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김원봉]

▲ 의열단 : (사진 출처-김문 작가: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무오독립선언서

-그 이후로는 어떻게 됩니까.

“1918년 11월 13일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선언서로 알려진 ‘무오독립선언서’가 중국 길림에서 선포되었습니다. 여준, 김동삼, 유동설, 김좌진, 신팔균, 서일, 김규식, 이동녕 등 중광단(重光團) 인사들을 중심으로 만주, 러시아, 미국을 비롯해 해외의 망명운동가 39명의 이름으로 발표된 것입니다.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의 성과를 바탕으로 독립전쟁을 통한 독립운동노선을 주창했던 것이지요. 이것은 나의 철학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기분이 한껏 고조되었지요. 이듬해 2월 이여성과 함께 남경을 떠나 봉천으로 가게 됩니다. 길림에 가 있는 김약수로부터 봉천여관으로 빨리 와 달라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군대를 조직하려면 농토가 있어야 했고 김약수는 농토를 구하려고 먼저 길림을 갔었지요. 그러던 3월 1일 고국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중국의 신문들이 한국에 3.1운동이 일어났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기분은 어땠습니까.

“처음에는 가슴 하나로는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며칠을 기거하며 나중에 독립선언서를 읽었는데 무력항쟁이 아니라는 점에서 조금은 실망했습니다. 무기없이도 강도 일본을 물리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지요. 일제에 맞서기 위해서는 매우 조직적이고 강력한 무장단체가 더욱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그럴 즈음 김약수와 이여성은 국내 조직의 부름을 받고 귀국하고 혼자 길림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길림에는 의군부라는 것이 조직돼 있었는데 주석에 여준, 군무부장에 김좌진, 중앙위원에 손일민, 황성규 등이 있었습니다.”

-황상규는 고무부 아닌가요.

“맞습니다. 호를 백민이라고 하여 활동했습니다. 나에게는 고모부되는 사람으로 어린 시절 많은 감화를 준 분이고, 손일민과 김좌진은 안동현에서 만나 깊은 얘기를 한 사람이지요. 나를 보더니 반가워하면서 기꺼이 같이 일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뜻을 같이 하기엔 미심쩍었습니다. 왜냐 하면 나는 무력무쟁을 위한 총과 폭탄이 필요했는데 그걸 것을 구입하려면 마적과 상대해 돈을 주고 사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지요.”

다음은 박태원이 쓴 ‘약산과 의열단’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나 약산은 새로 얻는 몇몇 동지들과 더불어 길림을 떠나 서간도로 향했다.

일행 가운데 한 명의 중국인이 끼여 있었다. 그는 호남 출신의 주황(周況)이라는 사람으로 폭탄제조기술 교관이었다. 약산은 자기의 새로운 설계를 위해 동지들과 함께 우선 폭탄제조법부터 배우려 한 것이다.

주황은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었다. 그도 저의 나라를 근심하는 혁명가의 한 사람이었다. 당시의 그의 나이 40. 멀리 상하이로부터 그를 초빙하여 길림에 이른 것은 김동삼이란 사람이다. 그도 지사였다.

당시 서간도에는 조선인 자치기관으로 부민회라는 것이 있어 정부 행사를 하고 있었다. 이 부민회에서 신흥학교를 경영했다. 합방 후에 창립된 무관학교였다. 뜻 있는 청년들이 많이 이 학교를 찾아와서 군사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이때의 신흥학교장은 이천민으로 충무공의 종손이었다.

약산은 이곳에서 여러 동지와 만났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폭탄제조법을 주황한테 배운 것이다. 그해 11월 9일 밤 의열단이 탄생하게 됐다.

-의열단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일제타도와 조국광복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의로운 피를 흘리려 한 열혈남아들이었습니다. 일제 식민지 통치의 근간을 하나씩 제거하는 것이 당면 행동목표였고 폭탄이나 총기 등을 사용한 파괴와 암살이 구체적인 행동방법이었습니다. 식민지 지배의 정치기관과 수탈기구, 선전기관, 폭압기구들을 남김없이 파괴하고 식민지 통치기구의 수뇌와 요인, 민족반역자 부류를 계속해서 암살 응징함으로써 마침내 일제가 식민지 경영을 스스로 포기하겠끔 하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약산 김원봉(이원규, 2005, 실천문학사), 경성의 사람들(김동진, 2010, 서해문집), 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김영범, 1997, 창작과 비평사), 양산과 의열단(박태원, 2000,깊은샘), 약산 김원봉 평전(김삼웅, 2008, 시대의창)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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