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허진호 감독이라면 ‘봄날은 간다’(2001)가 거론됐지만 이제 ‘천문: 하늘에 묻는다’로 바뀔 듯하다. ‘남자들의 우정으로 이런 멜로를 만들면 반칙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만큼 콧등이 시큰하고 눈시울이 뜨겁다. 1422년 즉위 4년 된 세종(한석규)은 문무대신 이천(김홍파)이 내민 그림에 관심을 갖는다.

코끼리를 주제로 한 물시계다. 세종은 그 그림을 그린 장본인이 장영실(최민식)임을 알고 그를 직접 대면한 뒤 마음에 흡족해 지근거리에 두고 친하게 지내며 전격 지원한다. 이천은 일찍이 관노인 영실의 뛰어난 재주를 알아보고 그를 밑에 두고 부렸다. 세종은 면천해주고 정5품의 벼슬을 내린다.

영실이 자격루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정확한 시각을 알려줄 수 있게 되자 세종은 기뻐하며 그에 대한 믿음을 굳건하게 다진다. 세종은 영실을 침전에 들일 정도로 가깝게 지내고 조정의 헤게모니를 쥔 영의정(신구)과 문무대신 정남손(김태우)은 노골적으로 영실을 견제하면서 사사건건 간섭한다.

세종은 명나라의 천문과 조선의 하늘의 흐름이 맞지 않아 농사에 어려움이 많다며 영실에게 우리 실정에 맞는 천문의기를 만들도록 한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명에서 이를 알고 사신을 보낸다. 황제는 사대의 예를 어겼다는 이유로 천문의기를 파괴하고 영실을 명으로 압송하라는 칙서를 내린다.

세종이 영실의 신분을 상승시켜주자 조정의 전 신하가 크게 반발한다. 영의정은 꽤 능글맞게 나오고 세종은 슬며시 공을 그에게 던지는 영악한 정치 수완을 발휘한다. 이 영화에서 재미의 핵심은 이렇게 ‘밀당’을 하는 ‘세종 vs 영의정’의 구도에서 안여의 바퀴가 빠져 세종이 크게 다칠 뻔했던 사건이다.

1442년 3월 20일. 명의 사신은 남손의 극진한 대접 속에 영실을 명으로 압송하는 중이었고, 세종은 조정을 영의정에게 맡긴 채 안여를 타고 외유 중이었는데 그 호화롭고 튼튼한 임금의 마차의 바퀴가 빠진다. 그런데 조사해보니 누군가 일부러 고장 낸 흔적이 역력하다. 왕을 죽이려 한 역모 사건.

세종은 임시로 마련된 ‘캠프’로 이천을 불러들여 문무대신 조말생(허준호)을 만나라는 은밀한 지시를 내린다. 선왕 태종 시절의 장수인 말생은 늙어서 벼슬을 내려놓고 낙향하려 했지만 세종이 붙잡아두고 있던 터. 그는 세종이 하사한 검을 앞장세워 이 사건의 진범을 찾기 위해 ‘특검’ 활동에 나선다.

우선 안여를 제작한 영실, 그리고 영실이 떠난 뒤 안여를 관리해온 선공감의 관리들이 첫째 용의자다. 조정의 신하 중 누군가 명과 내통했을 가능성도 있다. 말생은 남손의 측근들의 자금줄을 뒤진다. 과연 진범은 누구인지, 그런 행위의 목적은 어디에 있는지 미스터리를 즐기는 지적 재미가 꽤 크다.

이토록 굉장히 정치적인 작품이다. 그 어떤 일보다 정의로워야 할 정치가 오직 이기심만 앞세우기에 정정당당하지 못하고 각종 권모술수와 암수가 난무한다는 걸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런 이전투구 속에서 피어난 세종과 영실의 우정은 처절하면서 우아하다. 그들의 공명심은 숭고하고 아름답다.

클라이맥스의 반전이 하이라이트겠지만 초반의 침전 시퀀스와 궁의 마당에 둘이 눕는 시퀀스도 명불허전이다. 어느 비 오는 밤 세종은 내관을 시켜 영실을 침소로 들게 한다. 세종이 별을 보고 싶다고 하자 영실은 창호지에 먹칠을 하고 불을 끈 뒤 내관에게 촛불 하나를 들려 문 건너편에 세운다.

어느 맑은 날 밤 궁 야외에 돗자리를 깐 세종은 영실을 불러 옆에 함께 눕도록 한다. “저 많은 별들 중에 내 별은 어디 있을까?” “저 북극성이옵니다” “네 별은 어디 있느냐?” “소인은 별이 없습니다. 천출은 죽어서도 별이 될 수 없으니까요” “저기 내 별 옆에서 빛나는 별 저게 오늘부터 네 별이다”

왕 노릇을 하려면 종일 내려다볼 수밖에 없다. 노비는 누구를 대하건 고개를 쳐들 수 없다. 그런데 왕과 노비 출신이 땅바닥에 나란히 누워 함께 하늘을 올려다본다. “천출이 별을 어떻게 갖냐”고 영실이 당황해하자 세종은 “신분이 무슨 소용이냐? 같이 보고 같이 꿈꾸는 게 중요하지”라고 답한다.

제목은 ‘우주와 천체의 온갖 현상과 그에 내재된 법칙성’의 天文과 ‘하늘에 묻는다’의 天問이란 중첩적 의미다. 전자는 우주의 질서(코스모스)고 후자는 혼돈(카오스)에 대한 세종의 한탄과 영실의 탄식을 질문으로 표현했다. 위대한 성군 세종은 사대부가 독점한 문자를 온 백성에게 나눠주려 했다.

문자는 지식이고, 지식은 곧 권력이다. 사대부가 그들의 밥줄을 백성과 공유하려 할 리 만무했다. 당연히 강력한 반발이 일었다. 그토록 세종은 오로지 백성만을 위해 고뇌하고 치열하게 싸웠다고 역사는 전한다. 영의정은 기득권 세력 입장을 대변하고, 남손은 이기적이라 세종보다 명의 눈치를 본다.

영실이 조선의 시간을 만들고 하늘의 문을 열었다면 세종은 그런 그의 꿈이 이뤄지도록 지원했다. ‘왜 그리 힘든 길을 혼자 가려 하냐’는 영실의 위로에 세종은 외려 ‘혼자긴, 자네 같은 벗이 있지’라며 영실을 달랜다. 세종과 영실의 우정은 하이데거의 횔덜린을 향한 무한한 존경심과 애정과 같다.

그는 횔덜린을 ‘시인 중의 시인’이라며 추앙했다. 세종과 영실은 그런 공경과 애정을 통해 인권이 파편화된 시대에 승화된 우정으로 평등사상을 완성했다. 이제 남은 건 ‘누구나 읽고 쓰는 공평한 세상’이라는 세종의 마지막 희망. 그들이 받아 쥔 적자 계산서는 결국 백성에겐 인권이었다. 26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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