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별유천지 부암동과 백사실 계곡 산책 [문화지평 답사기]

문화지평l승인2019.11.13l수정2019.11.13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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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 ‘문화지평’은 올 서울시 공익단체 지원사업으로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를 진행하고 있다.

[미디어파인 칼럼=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 가을 초입으로 들어설 무렵인 지난 9월 21일 토요일 오전 10시. 서울미술관 앞에는 부암동 일대와 백사실 계곡을 답사하기 위한 문화지평 회원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서울 도처에서 부암동을 이르는 길은 네 갈래다. 유진상가가 있는 홍은사거리에서 세검정로를 타고 꼬불꼬불 오르거나 경복궁역에서 청운동을 거쳐 오르는 길이 있다.

나머지는 불광역에서 구기터널을 지나면 정릉에서 북악터널을 지나오는 길과 만나 평창동을 거쳐 오늘 길이다. 대략 동서남북에서 한 갈래씩 길을 내서 부암동에 이르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무엇을 위해 험지인 부암동으로 몰려들었는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한성을 도읍으로 정한 조선조에는 백석동천으로 풍류를 즐기기 위함이었고 근대에는 도시 빈민들이 몰려 들었다. 그러다 현대에는 다시 산 좋고 물 좋은 곳에는 부촌이 형성됐다. 한양도성 밖에서부터 사방 십리 지역을 성저십리라고 불렀다. 지대가 낮은 곳에는 주택가와 저자가 형성됐고 북한산 자락과 같은 숲이 우거지고 인가가 없는 곳은 별서가 들어섰다.

석파정 휴관 빠끔히 열린 쪽문으로 슬쩍 엿봐

▲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 8회 차는 부암동과 백사실계곡을 답사했다. 사진은 서울미술관 앞에서 답사 일정을 설명하고 있는 배건욱 역사문화해설사.

답사 시작점인 서울미술관은 이름 때문에 자칫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시립미술관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사실상 이런 작명은 짓는 사람이나 인허가를 내주는 쪽에서 면밀히 검토해서 피해야 한다. 그럼에도 개인이 석파정 일대를 사들여 서울미술관을 지었고 지금은 석파문화원서울미술관이란 법인이 관리하고 있다. 이름 때문에 말이 많았는지 지금은 석파정서울미술관으로 표기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서울미술관이란 단독표기가 많아 오해 소지를 남겨 놓고 있다.

이날은 마침 석파정이 정비를 위해 휴관을 해서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수 없었다. 다만 빠끔히 열린 쪽문으로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석파정은 원래 조선 말 세도가인 영의정 김흥근의 별서였다. 이 곳에 마음에 들었던 흥선대원군은 부인 민 씨의 요양을 핑계로 이곳에 머물게 하고는 아들 고종을 불러들였다. 당시 군신관계 관습상 군왕이 머물렀던 곳은 신하가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김흥근은 ‘울며 겨자 먹기’로 정자를 상납해야 했다.

경내 안양각 뒤 바위에 ‘三溪洞(삼계동)’이란 각자(刻字)가 있어서 ‘삼계동 정자’로 불리다가 이 곳을 차지한 대원군이 자신의 호를 석파로 바꾸면서 자연스레 석파정(石坡亭)이 됐다. 삼계동이란 글자는 현재 석파정 정문 대문 현판으로도 남아있다. 삼계동 이외 너럭바위 위로 포개진 커다란 바위 단면에는 노론 영수 송시열의 제자 권상하가 초서체로 쓴 ‘巢水雲簾菴’(소수운렴암)’이란 각자도 있다. 구름 발 드리운 물 위의 암자란 운치 있는 글이다.

종로 요정 오진암 부재 뜯어와 지은 무계원

▲ 오진암은 조선 말기 서화가 이병직의 집이었던 것이 후에 서울시 등록음식점 1호 요정이 됐다. 호텔이 신축되면서 부재를 옮겨와 무계원이란 이름으로 한옥을 지었다. 배경이 좋아서 답사팀들이 단체사진을 찍었다.

답사팀은 발길을 돌려 무계원(武溪園)으로 이동했다. 무계원은 원래 종로구 익선동에 있었던 서울시 등록음식점 1호 오진암을 뜯어 와 지은 것이다. 오진암은 조선 말기 서화가 이병직의 집이었다. 1910년대 초 대표적인 상업용 도시한옥으로서 희소성과 보존가치가 있어서 끝내 부재로 살아남았다. 특히 남북 냉전체제를 대화와 화해 국면으로 이끈 7.4남북공동성명을 도출해 낸 역사성까지 담고 있는 곳이다.

무계원이 위치한 곳은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도원과 흡사해 화가 안견에게 3일 만에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했던 무계정사가 있던 곳이다. 부암동 주민센터 골목길로 올라가다 보면 ‘무계정사길’이라는 이정표가 보이는데 ‘무계정사1길 14-1’에 무계정사지가 있다.

