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의 공간, 창경궁이 품은 굴욕의 역사 [문화지평 답사기]

문화지평l승인2019.11.15l수정2019.11.15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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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 ‘문화지평’은 올 서울시 공익단체 지원사업으로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를 진행하고 있다.

[미디어파인 칼럼=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 지난 11월 2일 청명한 가을날 문화지평이 주관하는 2019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 공익활동지원사업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 마지막인 10회 차가 진행됐다. 이번 답사에서는 일제 시대 창경원으로 전락했던 ‘여인의 공간 창경궁이 품은 굴욕의 역사’에 대해 역사문화와 건축‧조경 전문가인 김태휘 해설사로부터 순도 높은 해설을 들었다.

창경궁은 조선왕조의 세 번째 궁궐로 건립된 것으로 세종 대왕이 아버지 태종 임금을 편안하게 모시기 위해 지은 수강궁이란 궁궐이 있었다. 9대 성종 임금 대에 이르러 왕실 어른들을 모실 공간이 부족해지자 수강궁을 크게 확장했다.

성종의 할머니 정희왕후 윤씨(세조의 왕비)가 그리고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추존 덕종의 왕비), 작은 어머니이자 양어머니인 안순왕후 한씨(예종의 계비) 등이 생존해 있었다. 이들이 수강궁으로 거처를 옮기자 성종이 넓이라 명한 것이다. 창경궁은 이로써 여인들의 공간이 됐다.

성종 때 수강궁 확장 왕실 여성 공간 창경궁 탄생

▲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 마지막 10회 차 답사지인 창경궁 홍화문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홍화문 앞 매표소에서 모인 답사팀은 김 해설사의 일정을 들은 후 단체사진을 찍은 다음 입장했다. 창경궁은 정문인 홍화문과 옥천교 영역, 임금이 정사를 보는 명정전과 문정전, 숭문당 영역, 임금을 비롯한 왕실 가족들의 생활 공간인 환경전, 경춘전, 통명전, 양화당 영춘헌 영역, 자경전터를 비롯한 성종 임금의 태실이 자리하고 있는 영역, 마지막 춘당지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창경궁 정문 홍화문의 홍화(弘化)란 백성들을 좋은 쪽으로 교화한다는 뜻이다. 경복궁 광화문, 창덕궁 돈화문 등 모든 궁궐 정문에는 될 화(化)자가 들어가 있다. 이는 백성들을 두루 폭넓게 교화시켜 나라를 이끌어 가겠다는 당대 통치자들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모든 궁궐은 풍수지리상 배산임수로 궁궐 뒤쪽에 산을 두고 앞쪽에 물을 흐르도록 했다. 이때 궁궐 앞을 흐르는 개울은 신성함과 벽사의 의미를 담아 금천(禁川)이라 했고 돌다리를 금천교라 불렀다. 창경궁 금천교 이름의 다른 이름은 옥천교다. 홍화문과 함께 보물로 지정됐다. 창덕궁 금천교는 비단처럼 맑은 물이 흐른다는 뜻의 금천교(錦川橋)라 불렀고 경복궁 금천교는 영제교(永齊橋)라는 이름을 가졌다.

궁궐의 전각은 대부분 남향이다. 그러나 창경궁의 홍화문, 명정문, 명정전 등 일부 전각들은 동향(東向)이다. 이는 임금이 정사를 보기 이한 공간보다는 왕실 어른들 처소로 건립됐기 때문에 특별한 격식을 갖추지 않은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일반적으로 궁궐을 출입하기 위해서는 세 곳의 문을 거쳐야 하는데, 창경궁은 홍화문과 명정문으로만 배치가 돼 있다. 이 또한 같은 의미로 보인다.

창경궁 법전 명정전 정문 명정문은 보수공사 중

▲ 창경궁 법전 명정전의 정문 명정문은 꽁꽁 싸맨 채 보수공사 중이라 전혀 볼 수가 없었다. 옥천교 뒤로 보이는 것이 가림막에 가려진 명정문이다.

명정문은 창경궁의 법전인 명정전의 정문이다. 이번 답사 때는 보수공사 중이라 전혀 볼 수가 없었다. 명정전 앞 조정에서는 임금 즉위식을 비롯해 신하들로부터 인사를 받는 조참 의식 등 중요 행사와 더불어 중죄인이 있을 때 국문하는 친국 장소로 활용됐다.

