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박수룡 원장의 부부가족이야기] 이처럼 ‘불공평한’ 상황에서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상담실에 왔을 때 ‘누구에게 잘못이 있는지, 또 그 사람과 내가 잘 지낼 수 있겠는지 아니면 헤어지는 것이 낫겠는지’를 묻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구원자 환상’에 빠진 사람들은 완전히 다릅니다.

​즉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이 내 말을 잘 들어줄까?”라고 묻거나 “정말 힘이 드는데, 내가 다시 힘을 낼 수 있게 해 달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그녀 자신이나 그 관계 자체에 문제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점에 대해서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혹시라도 상담자가 그런 질문을 하거나 눈치를 챌까 봐 극도로 말을 아끼려 합니다.

사실 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그 사람과의 관계가 끝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자신의 역할이 없어지고, 따라서 그동안 외면해 왔던 자신의 진짜 모습을 마주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자기 자신의 불안과 우울을 마주하기를 회피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로는 상대에게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따라서 문제를 고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혹시라도 그 ‘나쁜 남자’의 잘못을 두둔하는 것처럼 이해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의 잘못과 이들의 치료는 완전히 별개의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이런 문제 상황에 놓여 있다면 그리고 당신이 진정으로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우선 정확한 진단이 필요한 것처럼) 먼저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당장은 대단히 마음이 아프겠지만, 당신 두 사람은 서로를 인격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상대와 그 관계에 대한 ‘중독 상태’에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 자신이 상대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용만 당하고 있었다는 점도 아주 뼈저리게 인정해야 합니다.​​

아마 당신은 이 정도만으로도 몹시 비참한 느낌이 들겠지만, 아직은 끝이 아닙니다. 아직도 더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문제를 인정한 다음에는 자신의 과거를 돌아봐야 합니다.

부모에게서 받은 냉대와 배신감, 그들에 대한 자신의 원망과 분노,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사랑받기 위해서 몸부림치듯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던 비굴함, 당신의 거짓된 웃음들 뒤에 감추어진 눈물과 좌절,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수없이 반복되었던 어리석고 부끄러운 잘못들 등 그야말로 당신의 밑바닥까지 다 드러내어 표현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자신이 그 동안 살았던 것이 (비록 자신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거짓투성이’였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치료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지금 '나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 것은 나 자신일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오랫동안 반복하여 습관이 되어버린 자신의 삶의 태도에서 벗어나 다시 행복을 찾아 나설 수 있습니다.

물론 애써 묻어두었던 기억과 감정을 꺼낸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치료 과정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그 나쁜 남자에게서 벗어나 새로운 삶과 자유로움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서 벗어난다는 ​것이 반드시 상대와 헤어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만, ​그러나 당신이 바뀌면 상대도 달라지거나 혹은 헤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그와 헤어지고 새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당신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관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이처럼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새 사람을 만나더라도 당신은 이전의 경험을 반복할 위험이 큽니다. ​즉, 당신이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한 사람을 만나서 사랑에 빠졌다고 믿고,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 사람에게 매달리는 관계를 계속 반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혹시 당신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인데도 그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나아가 그 사람에게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혼을 결심한 이유가 ‘나밖에 이 남자를 구원해 줄 수 없다’ 라면, 어쩌면 ​당신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당신의 행복이야말로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니까 말입니다.

▲ 박수룡 라온부부가족상담센터 원장

[박수룡 원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서울대학교병원 정신과 전문의 수료
미국 샌프란시스코 VAMC 부부가족 치료과정 연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겸임교수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
현) 부부가족상담센터 라온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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