무계정사는 입구가 좁고 안은 넓은 곳으로 계곡이 있었으며 복숭아나무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몽유도원도는 현재 일본 천리대학이 소장하고 있다. 이 곳 길가에는 단편소설 ‘빈처’, ‘운수 좋은 날’로 잘 알려진 현진건의 집터 표지석이 있다. 무계정사지와 현진건 집터는 거의 같은 곳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다. 현진건은 이 곳에서 닭을 키우며 살다가 장결핵으로 죽었다.

2016년에 문화지평이 답사를 했을 때만해도 폐허로 방치된 한옥과 잡풀 우거진 현진건 집터를 직접 밟아보고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답사에서는 새로 지어진 집의 철옹성 같은 높은 담벼락으로 인해 도저히 접근할 수 없었다. 이 필지는 경매에 나왔고 2015년 10월 경 감정가(42억238만원)의 81%인 34억100만원에 낙찰된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지평이 답사할 때 이미 새 주인을 찾은 것이다.

안평대군 집터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22호로 지정됐고 집터 한쪽 큰 바위에는 조선 3대 명필인 안평대군이 쓴 것으로 전해지는 '무계동(武溪洞)'이란 각자가 있다. 또 서울 종로구에서 보호수로 지정한 느티나무도 있다.

당시 전문가들은 유형문화재가 끼어 있고 역사·문화적 가치 때문에 개인 용도로 개발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지만 지금은 개인 주택이 들어서면서 접근이 불가능해졌다. 이날 답사팀도 담벼락을 따라 주변만 이리저리 둘러보다 아쉬운 마음만 담고 물러나야 했다. 소유주가 지혜를 발휘해 공적 자산인 역사문화재를 온 국민이 공유할 수 있도록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안평대군 무계정사지‧현진건 집터 더 이상 볼 수 없어

▲ 2016년 답사 때만해도 폐허가 된 한옥과 현진건 집터를 들어가서 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주택이 들어서서 더 이상 접근이 어려워졌다. 굳게 닫힌 철문이 역사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듯 씁쓸하게 느껴졌다.

인근 바위에서 다행이 ‘청계동천(靑溪洞天)’ 각자를 만날 수 있어 위안이 됐다. 언제 누가 썼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조선시대 창의문 밖으로는 민가가 많지 않았고 묵객들이 찾는 풍광 좋은 골짜기였다. 앞서 언급한 석파정이 있는 골짜기 삼계동(三溪洞), 세검정과 탕춘대, 그리고 앞으로 언급할 백사실계곡의 백석동천 등이 있었다. 이번 답사의 주제가 ‘서울의 별유천지 부암동과 백사실 계곡’인 까닭이다.

답사팀은 창의문으로 향했다. 공식 이름은 창의문이지만 자하문이란 운치 있는 이름도 있다. 자하문란 산마루에 있는 문을 의미한다. 풍수지리상 북대문인 숙정문과 함께 잘 사용되지 않다가 중종 때 개방한다. 육축과 문루, 홍예에 그려진 봉황 천정벽화, 누조석 등이 볼만하다. 2015년에 뒤늦게 보물로 지정됐다. 창의문에서 내려와 본격적으로 백사실계곡을 가기 위해 자하손만두 집을 끼고 길을 접어들었다.

백사실계곡은 서울에서 손꼽히는 청정지역으로 소문나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진 곳이다. 세검정 쪽이 아닌 높은 지대인 창의문 쪽에서 접근하니 상류에서 물길을 따라 걸어 내려가게 됐다. 상류 쪽에는 능금마을이라고 지금도 10여 가구가 살고 있는 오래된 마을이 있다. 능금마을은 조선시대 중기 때부터 능금‧자두나무를 심었고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청정지역 백사실계곡에 남아있는 능금마을 흔적

▲ 생태경관보전지역 백사실 계곡 안에는 조선시대 능금과 자두나무를 심었던 능금마을의 흔적이 남아있다. 노란 조끼를 입은 안내자들이 능금마을 곳곳에서 답사객이 길을 벗어나지 않도록 안내하고 있다.

백사실계곡을 따라 가다보면 생태경관보전지역을 알리는 안내판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도롱뇽, 산개구리, 버들치, 가재가 살고 있다는 표지다. 노란 조끼를 입은 안내자들이 능금마을 곳곳에서 답사객이 길을 벗어나지 않도록 안내했다.

오솔길을 따라 걷던 능금마을을 지나자 탁 트인 풍광이 눈에 들어왔다. 수많은 묵객을 불러 모았던 ‘백석동천(白石洞天)’이 각자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가까운 곳에 ‘월암(月巖)’이란 각자도 있다. 동천(洞天)은 도교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하늘과 같은 곳, 신선이 살만한 곳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 백사실 계곡 백석동천 각자

계곡 중간에는 주춧돌만 남은 별서 터가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사 결과 별서는 추사 김정희 소유로 밝혀졌다. 추사의 문집인 완당전집(阮堂全集) 권9에서 ‘선인 살던 백석정을 예전에 사들였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와 관련 추사의 다른 글에서 ‘나의 북서(北墅, 북쪽 별장)에 백석정 옛터가 있다’라고 한 대목이 발견된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이런 이유로 추사가 터만 남은 백석정 일대 부지를 사들여 별장을 새로 건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지금도 안채, 사랑채 주춧돌과 연못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백사실계곡은 여름에 서울 시민들이 많이 찾는 피서지이기도 하다. 특히 어린이들의 자연생태학습장으로 많이 사용된다. 거대 도시 서울의 허파 같은 곳이다. 처음 찾는 사람들은 “서울 시내 이런 곳이 있었다니”하며 대부분 놀라는 표정이다. 그 만큼 자연생태가 잘 보존돼 있고 적당한 유적과 재미난 스토리텔링이 회자되는 곳이다. 인공구조물 없이 생태환경을 최대한 살린 것도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매력 포인트다.

