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김원봉]

▲ 영화 <암살> 스틸이미지 : 조승우(김원봉 역)

천장절 행사때 반일 행동

-어릴 때부터 일찍 일본식 교육을 받게 됩니까.

“3년동안 서당에서 공부한 것 말고는 그렇게 됐습니다. 하지만 일본어 수업시간에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항일의식이 강했다고 할까요. 그러던 중 학교에서 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1911년 4월29일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 행사가 학교에서 거행됐는데 나는 행사를 위해 준비한 일장기를 학교 화장실에 처박아버렸습니다. 학교는 온통 난리가 났고 나와 윤세주는 학교를 자퇴했습니다. 그후 밀양 읍내에 있는 동화중학교 2학년에 편입했습니다. 여기에서 일생의 지침이 되는 훌륭한 스승과 동지를 만나게 됩니다, 그중 한 명이 전홍표 교장이었습니다. 애국정신이 남달리 강한 민족주의자였던 나와 윤세주에게 민족혼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어떤 얘기를 들었습니까.

“예를 들어 이런 말씀을 자주 했습니다. ‘우리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강도 일본과의 투쟁을 단 하루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빼앗긴 국토를 다시 찾고 잃어버린 주권을 회복하기 전에는 우리는 언제나 부끄럽고, 언제나 슬프고, 비참한 것이다. 미래는 너희들 것이다. 너희들이 분기하지 않고 대체 누가 조국 광복의 대업을 이룰 것이랴.’고 강조했지요.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가슴깊이 들어와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나는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항일투쟁에 적극 나서게 됐습니다. 윤세주와 함께 연무단을 만들어 체력단련에 힘을 썼습니다. 앞으로 어려운 일을 하려면 체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지요. 한겨울 새벽에도 마을 뒷산을 오르내렸고 냉수욕을 자주 했습니다. 새끼줄로 만든 공으로 축구를 하고 친구들과 씨름도 했습니다. 이와 함께 교장 선생님이 구해다 준 책으로 한국의 역사와 지리, 중국의 병법 등을 공부했습니다. 개천절이면 친구들을 불러모아 개천가를 부르며 교정을 행진하고 마을 사람들에게도 그 뜻을 알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행동이 일본 경찰에 포착됐습니다. 전홍표 교장을 위험인물로 지목하고 학교를 폐쇄했지요. 눈물을 머금고 교장 선생님과 이별을 하고 서울로 올라갔지요. 그런데 금방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서울에는 할머니 언니되시는 분이 있었는데 여승으로 대단히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남들은 하루 세끼 식사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 처지인데 그 할머니와 주위 사람들은 딴 세상 사람처럼 살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반감이 생겼고 고향으로 내려와 표충사에서 1년동안 머물면서 손자, 오자 등 각종 병서를 접하고 조국광복에 필요한 무장투쟁 이론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다가 서울로 다시 가게 되지요.

“1915년 두 번째 서울로 가서 중앙학교 2학년에 적을 두게 됩니다. 그때 집안사정이 좋지 않아 고모부 황상규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고모부는 대한제국시기 창신학교와 밀양 고명학교를 설립했으며 대한광복회를 창설하고 의군부 중앙위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1919년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했고 의열단이 결성될 때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내가 중앙학교에 재학중일 때 웅변대회에서 ‘사회발전은 종교에 있느냐, 교육에 있느냐’라는 제목으로 연단에 섰는데 연설이 감명 깊었다고 하더군요.”

▲ 영화 <암살> 스틸 이미지

-학교 다닐 때 전국으로 무전여행을 따났다고 돼 있습니다.

“일제는 조선병탄과 더불어 항일세력을 뿌리뽑고자 1911년 신민회 사건을 날조해 700여명의 민족운동가들을 구속했습니다. 평안도와 황해도룰 비롯한 서북지역 기독교 인사들이 주로 검거되었는데 그중 105명이 5년 이상의 유죄판결을 받게 됩니다. 이로 인해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를 조직해 일제와 격렬하게 싸웠지요. 이 무렵 계룡산, 지리산, 경주, 부여 등 전국을 다니면서 군대를 양성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실하게 생각했습니다. 하루빨리 군대를 조직해 훈련을 하고 싶었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내 자신이 군사학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독일이 가장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독일에서 공부를 하고 싶었습니다. 먼저 독일어를 공부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중국 천진에 독일인이 경영하는 덕화학당이라는 중학교가 있는 것을 알게 됐고 그래서 천진으로 향했습니다.”

-여비와 학비 마련은 어떻게 했습니까.

