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이래저래, 이모저모로 어려운 요즘 같은 때에 최소 경비로 잠시나마 시름을 잊을 수 있는 가성비와 접근성 최고 콘텐츠는 영화다. 인식론에 따라 체증이 내려갈 만큼 웃을 수 있는 코미디이거나 아니면 머리가 아플 정도로 눈물을 쏟아내는 최루물로 나뉠 텐데 ‘감쪽같은 그녀’(허인무 감독)는 후자다.

2000년 부산. 경북 청송에 살던 12살 공주(김수안)가 갓난아이 진주를 업고 사회복지사 동광의 안내를 받아 72살 말순(나문희)의 빈집에 온다. 바다가 보이는 공원에서 김밥을 파는 옆자리에서 직접 수놓은 손수건을 팔아 생계를 잇는 말순은 자신의 집에 생면부지의 아이들이 있는 데 의아해한다.

공주는 한 보따리를 보물단지처럼 소중하게 감싸고, 그게 의심스러운 말순은 훔친 게 아니냐고 다그치다가 그만 보따리를 땅에 떨어뜨린다. 그건 김효선이란 이름이 적힌 유골함. 오래전 가수가 되겠다고 집을 나간 말순의 딸이고, 공주와 진주는 말순의 손녀인 것. 말순은 공주에게 밥을 차려준다.

혼자 편히(?) 살던 말순이 갑자기 초등학생과 갓난아이 손녀 둘을 돌보는 건 녹록지 않다. 하지만 그건 공주도 마찬가지. 진주만 키우는 게 아니라 말순도 건사해야 한다. 학교의 짝꿍 우람이는 대놓고 애정공세를 퍼붓는데 마침 그의 엄마가 둘째를 낳은 지 얼마 안 돼 젖동냥을 할 수 있으니 좋다.

경제적으로 어렵긴 하지만 그럭저럭 평화롭게 살던 어느 날 말순이 친구랑 심하게 다툰다. 공주는 말순이 진주를 소홀히 돌보는 등 평소와 많이 다르다는 걸 깨닫는다. 진주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그녀가 선천적인 희귀병을 앓고 있다는 것과 더불어 말순의 치매 증상이 심하다는 걸 알게 되는데.

감독은 대놓고 관객들을 제대로 울려보자고 작정한 듯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과한 욕심에 시나리오가 다소 산만하다 보니 연출 역시 매끄럽지 못해 각 인물들이 잘 조화를 이룬다기보다는 겉도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러나 모든 핸디캡은 김수안이라는 배우가 감쪽같이 보완하며 방점을 찍는다.

‘감쪽같다’는 ‘꾸미거나 고친 것을 전혀 눈치챌 수 없다’는 뜻이다. 제목에는 이 영화의 반전과 왜 그런 설정을 했는지 답이 담겨있다. 박 선생은 학생들에게 가족을 주제로 작문 숙제를 낸 뒤 공주에게 발표를 지시하는데 늦둥이 동생과 새 보호자가 된 할머니 얘기가 아니라 삽살개 가족 얘기다.

산속에 아빠, 엄마, 아들 삽살개가 살았는데 어느 날 사냥꾼에게 부모가 잡혀간다. 외로움과 굶주림에 지친 강아지는 민가로 내려와 쓰러진다. 역시 허기에 지친 노파가 강아지를 발견하고 집에 데려와 솥에 물을 끓인다. 배가 고프니까. 그런데 노파가 솥에서 죽을 꺼내 강아지에게 먹이는 것이다.

그리고 노파는 “삽살개야, 가족이 돼줘 고맙다”라고 말한다. 왜 공주는 오갈 데 없는 자신과 진주의 우산이 돼준 할머니 얘기가 아닌 삽살개 우화를 적었을까? 그 답 역시 제목에 있다. 바느질을 하던 말순은 공주의 머리에서 실을 보고 떼어주려는데 공주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거부감을 보인다.

도대체 그 어린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두 소녀의 아버지는 어떤 존재였을까? 무료하던 두 사람은 ‘감쪽같지?’ 게임을 한다. 흥겨움이 더해지며 점점 분위기가 고조될 즈음 “감쪽같지?”라고 공주가 화두를 던진 순간 분위기가 냉랭하게 변한다. 감쪽같은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던 진실.

다소 산만하긴 해도 영화가 가진 힘은 분명하다. 애 같은 어른과 어른 같은 애가 공존하는 이 세상. 왜 애는 애어른이 돼야 하고, 어른은 어른애가 돼야 하는 걸까 묻는 힘은 거세다. 산꼭대기에 있는 말순의 집을 향해 높은 언덕과 계단을 오르는 공주가 자주 등장한다. 소녀에게 세상은 까마득하다.

공주가 진주의 기저귀와 씨름하자 말순은 그들을 데리고 마트에 간다. 그러나 일회용 기저귀마저도 가볍게 살 수 없는 속사정 탓에 공주는 사은품에 손을 댔다 직원에게 들켜 도둑 운운하는 모욕을 감내해야 한다. 내일 체육 시간이 있어 체육복을 사야 하지만 공주는 말순에게 차마 말을 못 꺼낸다.

손수건이 안 팔려 동광에게 강매를 하는가 하면 싼 맛에 쉰 김밥을 사 먹었다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리기도 했다. 그런 말순에게 체육복을 사달라고 손을 내미는 건 마음만은 이미 어른이 된 공주로선 못할 짓이었다. 그래서 체육시간에 교실에 머무는데 경숙의 지갑이 없어지고 범인으로 의심받는다.

교실엔 공주밖에 없었으니 경숙의 엄마는 대놓고 그녀를 모욕하고 말순이 강하게 반발한다. 미장센 중에 밤비 벽화가 있는데 의도였다면 감독의 차기작을 기대할 만하다. 관광객은 귀엽다고 새끼 사슴을 어루만지는데 그건 부모에게 소외당해 죽게 만드는 밤비 신드롬이다. 강한 공주의 환유일까?

치매가 심해지자 말순은 공주와 정을 떼기로 결심하고 매몰차게 대하며 일부러 강퍅한 체한다. 심지어 “네가 나를 제일 힘들게 하는 게 뭔지 아니? 나한테 너무 잘해준다는 거야. 이젠 네가 그만 나 좀 놔주면 안 되겠니?”라면서 공주가 해준 새 돋보기를 집어던져 그녀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

공주를 못 알아보는 말순이 “어른 손을 놓친 거니?”라고 묻자 공주는 “할매를 잃어버렸어요”라고 답한다. 김수안의 존재감은 몇 번을 강조해도 아쉬울 정도다. 거짓말을 안 하는 사진이 좋아 사진작가가 된 현재의 공주가 수미상관을 이룬다. 끝까지 마음을 놓지 말자. 끝까지 울린다. 내달 4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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