추사 별서터 남아 있는 백사실계곡은 서울의 별유천지

▲ 문화지평 회원들이 단체 사진을 찍은 이곳은 추사 김정희의 별서터로 확인된 곳이다. 백사실 계곡 한가운데 있다.

답사팀은 바위 위에 지어진 삼각산 현통사를 지나 백사실 계곡을 완전히 빠져 나와 월드캐슬 빌라 정문 왼쪽 암벽 아래 탕춘대 터 표지석을 지나 세검정에 다다랐다. 탕춘대는 세검정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산봉우리에 있었다. 탕춘대는 연산군이 1506년 이곳에 누대(樓臺)를 지어 연희 장소로 삼았다. 영조 때는 무사들을 훈련시키는 연융대로 사용했다.

세검정에 이르자 정자 앞 너른 바위가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바위 위로는 북한산과 백악산 등 인근 산에서 흘러나온 물줄기들이 모여 제법 우렁찬 기세로 흘러가고 있다. 옛날에는 비가 많이 오면 물 구경하기 좋은 곳으로 유명했다. 지금도 비가 오고나면 물살 기세가 역동적이고 볼만하다.

세검정은 1941년 화재로 조지서와 함께 소실된 것을 겸재 정선의 세검정도를 기초해 1977년에 복원했다. 세검정 인근에는 국가 표준 종이와 지폐용 저화지를 만드는 조지서가 있었고 이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한지마을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세검정초등학교 운동장 한켠에는 장의사(莊義寺) 당간지주(보물 235호)가 서있다. 장의사는 황산벌 싸움에서 전사한 신라 화랑 장춘랑과 파벌구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 지금의 현중원 같은 곳이다. 당간지주란 절 입구에 깃발을 거는 기둥인 당간을 받치는 돌기둥을 말한다. 운동장 한쪽에 높이 3.63m의 거대한 석주 두 개가 단단하게 박혀 있다. 조지서, 장의사 당간지주, 한지마을 등은 이날 답사에서 직접 가보진 않았지만 인접 문화유산이라 설명이 있었다.

세검정 지나 서울미래유산 석파랑에서 답사 마무리

▲ 세검정에서 정자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배건욱 해설사와 경청하고 있는 답사팀.

세검정에서 걸어 내려오면 상명대 앞 세검정삼거리에 이른다. 삼거리에는 부암동의 유래가 된 ‘부침바위’에 대한 설명이 각자된 바위가 서 있다. 원래 부침바위가 있었다가 70년대 없어진 것을 상징적으로 다시 세운 것이다. 배건욱 해설사는 “기차바위라 부르는 벽련봉 정상에 부침바위가 지금도 있는데 이 바위는 겸재 정선의 그림 인곡유거와 창의문에도 등장한다”며 “이런 바위는 사실 백악, 인왕, 북한산 등에 많이 있다”고 설명했다.

세검정삼거리에는 한정식집 석파랑이 있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이 곳은 서예가 소전 손재형(1903∼1981) 선생이 말년에 작품활동을 했던 곳이다. 소전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예 선생으로도 유명하다. 그 보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일본인으로부터 사들인 일화가 더 유명하다. 1985년 사용 승인된 이 한옥채는 1989년 소유주가 소전의 딸에서 현재 석파랑을 운영하는 김주원 회장으로 변경됐다. 김 회장은 1993년 이곳을 한식당으로 탈바꿈시키고 이름을 석파랑으로 지었다.

한옥 채 뒤쪽 언덕배기에는 석파정 별당(서울시 유형문화재 23호)이 있다. 소전이 이곳에 집을 지으면서 서울미술관 뒤 석파정에서 별당만 떼다 옮겨 놓은 것이다. 별당에서는 둥근 창 등 조선 후기 유행했던 중국풍 건축미를 발견할 수 있다. 감상할 수 있다. 별당 규모는 작지만 한옥 장인이 최고급 자재를 사용해 지은 조선 후기 상류사회 대표적인 별장 건축물이다.

▲ 한정식 전문점 석파랑과 뒤편으로 석파정에서 옮겨온 별당 모습. 별당에서는 중국풍 건축미를 만날 수 있다.

■ 코스
석파정(서울미술관) - 무계정사터 - 무계원 - 창의문 - 백사실 - 세검정 - 석파랑

<글=김범준 작가·유성호 문화지평 대표, 사진=권택상 사진작가>

[문화지평]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2016)
역사도시 서울답사(2017)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2019)
서울미래유산 시장 아카이빙(2019)
기업‧단체 인문역사답사 다수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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