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머니’, 소신이냐, 입신이냐의 장엄한 메아리 [유진모 칼럼]

유진모l승인2019.10.29l수정2019.10.29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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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수출주도의 개방경제정책 대외거래를 원활하게 지원하기 위해 한국은행이 출자한 100억 원의 자본금으로 1967년 1월 개점한 외환은행은 한때 국내 최대의 상업은행으로 발전했지만 IMF 등의 경제난국을 거치면서 론스타펀드에 헐값에 넘어간 뒤 국부유출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야기한 바 있다.

‘블랙 머니’는 ‘부러진 화살’, ‘남영동 1985’ 등 웬만한 서스펜스 스릴러를 능가하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탐사보도성 영화를 연출해온 정지영 감독의 능력이 돋보이는 외환은행 사태의 고발 보고서다. 2003년 다국적 투자사 스타펀드가 70조 원 가치의 대한은행을 단돈 1조 7600억 원에 인수한다.

2008년 한차례 매각을 시도하지만 실패한 뒤 2011년 금융감독원이 징벌매각이냐, 단순매각이냐를 심의하기 73일 전부터 스토리는 시작된다. 내연 관계인 금융감독원 최민규 차장과 대한은행 회계팀 박수경은 대한은행이 헐값에 팔리는 데 일선에서 움직였다. 자기자본비율 조작에 깊게 관여한 것.

그들이 탄 승용차를 정체불명의 대형트럭이 공격하고 최 차장은 즉사한다. 생명의 위협에 시달리던 수경은 연쇄추돌사고를 내고 서울지검 양민혁(조진웅) 검사에게 조사를 받던 중 성추행 당했다는 문자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민혁은 문자 조작과 수경의 타살을 주장하며 수사에 착수한다.

일자리를 빼앗긴 대한은행 노동조합원들은 거리에서 단식농성을 하고, 스타펀드는 이광주 전 국무총리 등 ‘모피아’들을 고문으로 거느린 국내 최대의 로펌 CK에 의뢰를 한다. CK는 유학파 김나리(이하늬)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내세운다. 민혁과 나리는 인권변호사 서권영(최덕문)을 통해 만난다.

권영은 조합원들의 농성을 지원하고 있었고, 민혁과 나리는 각자 다른 목적으로 그를 만나러 왔다 마주친 것. 하지만 나리는 무조건 이익만 좇는 천박한 변호사가 아닌, 진정한 법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소신 있는 법조인이었다. 이번 사건에 미심쩍은 점이 많은 것을 눈치채고 민혁과 공조하는데.

대부분의 필모그래피가 ‘가진 자’의 금기에 대한 도전이었던 정 감독이 가장 매끄러운 상업적 흐름을 이어가는 서스펜스를 만들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초유의 국부유출 사태, 자신과 상관없을 것이라 외면했지만 결국 그 부메랑에 희생된 우리 국민에 대한 사기극이다.

민혁과 나리의 캐릭터가 영화의 절반을 차지한다. 검찰 조직은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검사는 동일체’라며 죄다 조직 논리에 경도돼 오직 무사안일의 패밀리 개념과 출세에만 눈이 멀어있다. 그런 시스템에 화가 나 술을 마시는 민혁에게 옆자리의 취객이 ‘검찰을 누가 믿냐’ 비아냥대듯.

민혁은 대한민국의 엘리트라는 검찰이 맞냐 싶을 만큼 막무가내다. 적법한 절차에 따라 수사를 하는 게 아니라 오로지 감과 감정에 의거해 무모함을 일상으로 삼는다. 그런 캐릭터는 얄미우리만치 법과 질서의 논리로 자신의 안위를 위주로 한 입신영달에만 눈이 먼 적지 않은 공무원에 대한 야유다.

할리우드 영화의 대사에서 변호사는 십중팔구 ‘사기꾼’이다. 말이 법조인이지 돈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안 가리는 직업이란 의미다. 그런데 나리는 수임료 장사꾼과는 사뭇 다르다. 재력가인 아버지와 또 그의 친구인 전 국무총리로부터 무한의 사랑을 받기에 출세가 보장됐지만 불의를 참지 못한다.

대한은행 조합원 중 한 명이 단식농성 중 아사하고, 나리는 그 장례식장을 찾는다. 유족들이 강력하게 반발하지만 나리는 같은 성당의 신자였다는 이유를 들어 헌화하고 떠날 만큼 신념을 갖췄다. 그녀도 처음엔 검사를 지망했다. 그러나 미국에 유학하면서 생각이 바뀌어 변호사로 진로를 수정했다.

민혁은 어릴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피해를 입었음에도 가해자가 유력인사였던 탓에 패소했고, 그 여파로 일찍 세상을 떴다. 홀로 남은 엄마는 식당을 운영하며 민혁을 키웠고, 민혁은 세상을 바로잡고자 죄지은 자들을 잡아넣고자 검사가 됐다. 그런데 여전히 세상은 불공정하고 불공평하다.

평범한 서민이 법학이나 경제학 등에 접근하기 어려운 이유는 전문성과 더불어 생소한 전문 용어에 있다. 전문적이니 어렵겠지만 의도가 엿보이기도 하는 이유는 전문가들의 어긋난 자만심으로 인한 엘리트주의에 근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리의 아버지는 금융자본주의를 사는 방식을 언급한다.

군주제에서 공화제로 바뀌어 이론적으로 민주주의를 이뤘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산업화 과정을 통해 자본주의가 모든 이데올로기를 지배하는 시대다. 법은 국민이 주인이지만 시장 경제적으로는 자본이 왕이다. 그래서 왜 검찰, 변호사, 더 나아가 국가가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는지 부르댄다.

민혁과 나리가 법조인이 된 근거는 정의의 실현을 통한 헌법의 수호에 있었다. 그들은 플라톤의 이데아를 믿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찬양하고, 홉스의 ‘리바이어던’과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왜곡한 자본숭배자들은 나라를 살린다는 명분으로 다수의 국민의 손발을 묶고 숨통을 옥죄었다.

“이게 재판입니까, 개판이지”(‘부러진 화살’) 식의 “나는 법률대리인이지, 범죄대리인이 아닙니다”라는 언어의 유희도 있지만 내내 울화가 치밀 만큼 진지하다. 후반 의외의 반전이 거듭되며 큰 재미를 주고 조진웅은 모처럼 훌륭한 캐릭터를 입었다. 소신이냐, 입신이냐의 메아리가 크다. 13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유진모  ybacchu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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