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총 제작비 260억 원의 ‘백두산’(이해준, 김병서 감독)은 일단 재난 블록버스터가 갖춰야 할 장대한 규모, 비주얼, 재미는 풍부하다. 킬링타임용으로는 흠잡을 데가 없다. 특히 절정에 오른 이병헌과 나름의 변화를 꾀한 하정우의 캐릭터 설정, 그리고 마동석의 낯선 우유부단한 지식인 연기는 빛난다.

한반도 최고도의 산 백두산의 31회 분화 중 고려시대에 발생한 밀레니엄 분화는 화산폭발지수 7의 대규모 폭발이었다. 미사일 해체 전문가인 EOD의 대위 조인창(하정우)은 전역을 하루 앞두고 만삭인 아내 최지영(배수지)이 기다리는 집으로 가던 중 강남역 일대에서 엄청난 지진과 맞닥뜨린다.

백두산이 지수 8의 분화를 일으킨 것. 서울 한복판이 갈라졌을 정도니 북측은 초토화됐다. 청와대 민정수석 전유경(전혜진)은 재미동포 지질학 교수 강봉래(마동석)를 찾아간다. 오랫동안 백두산을 연구한 봉래는 백두산이 연쇄 폭발을 일으켜 한반도를 초토화시킬 연구 결과를 보여주며 경고한다.

합참지휘통제본부는 봉래의 조언을 듣고 인창을 포함한 미사일 해체팀을 북에 보내 핵무기에서 우라늄을 분리해 기폭장치에 장착한 뒤 백두산의 특정 마그마방에서 터뜨림으로써 한반도를 구한다는 작전을 짜고 2개 팀을 투입한다. 그런데 1개 팀이 사고로 전멸하지만 여건상 지원은 불가능하다.

국정원은 수감 중인 북한 무력부 소속 일급 요원 리준평(이병헌)을 구출해 핵무기 저장고까지 안내를 받으라고 지시한다. 북측의 병력은 최소 인원만 남고 대부분 철수한 터라 준평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중스파이인 그의 속내를 알 길 없어 인창과 팀원들은 번번이 골탕을 먹는데.

인트로의 강남역 일대의 고층빌딩이 줄줄이 무너지고 도로가 갈라지는 시퀀스는 ‘맨 오브 스틸’이 부럽지 않을 만큼 스펙터클하다. 내내 그 수준인 비주얼은 1만 원 이상의 제값을 한다. 재난 영화에서 깊이 있는 메시지나 듬직한 철학을 발견하기 힘들다는 한계만 감안한다면 훌륭한 팝콘무비다.

북측 소속이지만 개인적인 이유로 남측의 끄나풀 노릇을 하면서 중국 마피아와 얽혀있는 준평과 남측의 전형적인 샐러리맨 개념을 가진 젊은 남편 인창.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희망을 발견하지 못해 미국을 선택한 봉래와 한국에 미련을 가진 유경과 지영. 이 2개의 인물 구조가 재미있다.

준평은 살인기계다. 남측 정보에 훤하고 중국 마피아 인맥도 좋다. 그러나 결국 그도 사람이다. 아내와 어린 딸이 있는데 누군가의 밀고로 이중첩자 행동이 드러나 수용소에 수감됐다. 그 사이 그의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다. 아내는 마약중독자가 됐고, 딸은 가출해 거리에서 방황하는 거지가 됐다.

인창은 직업군인이다. 생계를 위해 군대에 간 것. 그런데 전역을 하루 앞두고 목숨을 건 작전에 투입된다. 내내 “하루 앞두고”를 뇌까린다. 만삭의 아내의 배를 어루만지며 아들일지, 딸일지 행복한 기대감을 키우며 하루하루를 보낼 안락한 삶이 보장돼있었는데 불과 하루 차이로 그 지경이 됐다.

준평은 서늘하고 어두운 사람이라면 인창은 해맑고 정석적인 인물이다. 준평은 말 한마디로 상대방을 제압하고, 인창은 위협적인 말 한마디로 상대방을 웃긴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이수혁(이병헌) 병장이 떠오르는 인창이다. 준평은 남북 분단의 상황이 만들어낸 괴물이지만 우리 민족인 건 맞다.

봉래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다. 한국에서 희망을 볼 수 없기에 미국으로 귀화했지만 수년째 백두산 분화를 연구했다. 한국을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라는 뜻이다. 외모는 한국인, 국적은 미국인이란 설정은 전형적인 박쥐 행동을 낳는다. 평상시엔 한국말로 대화하지만 위기 땐 못 알아듣는 척한다.

마동석의 단골 캐릭터는 조폭, 조폭 같은 형사 등 물리적인 힘을 과시하는 인물이었는데 여기선 그런 색깔을 모두 표백시키고, 인텔리지만 양심과 이기심 사이에서 고뇌하는 코믹한 인물로 설정됐다. 준평과 인창, 봉래와 지영, 봉래와 유경 사이엔 팽팽한 긴장감이 조성되지만 그만큼 유머도 넘친다.

한국, 미국, 중국 등을 둘러싼 첨예한 외교 갈등 등 민감한 정치적 문제가 긴장의 핵심이다. 한반도의 전시작전통제권을 쥔 미국은 한국이 제멋대로 북의 핵을 탈취해 중국과 연결된 백두산에서 터뜨리려는 데 기함한다.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그들의 정치적 테제에 반하는 끔찍한 행동이다.

미국은 주한미군 등에게 긴급 소개 명령을 내린다. 인창의 도움으로 미국행 피난길에 오르게 된 지영은 그러나 승선 심사 때 미국인이 모두 승선한 다음에 탑승하라는 제지를 당한다. 당연한 절차긴 하지만 오늘날의 한·미 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시퀀스이기에 부아가 치미는 건 어쩔 수 없다.

이 작품은 천편일률적인 재난 블록버스터의 구문론을 따라 해피엔딩의 기승전결로 흐르지만 사실 그 행간에 담긴 여운은 그다지 밝지만은 않다. 백두산의 폭발의 피해를 최소화해 남측을 살릴 가능성은 3.38%다. 미국은 인창의 팀에게 총질을 해대며 그 작전을 제지한다. 픽션이지만 극현사실적이다.

준평은 “왜 이렇게 말랐니? 옷이 큰 건가”라고 중얼거린다. 북의 끝에 있지만 민족을 상징하는 백두산. ‘긴박하고 절망적인 현실은 분단이 만든 것인가, 우리가 만든 것인가’라는 인식론. “뒤돌아보지 말라”고 주문하는 준평과 “이 나라에 미련이 생겼다”는 봉래가 공존하는 서글픈 한반도. 19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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