1544년 11대 중종이 승하하자 그로부터 닷새가 지난 뒤에 12대 인종이 창경궁에서 조선조 임금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즉위식을 가졌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새 임금 인종은 부왕 중종의 승하에 너무도 애통해 한 나머지 어좌에 앉길 주저한 채 오랫동안 몸을 숙여 크게 통곡하며 서 있다가 승지의 간곡한 권유로 억지로 어좌에 올랐으나 불안한 자세 속에 어좌에 앉아 눈물을 비 오듯 흘려 이 광경을 접한 모든 이들이 덩달아 오열, 단 한 명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궁궐은 쓰임새에 따라 대략 외전, 내전, 궐내각사, 동궁, 후원, 동조 등 여섯 공간으로 나뉜다. 이 가운데 외전은 법전과 편전을 가리키는데 나랏일을 논의하고 처리하거나 나라의 공식행사를 거행하는 공간을 통틀어 말한다. 내전은 임금과 왕비의 일상생활 공간이며 궐내각사는 임금의 명을 받아 나랏일을 집행하는 신료들이 모인 ‘종합 청사’를 일컫는다.

후원은 대개 궁궐 뒤쪽에 자리해 왕실의 휴식이나 행사, 임금과 왕비가 백성들의 생활 체험을 하던 다목적 공간이다. 동궁은 세자의 생활과 학문 공간, 동조는 왕실 어른인 대비마마 처소를 가리킨다. 창경궁도 여기에 준해 궁궐 격식에 맞추어 여러 공간들이 들어섰고 특히 창덕궁과 한 궁궐처럼 사용되다 보니 후원을 공동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 창경궁 전각과 출입구 배치도<창경궁 홈페이지 캡처>

국가 공식 행사를 거행하는 전각을 법전, 혹은 정전이라 하는데 창경궁의 법전은 명정전이다. 창덕궁 법전은 인정전, 경복궁 법전은 근정전이라 했다. 근정전이나 인정전이 중층으로 지어진데 비해 명정전은 비교적 작은 단층 규모로 지어진 것이 특징이다. 현존하는 궁궐들의 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 광해군 8년이던 1616년에 재건된 이래 화재 같은 피해가 없어서 고풍스러운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명정전에서는 즉위식 이외에 왕비‧세자 책봉, 외국 사신 영접, 각종 하례의식 등 국가 공식 행사가 거행됐다. 인종의 즉위 하례가 명정전에서 열렸고 인조 때 급작스레 세상을 떠난 소현세자를 대신해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과 효종 때 뒷날 현종이 되는 세자 책봉의례가 열렸다. 또한 정조는 문무 관리들의 인사 행정인 도목정을 명정전에서 거행하기도 했다.

국상이 났을 때 명정전은 망곡을 행했던 장소로 종종 이용되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고종 연간이던 1882년 임오군란 때에는 난리로 인해 실종된 왕비 명성왕후의 국상을 선포하고 그 망곡처로써 명정전을 사용하도록 했다는 기록도 있다.

비운의 사도세자 죽음 목도한 비틀린 회화나무

▲ 줄기가 비틀리고 속이 빈 회화나무. 안내판에는 사도세자의 비극적 역사와 함께 한 나무라고 적혀 있다.

답사팀은 옥천교를 건너지 않고 홍화문을 들어와 왼쪽으로 길을 잡았다. 명정문 보수로 명정전으로 빙 둘러 가는 도중 특이하게 비틀리고 속이 빈 회화나무와 마주했다. 지금까지 봐왔던 잘 생긴 회화나무와는 사뭇 다른 기이한 모양이다. 나무에 대한 안내판에는 ‘영조 38년(1762년)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역사를 같이한 나무’라고 적혀 있다.

뒤주가 놓은 자리가 바로 나무 앞이었다는 해설사의 설명이 있었다. 안내판은 또 사도세자의 비명소리를 듣고 가슴이 아파 줄기가 비틀리고 속이 완전히 빈 게 아닐까 추측을 해 놨다. 다소 지나친 해석이지만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상황을 상상해보면 이 정도 스토리는 갖다 붙여도 될 만 하단 생각이다.

궁궐에서 임금이 신료들을 접견하며 일상 정무를 보던 전각을 편전이라 부른다. 임금의 공식 집무실이다. 창경궁 편전은 문정전으로 임금이 신료들과 더불어 나라의 주요 현안을 논의하고 경연을 열었던 장소로 활용됐다. 동향인 명정전과 달리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명정전이나 문정전과는 달리 소박한 외관을 간직한 숭문당은 창경궁 창건 당시에 건립한 것이 아니다. 광해군 때 중건하면서 처음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이다.