“한봉인이라는 벗이 있었습니다. 나의 뜻을 그에게 알리자 친척집 금고에서 몰래 돈을 꺼내 오기도 하고 자신의 월급을 합쳐 여비와 학자금을 마련해주었습니다.”

-돈을 훔쳤다는 것입니까.

“엄밀히 말하면 그렇지요. 그 놈은 내 뜻을 듣더니 그런 짓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뜻한 대로 덕화학당에 입학했네요.

“1916년 10월의 일입니다. 나이가 19세 때입니다. 우선 현지 언어를 익히기 위해 독일어보다 중국어를 배웠습니다. 이듬해 여름방학때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안동현(중국 단동)에서 손일민, 김좌진 등 독립운동가를 만났습니다. 이들은 광복회 회원으로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얘기를 듣고 다시 한번 투쟁의욕을 되새기게 됩니다.”

▲ 영화 <밀정> 스틸 이미지

-고국으로 돌아온 다음에는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한국에 와 있는 동안 국제정세가 급변했습니다. 중국은 마침내 연합국측에 가담하고 독일과 이탈리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게 됩니다. 1914년 7월에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중국과 독일간에는 적대관계가 되고 중국에 있는 독일인들은 모두 추방됐지요. 때문에 덕화학당도 폐쇄되고 말았습니다. 독일에서 군사학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은 없어지게 됐지요. 이때 중앙학교 재학시 만났던 김약수와 이여성과 다시 만나게 됩니다. 새로운 계획을 세웠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새로운 국제질서가 형성되면서 러시아에서는 1917년 10월 혁명이 일어나 프로레타리아 해방론이 거세게 전파되고 있었습니다. 나는 중국으로 건너가 무장세력을 만들어 일제와 싸우기로 했습니다.”

-중국 어디에 가게 됩니까.

“그러니까 1918년 9월입니다. 중국 남경으로 향했지요. 독립운동을 하기에는 중국이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약수, 이여성과 함께 출국했습니다. 이후 27년동안 해방후 환국할 때까지 중국 중원을 돌아다닙니다. 우선 남경에 있는 금릉대학에 입학해 영어를 배웠습니다. 앞으로 국제질서가 미국, 영국 등으로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독일과 이탈리아가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휴전을 제의한 것은 그해 10월 3일입니다. 뒤이어 11월 4일에는 독일에 혁명이 일어나고 5일 뒤 11월1일에는 마침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에 걸맞는 계획을 세웠지요.”

▲ 영화 <밀정> 스틸 이미지

다음은 김원봉, 김약수, 이여성과 세운 세가지 계획이다.
1. 서간도로 가서 군대를 조직하는 일이다.
2. 상하이에서 잡지를 발간하는 일이다. 잡지 이름을 적기(赤旗)라고 한다.
3.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는 일이다.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됐습니까.

“때 마침 그 무렵에 상하이 금릉대학에서 서병호가 왔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상하이에서는 여운형, 이광수 등이 모여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키 위해 ’신한청년단‘을 결성하려고 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운형 등은 강화회의에 대표를 보내서 외교정책을 쓰자는 것이었습니다. 각국의 대표들과 만나서 피압박민족의 설움을 호소하고 열국의 동정을 얻어 국토와 주권을 회복하자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나는 그들과 생각이 달랐습니다. 국가존망과 민족사활 같은 큰 문제를 외국인에게 호소한다는 것은 결코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비현실적이라는 것이지요. 일본이 패전국이 아닌데 조선독립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지요. 그래서 나는 외교사절이 아니라 자객을 보내 일본대표를 암살하여 조선민족의 혁명정신을 세계만방에 알리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자객은 누구를 보냈습니까.

“4년 전 부산 여행 중 만난 김칠성에게 지시했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중학을 마치고 중국으로 건너와 오송동제대학에 다니고 있었고 김일이라는 가명으로 활동중이었습니다. 나이 스물셋이었지요. 김칠성은 권총과 여권을 구해 파리로 건너갔습니다. 기회를 노리던 중 막상 가방을 풀어보니 권총과 실탄이 없어졌습니다. 누군가 뒤를 밟아 권총을 훔쳐간 것입니다. 할 수 없이 신변의 위험을 느낀 김칠성은 파리를 서둘러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권총을 훔쳐간 사람은 파리에 와 있던 같은 동포였습니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약산 김원봉(이원규, 2005, 실천문학사), 경성의 사람들(김동진, 2010, 서해문집), 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김영범, 1997, 창작과 비평사), 양산과 의열단(박태원, 2000,깊은샘), 약산 김원봉 평전(김삼웅, 2008, 시대의창)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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