할 수 없는 처연한 메아리다.

실천하는 인간으로서의 지영은 이미 자아를 잃고 제자리걸음일 따름. 오직 아영에게 알람이 맞춰져 습관처럼 시작해 기계처럼 마무리하는 일상은 지영은 없고 ‘아영이 엄마’만 존재할 뿐이다. 대현의 여자는 사라졌고, 아내마저 저 멀리 떼밀렸다. 재취업은 그녀로선 최종적 배수진의 용틀임이다.

아영이 점점 성장하면서 대현의 외벌이로는 미래가 불투명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가 예전 연봉의 80%라도 받고 다시 직장에 나가려는 이유는 경제라는 단편적 배경 때문만은 아니다. 일에 대한 욕심도 출세욕도 아니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을 함으로써 존재자 김지영을 되찾고 싶은 것.

하이데거는 ‘현존재를 이끄는 자기이해를 실존적 이해’라고, ‘실존에 대한 물음은 현존재의 존재적 현안에 대한 물음’이라고 언명했다. 또 존재론적 구조 연관을 ‘실존론성’이라 명명하고 실존론의 분석작업에 들어갔다. 지영은 실존적인 인물이지만 존재론적으로는 기계고, 존재상적으로는 유령이다.

그녀의 본래적 존재가 지영이라는 현존재로 현세에 나왔지만 하이데거가 말하는 시간성으로서의 도래적 존재가 될 가능성은 요원해 보인다. 그녀에게 타인이 빙의되는 건 육아 스트레스로 현존재의 실존적 이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회를 지배해온 남녀불평등은 그녀의 실존론성을 거세했다.

각각의 현존재들이 어떤 존재자로 살지는 각자의 선택의 몫이다. 운명론과 기계론을 따라 관성적으로 사는 이도 있을 것이고, 유물론이나 관념론을 선택해 그 이념의 목표를 향해 능동적인 삶을 추구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돼 산을 누비고 동굴에서 자는 수도승도 있을 것이다.

지영의 결혼과 출산은 누가 등을 떼민 게 절대 아니다. 그럼에도 왜 스트레스를 받고 괴로워할까? 파르메니데스부터 시작된 독사에 대한 에피스테메의 구별은 미셸 푸코에서 ‘권력이나 지식이 작동하는 특정 시기의 저류를 형성하는 담론 체계, 무의식적 인식’이라는 의미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했다.

모든 항성, 행성, 위성, 혜성 등은 탄생하고 소멸된다. 지구는 아직 성장 중이거나, 소멸을 향해 가고 있다. 따라서 세계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각 나라는 완벽하지 못하다. 중국 문화의 영향이 큰 우리 민족에겐 나이로서의 서열화 개념과 남존여비 사상이 만든 독사적 에피스테메가 잔존해있다.

여기서 82년생 김지영은 낀 세대다. 이 샌드위치들은 진보와 보수의 이념과 전통과 개혁의 의식을 함께 지녔기에 현명하면서도 한편으론 확고한 지론을 갖추지 못하기 마련이다. 별생각 없이 바라본 대한민국 사회를 통해 그저 나이를 먹으면 그러는 줄 알고 별다른 계획과 목표 없이 결혼했다.

자신보다 어린 직장인들로부터 ‘맘충’이라 손가락질 받고, 딸 낳은 ‘죄’로 시부모의 눈치를 볼 줄 짐작이나 했을까? 이 미시적인 한 가정의 소품은 스크린에 와서 온통 불합리와 부조리로 가득한 우리나라의 자화상을 거시적으로 확장한다. ‘김지영’들은 어른보다 정치를 잘 알지만 참견을 꺼린다.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라 자기애가 강하고, 기성세대와 달리 정체성을 고민하기 때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82년생 김지영’이 자꾸 등장하는 배경은 뭘까? 가치관의 카오스에 사는 ‘김지영’과 후배들을 구하기 위해 사서삼경부터 기성 교과서까지 모두 폐기하고 새로운 코스모스를 찾아야 하는 이유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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