저마다 겹겹층층의 역사를 가진 전각과 편전들

▲ 창경궁 편전인 문정전 앞에서 김태휘 해설사 설명을 듣고 있는 답사팀.

순조 30년에 있었던 화재로 불에 타 중건되기는 했지만 조선 중기 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이 전각은 문정전과 마찬가지로 임금이 정사와 학문을 논의하던 곳이다. 굳이 따지자면 정사 보다는 학문적 논의가 많이 이루어진 공간이었다. 편액은 숭문당을 자주 애용한 영조의 어필이다. 영조는 과거 급제 유생들을 만나 격려하고 때로는 신료들과 유생들의 학식을 시험하기도 했다.

내전은 임금을 비롯한 왕실 가족들의 생활공간으로 빈양문이 외전과 경계를 짓는다. 창경궁은 전반적으로 내전 공간이 잘 발달돼 있다. 옆 궁궐인 창덕궁의 부족한 내전 공간을 보완해 주는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다. 내전 영역에서 제일 먼저 보는 건물이 바로 함인정(涵仁亭)이다. 숭문당과 더불어 명정전의 후전 역할을 담당했던 이 건물 자리에는 본래 성종 때 창건된 인양전이라는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화재로 소실되고 인조 때 인경궁에 있던 함인당을 옮겨 온 것으로 전해진다. 한동안 함인당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함인정으로 바뀌었다. 함인이라는 말은 세상의 어짐과 의로움에 흠뻑 빠져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 함인정 내부에는 도연명의 ‘사시’가 각 계절과 방위별로 사방에 붙어 있다.

함인정 남쪽은 앞마당이 넓어서 임금이 편전으로 많이 활용하던 전각이기도 했다. 특히 신료들을 접견하여 경연을 열거나 과거에 합격한 유생들을 만나 격려하는 장소로 활용됐다. 영조와 정조 두 임금이 많이 사용했다. 정자 안에는 동쪽은 봄, 남쪽은 여름, 서쪽은 가을, 북쪽은 겨울에 대한 도연명의 사시(四時)가 걸려 있다.

春水滿四澤 춘수만사택 (東) 봄 물은 못마다 가득히 차고
夏雲多奇峰 하운다기봉 (南) 여름 구름 묘한 봉우리 많기도 하다
秋月揚明輝 추월양명휘 (西) 가을 달은 높이 떠 밝게 비취고
冬嶺秀孤松 동령수고송 (北) 겨울 고개 솔 한 그루 아름답구나

환경전과 경춘전, 통명전과 양화당 및 영춘헌, 집복헌은 창경궁 내전 영역을 이루는 중요 전각이다. 이들은 임금과 왕비, 세자나 세자빈, 때에 따라서 대비를 비롯한 왕실 어른들의 처소가 되는 등 상황에 맞게 적절히 운영됐다. 창덕궁 내전들이 임금과 왕비의 거처로 성격이 분명하게 정해진 데 비해 창경궁은 상대적으로 융통성을 발휘해 운영됐다는 점이 특색있다.

환경전은 성종이 창경궁 창건 때 지어진 건물로 임진왜란 여파로 소실됐다가 광해군 때 중건했다. 인조 초에 일어난 이괄의 난으로 또 다시 화재 피해를 입었다가 인조 11년인 1633년에 인경궁 건물을 헐어다 중건했다. 순조 30년인 1830년 있었던 대화재로 또 한번 불에 탄 것을 3년 후에 다시 중건하는 등 사연이 많은 전각이다.

환경전에서는 11대 중종이 승하했다. 승하 직전까지 진료를 맡아던 의녀가 장금이다. 장금은 1515년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출산을 맡았고, 1522년 중종 어머니 자순대비, 정현왕후의 병을 치료한 공으로 중종의 치료를 전담하게 됐다. 신료들은 의원이 아닌 일개 의녀를 주치의로 삼은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중종은 의관들보다 의녀 장금을 더욱 신뢰해 마지막까지 자신을 맡겼다.

‘중종실록’에는 1524년부터 1544년까지 20년 동안 수차례에 걸쳐 장금이 진료를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TV 드라마 '대장금'은 바로 이 장금의 의녀로서의 활약에 추가로 수라간 이야기를 곁들여 꾸민 팩션이라고 할 수 있다.

▲ 김태휘 해설사 뒤로 여성들의 공간이었던 경춘전이 보인다.

