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좀 봤다는 마니아에게 가장 빈번하게 걸작으로 손꼽히는 ‘시네마천국’을 연출한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이 1998년에 내놨고, 우리나라엔 4년 뒤 개봉됐던 ‘피아니스트의 전설’이 4K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새해 첫날 재개봉된다. 음악이 강화된 ‘시네마천국’을 보는 듯한 감동과 감격의 파도다.

1990년. 대형 증기선 기관실에서 일하는 대니는 승객들이 하선하자 돈이 될 만한 것을 찾아 일등석 연회장을 뒤지다 피아노 위에 놓인 박스 안에 누운 갓난아이를 발견한 뒤 나인 헌드레드(팀 로스)라고 이름을 붙여 키운다. 나인이 8살 때 대니는 사고로 죽고, 나인은 피아노에 큰 관심을 보인다.

늦은 밤 선원 한 명이 급하게 선장을 깨운다. 선장 및 전 선원은 일등석 연회장 피아노에 앉아 놀라운 천재적 실력을 보이는 나인을 발견한다. 그 후 19년이 지날 때까지 나인은 단 한 번도 하선하지 않는다. 신분증이나 비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나인의 소문을 듣고 트럼피터 맥스가 승선한다.

그들은 밴드에서 콤비를 이뤄 즐거운 나날을 보내면서 각별한 우정을 쌓는다. 어느 날 재즈를 창조했다는 피아니스트 젤리가 피아노 배틀을 제안해 승객들은 물론 전 언론이 시선을 집중한다. 승부를 놓고 도박이 벌어져 맥스는 당연히 나인에게 걸지만 왠지 나인은 평소와 달라 패색이 짙어지는데.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주는 친구이자 든든한 보호자였던 알프레도 아저씨가 사망하자 고향을 찾은 토토가 과거를 회상하는 ‘시네마천국’과 유사하게 맥스의 회상 시점에서 펼쳐진다. 맥스는 육지에 정착해 중년이 됐지만 가난 탓에 트럼펫을 팔려고 악기상점에 들어와 주인 영감과 흥정을 한다.

그렇게 트럼펫을 판 맥스는 그러나 아쉬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연주하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맥스의 연주를 듣던 영감은 깜짝 놀라 낡은 LP 한 장을 돌리는데 맥스와 똑같은 곡의 피아노 버전이다. 영감은 이 놀라운 피아니스트가 누구냐고 묻고 맥스는 세상에 존재하지만 없는 사람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맥스가 24살에 승선해 6년간 나인과의 우정을 쌓은 에피소드를 영감에게 들려주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심한 폭풍으로 배가 요동치는데 고정쇠를 풀어 이리저리 휘청거리는 피아노 앞에 앉아 아무렇지도 않게 연주하는 나인을 보고 맥스가 놀라지만 이내 마음이 통하는 시퀀스는 장쾌하다.

나인의 실력에 매료된 승객 중 한 노신사는 “어느 날 낯선 곳을 돌아다니다 어떤 언덕에 가게 됐고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바다의 목소리를 듣고 세상이 무한하다는 걸 깨달아 새 출발을 하기로 했지”라고 말한다. 나인은 음반사와 계약을 맺고 레코딩을 하던 중 창밖으로 본 한 여자에게 반한다.

그 여자는 그 노신사의 막내딸 퍼든(멜라니 티에리)이었다. 나인은 그녀에게서 받은 영감으로 눈부신 발라드를 즉석에서 작곡해 녹음하지만 이내 그를 빼고 음악만 밖에 내보낼 수 없다며 LP를 회수한 뒤 퍼든에게 선물하려 하지만 실패하자 파괴한다. 영감이 보유한 건 바로 그 깨진 LP를 붙인 것.

맥스는 은퇴한 그 낡은 증기선을 폭파한다는 소식을 듣고 관리자를 졸라 승선해 나인을 찾지만 발견 못 한다. 그러자 몰래 악기상점에 들어가 LP를 훔치려다 영감에게 들킨다. 사정을 들은 영감은 LP와 플레이어를 흔쾌히 내주고 녹슬고 거미줄투성이인 폐선 안에서 아름다운 연주가 울려 퍼진다.

퍼든을 만난 이후 나인은 딱 한 번 세상에 나가려고 했었다. 트랩의 계단을 반쯤 내려갔을 때 문득 그는 걸음을 멈추고 뉴욕의 마천루들을 한참 동안 쳐다보더니 모자를 벗어 던져버리곤 발걸음을 돌려 승선했던 것. 나인은 본 것 때문이 아니라 보지 못한 것 때문에 두려워서 하선할 수 없었다.

나인이 살아온 세상은 88개의 건반, 꽤 크지만 끝은 보이는 유람선이었다. 원인과 결과, 시작과 끝이 확연한 세계였다. 그는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를 믿고, 동양의 운명론에 인생을 맡기고 있었다. 88개의 건반으로 창조한 무한한 음악 세계는 예측이 불가하지만 세상만큼 위험하진 않아 평안했다.

그가 흑인 양부 슬하에서 자라 피아노로 세상과 소통하게 됐고 그 과정에서 한 인생 스승의 딸을 연모하게 된 모든 건 예정된 조화다. 미리 신이 그렇게 정해준 것이다. 하선하려 할 때 갑자기 건반이 수백만 개로 늘어나 연주할 자신감이 사라진 것과 배가 버지니아호인 건 그의 순수함을 뜻한다.

‘시네마천국’이 한 노인과 한 소년의 나이차를 초월한 영화를 매개로 한 우정과 노스탤지어를 그렸다면 이 작품 역시 세상에서 소외된 두 남자의 우정에 인생관을 담았다. 나인은 고귀한 영혼이다. 허위와 가식과 과시가 마치 낭만의 규격품인 듯 넘치는 일등석 연회장에서 유일하게 금지된 순수다.

사람들은 수천, 수만의 길거리를 보고 모두 길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나인에게 있어 그건 세속적 욕심이다. 그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절대적인 믿음을 갖고 있다. 그의 연주는 다분히 디오니소스적이지만 인생만큼은 히포크라테스 선서에서 제일 처음에 등장하는 신 아폴론의 질서를 따랐다.

“배에서 내리느니 내 삶에서 내리겠다”는 대사가 내내 지워지지 않는다. 영화음악의 전설 엔니오 모리코네가 만든 OST는 셔플, 래그타임, 초고속의 스윙 등 재즈의 여러 분파를 훑고 왈츠. 발라드. 헝가리 무곡 등을 재즈화하는 가운데 재즈를 초월한 세상 모든 음악의 임프로비제이션을 웅변한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O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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