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왕국 2' 포스터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겨울왕국 2’가 개봉 6일 만에 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 신기록 작성에 한걸음 더 다가섰다. 이는 2014년 국내 최초이자 유일한 1000만 관객 돌파를 이룩한 애니메이션으로 기록된 전편 ‘겨울왕국’의 같은 기록보다 11일이나 앞선 속도다.

그런데 이토록 이 영화에 열광하는 관객들과 함께 스크린 독과점을 우려하는 관계자와 관객 역시 공존한다. ‘겨울왕국 2’의 스크린 독과점 우려는 개봉 전부터 지적되더니 개봉 다음날 ‘블랙 머니’의 정지영 감독을 포함한 한국 영화인들이 모인 ‘영화 다양성 확보와 독과점 해소를 위한 영화인 대책위원회’가 스크린 독과점을 해소하도록 영화법을 개정해 달라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대부분의 영화인들은 찬성한다. 그럼에도 다수의 관객은 대책위원회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그들의 주장 자체가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한국 영화계 전체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 한국 영화 관계자들과 관객 다수가 납득할 만한 타협점은 없는 걸까?

현재 ‘겨울왕국 2’는 국내 상영관 전체 스크린의 7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겨울왕국 2’를 만든 미국조차도 전체 상영관의 30%를 넘기지 않도록 장치가 돼있다고 한다. 프랑스는 법으로 15~27개의 스크린을 보유한 대형 멀티플렉스에서 한 영화가 점유할 수 있는 최다 스크린을 4개로 묶었다.

우선 자유경쟁 시장 체제라는 자본주의의 논리 상 관객들의 주장이 백 번 지당하다. 멀티플렉스가 특정 배급사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 손해를 감수할 리 없고, 특정 배급사 눈치를 볼 이유도 없다. 이를테면 CJCGV와 CJ엔터테인먼트, 롯데시네마와 롯데엔터테인먼트가 각각 자매 회사라고 해서 어느 정도 어드밴티지는 줄망정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진 않는다.

관객의 성향은 제각각이지만 ‘블랙 머니’를 보기 위해 상영관을 찾았는데 의도한 때와 장소에서 관람할 수 없다고 아무 생각 없이 ‘겨울왕국 2’를 티케팅 하진 않는 게 보편적이다. 여기까진 대책위원회의 관련 기사에 댓글을 다는 다수의 소비자들의 의견이 지당하다. 타당하다. 자본주의 ‘만만세’다.

하지만 아무리 다수의 의견을 따른다는 민주주의라고 해도 소수의견도 존중하자는 것 또한 민주주의의 이념이다. 이단시했던 소수성애자를 시간이 흐를수록, 문화적으로 발전할수록 인정하는 추세다.

만약 ‘겨울왕국 2’의 스크린을 30%로 제한했다면 지난 일주일 동안 300만 명 정도의 관객이 불만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며칠 빨리 보는 것도 문화적 혜택이긴 하겠지만 천천히 느긋하게 여유를 갖거나, 며칠이라도 더 가슴 설레는 과정을 거치는 것도 문화적 즐김이 될 수 있다. 하루라도 빨리 보고, 이미 관람한 사람들과 영화에 대한 토론을 하는 것도 즐거움이겠지만 조금 늦더라도 아이들 소음과 여러 사람들의 북적거림을 피해 나만의 문화적 시간을 갖는 것을 더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스크린을 제대로 배정받지 못한 ‘카센타’를 보러 왔다가 ‘퐁당퐁당’이어서 못 보고 되돌아간 관객이 다시 그 상영관을 찾아 그 영화를 관람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카센타’는 기하급수적으로 스크린을 상실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겨울왕국 2’가 싹쓸이한 스크린을 절반 정도 양보했다면 관객들은 전술한 기다림과 설렘의 미학을 즐길 수 있을 것이고, 영화는 아마 ‘최단기간 내 1000만 관객 돌파’ 같은 기록보다는 ‘최장기간 상영, 최다 관객 동원’ 같은 기록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상영관의 수익은 스크린 수를 제한하는 것과 자유경쟁 체제로 방관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옳을지는 미지수다. 단순논리로야 현재의 시스템이 유리하다. 하지만 영화가 단순한 장사 외의 문화와 예술이란 걸 고려한다면 정부 당국은 영화인들의 스크린 독과점 방지 촉구에 대해 더 이상 귀와 눈을 외면하는 행위를 중단하고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다.

뜻있는 영화인들이 2000년 ‘와라나고’ 사태(독립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 ‘라이방’, ‘나비’, ‘고양이를 부탁해’의 스크린을 지켜달라는 운동) 때부터 수없이 지적했지만 이런 식으로 스크린 제한을 포기한다면 어느덧 우리는 홍콩 영화계의 전철을 밟을 것이다.

이런 독과점 배급 구조 아래에서는 독립영화들이 계속 줄어들 것이고, 영화를 만들겠다는 감독과 제작사, 그리고 배급사들은 전부 상영관의 입맛에 맞는 전형적인 상업영화만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에 다양성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며, 영화가 유럽의 색깔을 잃고 오로지 할리우드 포장만 걸치는 것은 명약관화한 수순일 것이다.

플라톤은 ‘국가론’을 통해 국가의 목적과 사명을 정의의 실현이라 규정했다. 자본주의가 대세이긴 하지만 각종 흉악 범죄 및 유명인의 극단적 선택 등을 놓고 사회적, 국가적 책임론이 대두되곤 하는 데서 현재의 시스템이 아직 완벽하지 않다는 걸 깨우치는 건 어렵지 않다.

존 로크는 ‘통치론’을 통해 관용의 원리로서의 자연법을 주장했고 니체는 모든 가치를 예술로 귀결시켰다.

영화는 음흉한 관음증이지만 예술이기도 하다. 시간 때우기지만 문화일 때도 있다. 어느 커플에겐 일상적인 데이트 코스지만 어느 조합에겐 철학의 토론과 사색이기도 하다.

명동 한복판에도 싸구려 가두판매대는 존재한다. 동네 상권 깊은 데까지 대형 마트가 점령한다면 산업은 활성화되고 재벌은 배부를지 몰라도 소규모 상인들은 죽어나갈 것이고 낭만은 사라지며 정서는 황폐해질 것이다.

언제쯤 국가는 제대로 정의 실현에 팔을 걷어붙일 것인가? 정의가 뭔지 제대로 알기는 할까? 모든 공무원에게서 ‘국가론’을 읽을 순 없어도 로크와 루소의 자연법과 니체의 예술에 대한 가치 정도는 기대해도 될 때가 되지 않았을까?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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