환경전이 임금이나 세자의 처소로 쓰였다면 경춘전은 왕비, 왕세자빈, 또는 대비 처소로 쓰인 전각이다. 환경전 서쪽에 자리하고 동향이다. 이 전각에서는 정조와 헌종 두 임금이 태어났다. 인수대비로 알려진 소혜왕후와 파란만장한 생을 살다 간 인현왕후, 그리고 정조의 어머니면서 한중록을 남긴 혜경궁 홍 씨가 돌아가신 장소다.

특히 한때 왕비 지위에 올랐다가 희빈으로 강등된 장 씨는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자신의 거처인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짓고 여러 사람들을 불러 모아 왕후를 모해한다. 왕후 거처인 경춘전 주변과 통명전 일대에 온갖 흉물을 파묻어 왕후가 죽기를 저주했다. 결국 1701년 병을 얻은 인현왕후가 경춘전에서 명을 달리한다.

희빈 장씨의 이러한 음모는 훗날 영조의 생모가 되는 숙빈 최 씨에 의해 숙종에게 알려진다. 숙종은 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내린다. 사건 이후 숙종은 후궁이 왕비로 승격하는 자체를 법으로 금지시킨다. 통명전은 중종의 빈전으로 사용됐으며 선조 초 명종비 인순왕후 심 씨가 돌아가신 곳이다. 그런가 하면 영조의 손자이자 정조의 형인 의소세손이 어린 나이에 숨을 거둔 곳이기도 하다.

▲ 중종의 빈전으로 사용된 통명전(좌)과 대비의 침전인 양화당.

양화당은 창경궁의 중요 내전 건물 가운데 하나로 대비의 침전으로 사용됐다. 때에 따라 임금이 이곳에서 신료들을 접견하면서 학문을 시험하던 장소로 활용됐다. 그보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가 삼전도의 치욕을 당했던 인조가 환궁해 거처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정조 14년이던 1790년 통명전에 화재가 발생하자 정조가 이곳에서 신료들을 접견하기도 했다. 양화당에서는 철종의 왕비 철인왕후가 고종 15년이던 1878년에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순조는 큰 불로 인해 불타 없어진 양화당, 통명전, 경춘전, 환경전을 1834년에 중건하고 현판을 모두 직접 썼다.

영춘헌과 집복헌은 주로 후궁들의 처소로 사용된 곳이다. 때로는 임금이 머물며 독서를 즐기던 곳으로 활용됐다. 본래 각각 분리된 건물 있었으나 순조 때 난 화재로 중건하면서 붙어 있는 건물처럼 됐다. 정조와 헌종이 영춘헌을 즐겨 이용했다. 특히 정조는 재위 후반부를 창경궁에서 보내는 동안 영춘헌을 즐겨 사용하다 재위 24년째 되던 1800년 6월 승하한 장소다.

정조는 즉위초 경희궁에서 1년 여를 보내다가 노론 벽파 강경파들의 주동으로 일어난 존현각 습격 사건으로 궁궐 수비가 허술해 졌다는 판단에 따라 창덕궁으로 이어해 재위 기간 전반부인 약 12년을 지냈다. 이후 약 11년은 창경궁에서 보냈다.

집복헌은 사도세자와 순조가 태어난 곳이다. 순조의 경우는 이곳에서 관례의식과 더불어 세자 책봉례를 거행했다, 훗날 순조의 왕비가 될 세자빈에 대한 첫 번째 간택을 집복헌에서 가졌다는 내용이 정조실록에 기록돼 있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 씨를 편안히 모시고자 자경궁을 지었다. 이는 홍화문 맞은편 함춘원 자리에 사도세자 사당인 경모궁을 지어 두 건물이 마주보도록 했다. 정조는 아버지 사당 가까운 창경궁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재위 후반부를 보낸 셈이다. 그래서 혹자는 칭경궁을 ‘효의 궁궐’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성종이 왕실 어른들을 위해 처음 짓고 정조가 어머니를 모시고 재위 후반부를 보냈으니 적당한 표현이 아닌가 싶다.

▲ 성종의 태실과 태실비.

이들 전각을 지나면 태실과 태실비가 나온다. 그 옆에는 솥뚜껑처럼 생긴 해시계인 앙부일구와 풍기대가 있다. 태실과 태실비는 9대 임금 성종의 태실과 태실비다. 성종은 공과가 너무도 명확하게 평가되고 있다. 사림파 중용을 통해 한명회와 신숙주 등의 훈구 세력을 견제하고자 노력했지만 실패했고 제가(齊家)에 실패해 후궁들 간의 갈등을 막지 못했다. 폐비 윤씨(연산군 생모)를 사사, 훗날 연산군의 대량숙청을 불러오는 빌미를 제공했다.

