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김원봉]

▲ 의열단 : (사진 출처-김문 작가: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단지 결의

-만약 그런 전략이 먹혀들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까 전략B라고나 할까요.

“일제가 식민지 지배를 끝내 포기하지 않더라도 의열단의 폭력투쟁이 대중을 각성시켜 대대적인 항일폭동을 격발할 수 있을 것이고 그로써 마침내 일제를 타도한다는게 의열단의 폭력투쟁 노선입니다.”

-의열단이 탄생하는 날 맹세의 뜻으로 어떤 결의에 찬 행동을 하게 됩니까.

“13명의 단원 중 이종암이 호신용으로 품속에 넣고 있던 단검을 꺼내 단지맹세를 하자고 합니다. 나는 단검을 쓰지 않고 무명지를 깨물어 선혈을 찻잔에 뚝뚝 떨어뜨렸습니다. 다음에는 부단장인 이종암이, 그리고 그 다음에는 연령순으로 깨물어 피를 흘려 찻잔에다 넣었습니다. 그 피를 각자 마시며 생사를 같이 하고 의열단 규약을 목숨바쳐 지킬 것을 맹세했지요.”

-당시 투쟁이 시작되면서 일제 경찰은 약선 선생을 어떻게 봤습니까.

“내가 나의 얘기를 하는 것은 그렇고 한상도 선생이 지은 ‘대륙에 남긴 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기에는 우유부단한 것 같으나 성질이 지극히 사납고 또 치밀하여 오안부적(傲岸不適,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음)의 기백을 가졌고 행동도 극히 경묘하여 신출귀몰한 특기를 가졌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또 김산은 ‘김약산은 확실히 구분되는 두 개의 개성을 가지고 이었다. 그는 자기 친구들에게는 지극히 점잖고 친절했지만 적에게는 지독히 잔인하기도 했다.’고 평가하고 있지요.”

-거사를 위한 거점장소는 주로 어디였습니까.

“단원들과 은밀하게 북경과 상하이를 옮겨 다녔습니다. 상하이에는 영창리 190호에 두었으나 이곳은 야간에 극비로 왕래하는 곳이었습니다. 평상시에는 거소가 일정하지 않아 단원들에게조차 현주소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또 일본 관헌으로부터 수배되는 것을 면하기 위해 약 5개소를 전전하며 잠자는 장소를 달리했습니다. 때로는 일요일 오후 상하이 교외에 있는 사격장에 가서 권총사격 연습을 했습니다. 또 체포를 피하기 위해 일본 관헌이 프랑스 조계 당국에 단속을 요구한다는 풍문이 돌면 곧 북경으로 도피했고 북경에서 그런 상황이 되면 다시 상하이로 옮겼습니다.”

-거사 1호는 무엇이었습니까.

“조선총독부를 폭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작전에는 곽재기, 이성우, 신철휴, 김수득, 한봉근, 윤세주 등 20명이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종로 인사동 한 중국집에서 악질 경부 김태석과 그의 부하들에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여러 사람이 움직이다 보니 정보가 새나간 것이지요. 이때가 1920년 6월16일입니다. 폭탄과 총기 등은 안동현을 통해 들여와 밀양의 김병환 집에 감추어두고 기회를 엿봐서 사용하려 했으나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발각되고 말았지요. 당시 국내의 일간신문은 ‘조선총독부를 파괴하려는 폭발탄대의 대검거’라는 제목으로 대대적으로 보도됐습니다. 붙잡히 단원들은 2년에서 8년까지 형을 언도받았습니다, 다행히 김상윤, 서상락, 한봉근 등 3명은 검거망을 피해 중국으로 탈출하여 나와 합류를 했고 이종암과 이수택은 국내에 남아 다음 거사를 준비해나갔습닏다.”

-왜 실패했다고 생각했습니까.

“우리 단원끼리 1차계획이 실패한 원인으로 무기를 국내에서 구하지 못하고 국외로부터 반입해야 했던 점과 자금이 부족했던 점으로 분석했습니다. 아무리 철저하게 위장했더라도 무기를 반입하는 사실이 운송과정에서 일제경찰의 경계망에 포착된 것이고 격문 인쇄비용 등 소요자금을 제때에 마련하지 못해 거사기 지연되는 바람에 단원들의 신분과 행적이 노출됐기 때문이지요. 이 두가지 사실은 나중에도 의열단의 운신의 폭에 제약을 주었습니다.”

-조선총독부 폭파의거가 비록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조직에 어느정도 영향을 끼쳤겠네요.

“일제의 탄압으로 3.1운동이 좌절되면서 절망에 빠져 있던 조선민중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기대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런 활동을 하고 있는 독립운동 단체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마음속으로 큰 위안이 됐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쨌든 나는 보복을 결심했습니다. 구속된 단원들을 생각하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부산경찰서를 폭파하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약산 김원봉(이원규, 2005, 실천문학사), 경성의 사람들(김동진, 2010, 서해문집), 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김영범, 1997, 창작과 비평사), 양산과 의열단(박태원, 2000,깊은샘), 약산 김원봉 평전(김삼웅, 2008, 시대의창)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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