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끝으로 은퇴하겠다던 켄 로치 감독이 83살에 내놓은 ‘미안해요, 리키’는 어쩌면 다니엘의 젊은 시절의 얘기일 수도 있겠다. 데뷔 이후 신인 배우 캐스팅과 다큐멘터리 기법의 촬영을 고수해온 연출 스타일과 노동 계급을 향한 관심이 백미를 이룬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로 노던록은행이 파산하자 건축회사를 다니던 리키는 실업자가 된다. 이후 막노동 등 안 해본 일 없이 일용직을 전전했지만 빚을 갚을 길이 없자 비정규직 택배기사가 된다. 매니저 멀로니는 일하는 만큼 벌 수 있는 자영업자라는 감언이설로 기사들의 노동력을 착취한다.

리키의 아내 애비도 정해진 시간 없이 일한 만큼 시급을 받는 임시직 제로아워 계약으로 간병인 일을 한다. 리키가 기사를 하려면 밴이 있어야 하기에 자신의 차를 팔아 계약금을 치르도록 한 뒤 걸어 다닌다. 11살인 딸 라이자를 돌봐주지 못하는 게 제일 안타깝지만 돈을 버는 게 녹록지 않다.

하이틴인 세브는 학교 수업을 빼먹고 껄렁한 친구들과 건물에 그라피티 작업을 하며 살아간다. 어느 날 경찰서로부터 세브가 페인트를 절도한 죄로 붙잡혔다며 전화가 걸려온다. 또 학교에선 폭력을 휘두른 이유로 정학을 받는다. 리키는 세브와 크게 갈등하고, 이를 말리던 애비와도 크게 다툰다.

라이자는 아직 어리지만 이런 가족을 바라보며 혼자만 훌쩍 자라 ‘애어른’이 됐다. 그녀는 어떻게든 예전의 화목했던 가족으로 되돌리고 싶은데. 리키가 원하는 건 자신의 집 한 채 갖는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가족에게 떳떳하고 가족 모두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다. 몸이 부서져라 일하는 이유다.

멀로니는 리키에게 “당신은 우리를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우리와 함께 일하는 것”이라며 회사와 동업자인 자영업자 개념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죽도록 일하라는 뜻이다. 하루 결근하면 100유로의 벌금을 비롯해 벌점 등 각종 페널티가 부과된다. 아파도, 가족에게 돌발적인 사고가 생겨도 안 된다.

카메라는 주인공들의 시선과 맞추거나 살짝 위에서 돌아간다. 과도한 부감이나 앙각은 없다. 허울만 좋은 민주주의, 즉 민주주의의 탈을 쓴 극도의 자본주의를 뜻한다. 인권은 동등하기에 모든 사람은 평등할 권리가 있다고 소리치지만 사실 영국의 제국주의와 산업화가 만든 자본주의는 불평등하다.

서민은 ‘개천에서 용 난다’고 믿으며 언젠가 재벌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있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계급은 정해져있고, 부자의 깔보는 시선과, 부자와 동등하게 보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서민의 운명은 정해져있다는 카메라 워킹. 로치의 빈민 계급에 대한 애정은 여전하다.

리치는 실직 후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는 가운데 심지어 무덤도 파봤다. 짜증 나게 하는 상사 때문에 셀 수 없이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실업수당을 받은 적은 없다. 마지막 자존심만큼은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택배기사가 자영업자라는 사탕발림에 넘어간 배경이기도.

택배기사의 애로사항을 보여주는 여러 시퀀스는 우리와 다르지 않다. 교통난에 애태우고, 주정차 위반 단속에 속 끓이며, 진상 고객 탓에 울화통 터진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힘들게 하는 인물은 멀로니다. 오로지 윗선에 잘 보일 궁리만 하는 그는 기사들을 사람이 아닌 기계나 노예 취급을 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나는 개가 아니고 사람”이란 대사가 연상된다. 일주일에 6일간 매일 14시간씩 근무한다. 잠자고 출퇴근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항상 현장에서 뛰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헉헉대며 사는 부모에게서 자식들이 뭘 배울까? 세브는 리키에게 “대학 가면 빚지고 살 뿐”이라고 반항한다.

리키는 할 말이 없다. 엄연한 사실이다. 이에 더해 세브는 “아빠가 선택한 거잖아”라고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 너무 힘들어서 “사는 게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고 애비에게 하소연한다. 애비는 “난 악몽을 꿔”라고 맞장구친다. 부자와 빈자의 삶은 확연하게 다르다. 그건 악몽이 아닌 냉엄한 현실이다.

라이자는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고 탄식하고 세브는 예전의 아빠로 돌아오라고 호소한다. 대영제국의 영광은 옛날에 머물 따름이란 환유다. 리키는 배달 중 한 고객과 축구팀을 놓고 다툰다. 영국이 그토록 열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축구팀마저 미국, 러시아 등에 팔려나간 허탈이 영국의 현주소다.

마르크스가 위대한 이유가 공산주의(사회주의)란 매우 이상적인 유토피아를 설계했다는 데 있다면 다소 성급했던 배경은 자본주의를 거쳐 자연스레 사회주의-공산주의로 발전해간다는 천기를 누설함으로써 자본가들이 미리 야합해 사회주의의 싹을 잘라버리게끔 단초를 제공했다는 데 있지 않을까?

그는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본다.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을 고무하면서도 권력 집중은 우려했고, 사유 재산은 불인정하면서도 개체적 재산으로 가족의 행복은 권장했다. 리치를 통해 로치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그와 유사하다. 대단한 권력도 부도 아닌, 요즘의 ‘소확행’이다.

마지막 리키 가족의 시퀀스는 이 땅의 모든 노동자들에게 바치는 헌시 같다. 북받치는 동료애적 공감에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콧등이 시큰해지지 않을 노동자는 없을 것이다. 그 어떤 걸작보다 두고두고 회자될 애통하고 처절한 비탄의 신. ‘1987’의 속편이자 ‘기생충’의 또 다른 버전이다. 19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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