앙부일구는 해의 길고 짧음에 따라 시간은 물론 절기도 살필 수 있었던 매우 유용한 해시계였다. 세종 때 장영실에 의해 만들어진 앙부일구는 영조 연간에 다시 제작 됐다. 궁궐을 비롯해 운종가에도 설치해 사람들로 하여금 시간을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이날 김 해설사는 앙부일구 읽는 법을 알려줬는데 약 30분 정도 차이가 났다. 이는 다름 아닌 현재 우리가 동경시를 기준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정확한 시계라고 볼 수 있다.

앙부일구 옆에는 바람의 세기를 측정하는 기구 풍기대가 서 있다. 현재 경복궁과 창경궁에 각 한 점씩 남아 있는 풍기대는 앙부일구와 더불어 조선이 농업과 연계된 기상학에 상당히 많은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유물이다.

▲ 앙부일구 시간 읽는 법을 알려주고 있는 김태휘 해설사. 뒤로는 풍기대가 보인다.

창경궁의 마지막 영역은 춘당지다. 이곳은 역대 임금과 왕비가 백성들의 생업인 농업과 양잠을 체험하던 내농포가 있던 곳이다. 춘당대와 짝을 이룬 연못으로 현재 ‘작은 춘당지’라 불리는 곳이 원래 춘당지다. 답사팀이 봤던 춘당지는 내농포에 속한 11개 연못을 1909년 일제가 강제로 허물어 하나로 만든 것이다.

일제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꾸민 후 춘당지를 만들어 뱃놀이를 하던 장소로 활용했다. 섬 한 가운데에는 수정궁(일본식 팔각 정자)이라는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한 때는 일대를 왕복하기 위한 케이블카도 설치됐다. 춘당지 뒤편으로는 1909년에 건립된 대온실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이 건물은 건립당시 동양 최대 규모로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이 전시돼 있었다.

춘당지서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 막내려

▲ 일제는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꾸미고 동‧식물원을 집어넣어 위락시설을 만들었다. 우리 궁궐을 격하시킨 굴욕의 역사다. 춘당지는 내농포 11개 연못을 허물어 만들었다. 춘당지 앞에서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1980년대 들어 창경궁으로 복원되면서 동물원과 식물원은 과천으로 이전시켰다. 현재 대온실 건물은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자생종 식물을 전시하고 있다. 이날 답사에는 창경궁에서 춘당지, 온실 등의 조경을 관리하는 이현숙 씨가 비번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동행하면서 답사객들의 궁금증을 풀어줬다. 심지어 밥값까지 냈다는 사실은 요즘 말로 ‘안 비밀’이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더불어 조선 후기 왕조역사의 중심무대였다. 효종 연간에 일어난 숙원 조 씨의 흉물 저주 사건을 비롯해서 숙종 연간에 일어난 신사무옥으로 알려진 희빈 장 씨의 인현왕후 저주사건, 영조 연간에 일어난 임오화변으로 알려진 사도세자의 죽음 등 굵직한 사건들이 일어난 곳이다. 하지만 창경궁은 고종 연간에 궁궐의 기능을 잃고 창경원으로 격하돼 수난을 겪게 된다. 1980년대 초 ‘창경원 밤 벚꽃놀이’가 유행했을 정도로 식민지 역사가 우리를 지배했다.

1983년 당시 정부의 주도로 복원 정비 계획이 이루어지면서 마침내 창경궁의 굴욕적인 역사는 마침표를 찍게 됐다. 서울시가 지원하고 문화지평이 주관한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는 창경궁을 마지막으로 마치지만 답사는 계속된다. 문화지평은 11월 9일 한양도성 18.6km를 일주하는 순성놀이를 했고 간단없이 답사를 이어갈 계획이다. 10회차 까지 함께 해준 시민들과 열정으로 해설에 임한 해설사들께 감사드린다.

■ 코스

홍화문 앞 매표소 - 옥천교 - 선인문과 회화나무 - 명정문 - 명정전 - 문정전 - 경춘전 - 환경전 - 대장금과 살구나무 - 통명전 - 영춘헌과 집복헌 - 자경전터 - 성종대왕 태실 - 춘당지

<글=김태휘 해설사‧김범준 작가·유성호 문화지평 대표, 사진=권택상 사진작가>

[문화지평]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2016)
역사도시 서울답사(2017)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2019)
서울미래유산 시장 아카이빙(2019)
기업‧단체 인문역사답사 다수 진행

문화지평  moonwhajipyu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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