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윤희에게’(임대형 감독)는 매우 유니크한 멜로 영화다. 한국. 윤희(김희애)는 이혼한 뒤 딸 새봄(김소혜)과 함께 살아왔다. 고3 새봄은 서울로 진학할 계획이지만 남자 친구 경수(성유빈)는 계획이 없다. 윤희는 한 회사 구내식당에서 일하고 전 남편은 술만 취하면 아파트 앞에서 윤희를 기다린다.

윤희에게 한 통의 편지가 날아온다. 상대방은 윤희의 꿈을 꾼다고 했다. 윤희는 잊고 지냈던, 애써 잊으려 안간힘을 썼던 아련한 첫사랑의 추억 속으로 회상 여행을 떠나곤 하지만 현실은 왜 이리 힘든지. 새봄이 우연히 그 편지를 읽어본 뒤 경수와 함께 엄마를 그곳으로 데려가려는 계획을 세운다.

일본 오타루. 중년의 수의사 쥰(나카무라 유코)은 20살부터 카페를 운영하는 고모와 함께 살아왔다. 엄마는 한국인, 아빠는 일본인으로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20살 때 부모가 이혼하면서 아빠를 따라 일본으로 왔다. 아빠는 곧바로 고모에게 맡겼다. 별로 가깝지 않았던 아빠는 최근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을 마친 뒤 사촌동생 류스케가 왜 결혼을 안 하냐며 한국 남자를 소개해 주겠다고 시키지도 않는 짓을 해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만든다. 쥰은 동물병원 단골 료코와 친해져 함께 술을 마시는 사이가 된다. 고모가 갑자기 허그를 하자고 팔을 벌린다. 고모의 품은 따뜻하고 눈은 그칠 줄 모른다.

남자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여자들의 예리하고 첨예한 심리 상태와 사랑에 대한 아련하면서도 아린 추억과 회한을 잘 담아냈다. 윤희와 새봄의 로드버디무비일 수도, 새봄과 경수의 버디성장드라마일 수도 있는데 결국은 억눌린 여성의 자아의 지평구조 밝히기다.

오빠가 대학에 진학하자 윤희는 실력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형편상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그 대가로 엄마로부터 카메라 하나를 받았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오빠가 서둘러 소개해준 남자와 결혼했다. 그 남자와 이혼하자 오빠가 지금의 식당을 알선했지만 딸과 여행하고자 그만둔다.

윤희는 가끔 담배를 피운다. 새봄도 그렇다. 나중에 둘은 서로 흡연자인 것을 확인한다. 비흡연자인 경수는 새봄에 동화되기 위해 담배를 배우려 하지만 새봄에게 저지당한다. 윤희는 딸 때문에 산다고 하고, 새봄은 부모의 이혼 때 엄마를 선택한 건 자신의 착각이었다고, 자신은 짐이라고 말한다.

이혼한 이유를 묻는 새봄에게 아빠는 “네 엄마는 상대를 외롭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답한다. 아빠는 술을 안 마시고 마지막으로 윤희를 찾아가 청첩장을 건네며 오열한다. 쥰은 부모의 이혼 때 아빠를 선택한 이유가 엄마는 자신에게 집착하지만 아빠는 무관심하기 때문이었다고 고모에게 고백한다.

료코가 왜 연애를 안 하냐고 묻자 쥰은 “여태까지 엄마가 한국인인 걸 숨기고 살아왔다. 나 자신을 속이고 산 것. 료코도 지금까지 숨겨온 게 있으면 계속 숨기는 게 좋을 것”이라고 말한다. 쥰은 다 늙은 고모를 물끄러미 보다가 “친구도 만나고 연애도 해”라고 주문하며 연애해본 적 있냐고 묻는다.

이 작품에서 기차, 눈, 담배, 냄새, 달, 장갑, 편지는 매우 중요한 소재다. 윤희는 직장의 상사에게 휴가를 신청했다가 자리를 비우면 지켜줄 수 없다는 답에 바로 퇴사한다. 식당을 뒤로하고 나오는 그녀의 배경으로 고속 열차가 달린다. 그 후 열차 내부에서 바깥 경치를 조망하는 인트로로 연결된다.

기차는 추억으로 가는 통로인 동시에 미래를 향하는 진보와 확장이다. 새봄이 자신의 졸업과 눈이 안 온다는 걸 핑계로 엄마에게 여행을 제안한 건 결혼, 출산, 육아 등으로 정체된 삶을 살아온 엄마에게 자아를 찾아주기 위함이다. 한 여자를 정립하는 계기를 줌으로써 정체성을 찾아주자는 의도다.

수시로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라고 읊조리던 고모는 쥰이 그 말을 하자 “여기 한두 해 산 것도 아닌데”라고 새삼스럽다는 반응을 보인다. 서로 닮은 듯 다른 윤희와 새봄은 계속 기차선로처럼 평행선을 달리다 서서히 간극을 좁혀가더니 눈의 배경에서 담배와 눈싸움으로 소통의 통로를 찾는다.

담배 연기는 아련한 추억이자 그 추억이 남긴 고통이다. 태워야만 지울 수 있지만 상흔은 남는. 쥰의 질문에 고모는 화장실 방향제 냄새가 나는 교사와 연애한 적이 있다고 한다. 결혼 전 연애한 적 있냐는 새봄의 질문에 윤희는 좋은 냄새가 나는 사람이 있었다고 말한다. 편지 같은 냄새일 것이다.

첫사랑은 윤희에게 그동안 많은 편지를 썼지만 이번에 딱 한 번 부쳤다. 윤희는 답장을 쓴다. 첫사랑은 “한동안 안 꿨던 네 꿈을 꿨다”고 밝히고, 윤희는 “나도 네 꿈을 꾼다”고 답장한다. 편지는 청춘의 디오라마이자 사랑의 파노라마다. 또 인생을 관조하는 매우 명증적이고 명시적인 일기장이다.

경수는 누군가 버린 손뜨개 장갑을 리폼해 한쪽을 새봄에게 준다. 윤희는 새봄에게 장갑을 사줄까 묻는다. 얼핏 보면 그건 결핍이다. 사람은 인생의 동반자가 있어야 한다는.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건 끈끈하게 연결된 연인만의 징표다. 마치 반으로 잘라 미래의 재회를 약속한 노리개 같이.

차고 기우는 달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이다. 새봄과 영어 제목 ‘달빛 겨울’은 그런 의미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아직도 고리타분한 아집이 변화의 물결을 거부한다. 그 범주화된 편견은 사랑을 기존의 틀에 맞추려고만 한다. 눈(고립, 고독)은 언제쯤 그치려나? 소설처럼 아름답다. 14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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