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신의 한 수: 귀수편’(리건 감독)은 5년 전 356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했던 ‘신의 한 수’의 스핀오프 버전이다. 전편에서 살인죄 누명을 쓰고 수감된 태석(정우성)에게 옆방의 수감자가 머리로 바둑을 두자며 노크를 한다. 태석은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출소하며 그에게 이름을 묻지만 답은 없다.

출소 후 관철동 주님(안성기)을 찾아간 태석이 머리로만 바둑을 두는 존재자에 대해 언급하자 “부산에 그런 수를 쓰는 자가 한 명 있는데 바로 귀수”라고 답한다. 이 영화는 그 귀수의 탄생을 그린다. 1988년. 일찍 부모를 여읜 수연은 남동생과 살기 위해 황덕용 프로 기사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한다.

황 프로는 수연에게 몹쓸 짓을 하고 소년은 우연히 그걸 목격한다. 그날 밤 수연은 목을 매고 소년은 서울행 기차를 탄다. 타고난 바둑 실력을 지닌 소년은 한 기원에 들어가 100원짜리 동전 하나를 수백 배 불려 주린 배를 채운다. 그의 앞에 머리로 두는 맹기바둑의 고수 허일도(김성균)가 나타난다.

소년은 일도를 따라 산속에서 피나는 수련을 거친 뒤 속세에 나와 숨어서 무전기로 그의 내기바둑을 도와 승승장구한다. 그러던 어느 날 착해 보이는 한 노동자가 일도에게 전 재산을 빼앗긴 뒤 자살하고, 소년은 제 또래쯤 되는 아들이 거기서 오열하는 걸 목도한다. 소년의 죄책감을 일도는 무시한다.

일도는 평생 악연으로 엮인 부산잡초(허성태)를 찾아가 마지막 승부수를 던진 끝에 그의 재산을 빼앗는 데 성공한다. 그냥 호락호락 넘어갈 잡초가 아님을 아는 일도는 소년에게 저금통장을 주며 빨리 몸을 피하라고 하지만 칼잡이가 나타나 일도를 찌르고 도망가는 소년의 앞을 잡초가 가로막는데.

영화의 본격적인 얘기는 그로부터 11년이 지나 어른이 된 주인공(권상우)이 관철동 똥 선생(김희원)을 만나면서부터 시작된다. 내기 바둑 거간꾼인 똥은 주인공을 데리고 내기판을 전전하며 큰돈을 쓸어 담는다. 똥은 사랑하는 홍 마담과 결혼하기 위해 돈을 모으지만 주인공의 목적은 다른 데 있다.

삶과 죽음, 운과 운명 등 이항대립의 양가성이란 측면에선 매우 데카르트(이원론)적이다. 자신을 따라가겠냐는 일도 앞에서 소년은 숫자가 나오면 스승으로 모시겠다며 동전을 던진다. 그러나 ‘100’이 아니라 ‘백원’이 나온다. 그럼에도 소년은 일도를 따라간다. “난 운을 안 믿어. 항상 나빴기에”라며.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동전을 던지는 행위는 ‘다크나이트’의 하비 덴트가 빌런으로 변한 투 페이스와 같다. 세상의 모든 일은 본래적으로 정해져있다는 운명론 혹은 기계론이자 다른 측면에서 볼 때는 그때그때의 운에 따른다는 명리학이다. 마지막에 똥은 주인공의 이름을 묻지만 입은 안 열린다.

그러자 똥은 다음에 만나면 귀수라 부르겠다고 이름을 지어준다. 그는 “만약 바둑의 신이 있다면 너처럼 둘 것”이라고 찬사를 보낸다. 바둑이 뼈대지만 바둑에 흥미가 없더라도 마치 정교한 무협영화를 보는 듯한 스릴과 액션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에 재미있고 그만큼의 가치를 지니는 작품이다.

리샤오룽(이소룡)의 ‘사망유희’가 유행시킨 ‘도장 깨기’식의 난이도를 높여가는 도전은 상업성을 높이고, 특히 전반의 암시 뒤에 후반에 본격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외톨이(우도환)는 충분한 변수로서 작용한다. “남의 눈에 피눈물 흘리게 한 적 있어”라는 질문은 복수의 허망함을 뜻하는 교훈이다.

귀수의 본명이 끝까지 거론되지 않는 것과 그의 신 같은 바둑 실력은 같은 의미다. 그는 사람일 수도, 신일 수도 있다. 또 실존 인물일 수도, 존재하지 않는 허상, 즉 운명의 형상화일 수도 있다. 그는 세상만사의 정리를 뜻하는 사필귀정이자 길흉화복에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새옹지마를 의미한다.

흑백 구분이 없는 투명한 한 가지 돌로 승부를 거는 장성무당(원현준)과의 팔목을 건 대결, 일도의 목숨을 앗아간 잡초와의 목숨을 건 선로에서의 대국, 그리고 마치 극진가라테 창시자 최배달을 연상케 하는 1대100의 혈투 등은 관객의 상상력을 비웃는 듯하다. 액션도 요소요소에 적당히 섞여있다.

규화보전을 알기에 ‘동방불패’에 수백만 명의 관객이 몰린 게 아니듯 바둑판의 좌표를 볼 줄 몰라도 아무 상관없이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썩 괜찮은 오락물이다. 주인공과 장성무당이 똑같이 투명돌로 대결을 펼치는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바둑을 알건 모르건 이 판세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인 것처럼.

바둑돌은 단지 서스펜스를 유발하는 보조 장치일 뿐 관객이 긴장하는 포인트는 주인공들의 표정이다. 그들의 얼굴에서 대결이 어떤 형국으로 흐르고 있다는 걸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 수단은 바둑이라는 매우 정적인 두뇌싸움이 아니라 춘추전국시대의 백가쟁명처럼 은둔 고수들의 칼부림과 같다.

결국 주제는 ‘세상만사는 한 판의 바둑과 같다’는 세사기일국이다. 외톨이의 아버지는 파업 노동자였다. 소년은 그 노동자가 착하고 형편이 어렵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기에 그 돈을 가져가는 게 부당하다고 갈등했지만 결국 그가 깨달은 교훈은 삶이란 게 처절하고 냉정한 승부라는 것이었다.

일도는 소년에게 “넌 계산만 하는 기계가 돼”라고 주문했다가 나중에 “아니다. 사람이 돼”라고 정정한다. 그러나 소년은 “그냥 기계가 되겠다”라고 고집을 부린다. 그와 똥이 타고 다니는 승합차엔 레퀴엠이 적혀있다. ‘돈 놓고 돈 먹기’식의 자본주의 세계에 흐르는 음악은 오직 진혼곡밖에 없는 걸까?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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