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김원봉]

▲ 의열단 : (사진 출처-김문 작가: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의열단이란 무엇인가요

-대강은 알지만 직접 선생남한테 듣고 싶습니다.

“말 그대로 의열단(義烈團)이란 ‘의로움(義)을 맹렬(烈)하게 실행하는 단체’라는 뜻입니다. 고등학교 근·현대사 수업시간에 졸지 않았다면 누구나 들어봤을 터인데...”

-의열단이라는 이름 자체는 아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의열단의 실체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의열단이 전개했던 수많은 의거들 중에서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사건들이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왜 그렇다고 생각합니까.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의열단의 역사와 활동이 자세하게 알리지 못한 것은 김원봉이 월북 인사라는 사실 탓도 있을 것이고 귀국할 때 환영도 제대로 못받았습니다. 더구나 아직까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약산의 생애를 제대로 된 단행본 한 권 출간된 적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독립기념관장을 지낸 김삼웅씨가 나에 대한 평전을 썼더군요. 비교적 자세히 기록했어요. 최근에는 영화도 나오고 만시지탄이지만 관심을 가져주는 것에 대해 늦게나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다음은 김삼웅씨가 쓴 책 ‘약산 김원봉 평전’에 나오는 의열단에 대한 내용이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의열(義㤠)투쟁은 수많은 독립운동 방법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투쟁노선이었다. 가장 적은 희생으로 가장 많은 효과를 올린 것이 바로 의열투쟁이다. 또 수단과 방법, 시간과 장소, 인물과 기관을 가리지 않고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외침과 내우가 유난히 심한 우리나라는 오래 전부터 ‘의열’의 전통이 이어져 왔다. ‘의열’이란 흔히 의사(義士)와 열사(㤠士)를 가리키거나 그들의 특징적인 행동을 의미하는 용어로 쓰인다. 국난기에 관군이 일패도지(一敗塗地, 싸움 한번에 패하여 땅에 떨어짐)하거나 적군에 투항할 때 백성들이 궐기하여 침략자들을 물리치거나 전세를 바꾼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여기에는 장렬한 자기 희생이 따랐다.

▲ 영화 <암살> 스틸이미지 : 조승우(김원봉 역)

의열투쟁은 정규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전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사의 의열투쟁은 최근 세계 각처에서 나타나고 있는 테러와 다른 점은 국권회복과 민주화 요구하는 정의의 실현 방법으로 자신을 희생한 데 있다. 즉 지극히 도덕적인 수단이었다는 점이다.

-의열단의 행동지침은 무엇이었습니까.

“의열단의 공약 1조는 정의의 가치를 실현을 하는 것입니다. ‘천하의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이지요.”

-의열단은 일본에게는 어떤 존재로 인식됐습니까.

“일제 입장에서 보면 공포의 대상이자 가장 골칫거리로 여겼겠지요. 일본 외무대신은 ‘김원봉을 체포하면 즉각 나가사키 형무소로 이송할 것이며 소요경비는 외무성에서 직접 지출할 것’이라고 훈령을 상하이 총영사관에 하달했습니다. 또 1926년대 전반기 의열단의 투쟁역량에 대해 조선공산당은 1926년 3월 코민테른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민족전선에서 직접 투쟁하는 단체는 의열단, 신민부, 통의부밖에 없었다’고 평가를 했습니다. 의열단을 흉내내는 강도사건도 많았습니다. 염인호 역사학자가 쓴 ‘김원봉과 무정’에 보면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의열단의 활동으로 인해 조선에는 웃지 못할 사건까지 발생한곤 했다고 합니다. 강도들이 재물을 빼앗으며 ‘나는 의열단원인데 군자금으로 가져가니 그리 알아라’고 했던 사건이 있는가 하면 충청도 어디에서는 경찰이 좀도둑을 잡아 경찰서에 넘겨놨더니 이놈이 글쎄 ‘나는 의열단이다’하고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자 순경들이 놀라 도망을 갔다는 얘기가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 영화 <밀정> 스틸 이미지

-일제 군경과 관리들에게는 염라대왕 같은 존재로 여겼겠네요.

“언제 어디서 의열단원이 나타나 폭탄을 던지고 권총을 들이댈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하기는 친일파와 악질 지주들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주로 어떤 활동을 예로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의열단은 1920~30년대에 활동을 가장 많이 했습니다. 이 기간동안 의열단은 일제 식민 지배를 전면 거부하는 투쟁을 했습니다. 정규 군사조직에 의한 무력항쟁, 민중 총봉기, 유격전 등을 통해 시의적절하게 기획하고 시도했지요. 예를 들어 박재혁이 부산경찰서장을 폭사시킨 의거(1920), 최수봉이 밀양경찰서를 폭파한 의거(1920), 김익상이 조선총독부에 투탄한 의거(1921), 김익상 등이 상하이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가이치를 저격한 의거(1922), 이인홍과 이기환이 북경에서 일제밀정 김달하를 처단한 의거(1925),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습격한 의거(1926) 등 민족운동의 발전 경로에 뚜렷한 행적을 남겼습니다.” (다음편에서 계속...)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약산 김원봉(이원규, 2005, 실천문학사), 경성의 사람들(김동진, 2010, 서해문집), 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김영범, 1997, 창작과 비평사), 양산과 의열단(박태원, 2000,깊은샘), 약산 김원봉 평전(김삼웅, 2008, 시대의창)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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