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파킨슨 병 [화탁지 칼럼]

오경아 비엘티 아케아 대표l승인2019.11.20l수정2019.11.20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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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파인 칼럼=화탁지의 음양오행 성격론] 몇 년 전 막내 동생이 새 아파트로 입주하던 날이었다. 가족들이 모두 축하해주기 위해 모였다. 거실에 짐을 풀고 아버지와 난 여러 방 중 하나에 들어가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조용한 목소리로 나에게 물으셨다. “여기가 거실이냐?” 순간 울컥 하는 무언가가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밀려왔다. ‘아..우리 아빠 어떡해...’

조용한 절에 들어가 책을 읽으면서 살고 싶다거나 강태공이 되고 싶다던 아버지는 평생 장사를 하셨다. 늘 깔끔하셨고 격식을 중시하셨던 탓에 집 앞 슈퍼조차도 추리닝에 슬리퍼 바람으로 나가지 않으셨다. 가족행사가 있는 날은 늘 서둘러 가족들을 재촉했고, 내 결혼식에는 정해진 시간보다 한 시간 반이나 앞서 나가 계셨다. 본인을 위해서는 작은 돈에도 전전긍긍 하셨던 분이 딸들에게 옷을 사주실 때는 제일 고급스런 것으로 고르셨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도 술을 드시면 한 번씩 주위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술꾼으로 변했다. 책임감이 인생의 모토였던 아버지의 압박감이 술을 드시면 그나마 분출되는 때였던 것이다. 하지만 딸인 내가 보기에는 좋지 않은 모습들이었다.

그런 내가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시절이 있었다. 번역을 하던 시절, 한 여름의 새벽녘에 창문을 열어두고 음악을 들으면서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새벽 공기가 주는 상쾌함이 창문 안으로 번지면서 잔잔하게 음악을 듣는데, 너무나 외로웠다, 그 외로움은 사실상 가장이었던 내 어깨를 짖누르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문득 아버지가 떠올랐다. 십대 시절에 가장이 되어 평생 대가족을 책임지셨던 그분 어깨의 짐은 과연 어떤 무게였을까 가늠할 순 없었지만, 왜 강태공이 되고 싶다 노래를 부르셨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명리학을 공부하고 아버지 사주를 봤을 때, 관성(나를 통제하는 능력이면서 책임감을 의미)과 인성(사고하는 능력)이 많아 장사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대운(10년마다 변하는 하늘과 땅의 기운으로, 사주가 달리는 고속도로에 비유할 수 있다)을 신경쓰지 않고 사주만 보면 딱 공무원 사주였다. 거기에 정재(정확함과 꼼꼼함의 대명사)까지 있으니 허투루 하는 법이 없는 완벽주의자의 사주였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내가 얼마나 버티기 힘들었을까 순간 내가 가엾기도 했다.

날카로운 사고와 뛰어난 언변술을 자랑하셨던 아버지는 자유로운 영혼인 것만 빼고 자신을 가장 많이 닮은 나를 은근히 예뻐하셨다. 이해력이 빠르고 말이 잘 통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아버지의 말이 어눌해지기 시작했다. 식상관(자신을 표현하는 능력)이 원래 없던 사주였는데 대운에서 계속 화기운이 들어와 말씀이 많으셨구나 싶었다. 대운에서 화의 기운이 사라지면서 아버지는 너무나 과묵한 분으로 변하셨다. 나만큼 말이 많으셨던 분이셨는데 말이다. 아버지가 과묵해지시면서 나의 말할 기회가 많아져 은근히 좋았던 것도 사실이다.

작년에 엄마가 내게 물으셨다. “혹시 니 아버지 치매걸리는 것도 사주에 나오냐?” “아빠가 워낙 꼼꼼하잖아. 그런 분이 치매가 빨리 올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다 그런건 아니야.” 몇 달 전, 아버지는 파킨슨 병 판정을 받으셨다. 생명에 직접적인 지장이 있는 병은 아니지만, 그냥 눈물이 났다. 평생을 자기 자신을 위해 단 하루도 살아본 적 없는 분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처럼 마냥 엄마 꽁무니만 쫓아다니는 바보 할아버지가 되어 가는 모습이 가슴아팠다. 그래도 세상이 잘 돌아가고 있고 우리 4남매 모두 잘 살고 손자손녀들 모두 착하게 공부 잘한다고 거짓말을 해도 다 믿으실테니 한편으론 좋겠단 생각도 해봤다. 생각이 곧 고뇌이고 기억이 고통일 수 있는 게 인간사니까 말이다. 하지만 내 이름과 얼굴은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 오경아 비엘티 아케아 대표

[오경아 대표]
건국대 철학과 졸업
전 수능영어강사(번역가)
현 비엘티 아케아 대표
현 교환일기 대표
현 세렌 사주명리 연구소 학술부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오경아 비엘티 아케아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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