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김원봉]

▲ 영화 <밀정> 스틸 이미지

밀양경찰서 폭탄사건

-엽서 내용이 어떤 암호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동지들의 원한을 풀고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네요. 생각만 해도 비장함을 느낍니다. 곧이어 밀양경찰서 폭탄사건도 생겨나지요.

“대마도를 통해 부산으로 간다는 암시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또한 부산경찰서장이 순순히 자기를 만나줄 것을 예상하고 동지들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엽서에 적어놨지요. 밀양경찰서는 그러니까 부산경찰서 폭탄사건이 있은지 불과 두달 만인 1920년 12월 27일 폭탄이 터집니다. 이 일은 최수봉이라는 청년이 혼자 해냅니다. 밀양은 의열단의 본거지이기 때문에 의열단이 항상 노리던 곳입니다.

-최수봉은 어떤 사람인가요.

“그는 1894년 밀양군 상남면에서 태어나 한학을 공부하고 20세에 되던 해 평양 숭실학교에서 3년간 수학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나와는 좋은 동무였고 애국심이 강한 친구입니다. 만주로 망명해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에 투신할 기회를 엿보다가 3.1운동 직후 밀양으로 돌아왔습니다. 노동과 우편배달부로 생계를 이어가다 1920년 3월 밀양에 파견된 의열단원들을 만나면서 단원이 됐습니다.”

-폭탄제조는 어떤 방법으로 했나요.

“그는 동지 고인덕으로부터 폭약과 폭탄제조 기술을 간단히 배운 후 집안사람들도 모르게 은밀히 폭탄제조에 착수했습니다. 여러 번 시도한 끝에 드디어 폭탄 두 개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호시탐탐 노리던 그는 밀양경찰서장이 서 직원들을 모아놓고 훈시하는 기회를 노려 창밖에서 폭탄 두 개를 연달아 내던졌습니다.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유리창이 깨지고 의자들이 산산히 부서지면서 아수라장이 됐지요. 부상자는 있었지만 인명을 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는 폭탄을 던진 후 부근의 민가로 뛰어들어 준비한 칼로 목을 찔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경에게 붙잡혔습니다. 재판에 회부되고 사형을 언도받아 1921년 7월 28세 나이로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게 됩니다.”

다음은 1921년 2월13일 매일신보에 보도된 1심판결 기사내용이다

1921년 2월 3일 부산지법에서의 첫 공판에서 재판장이 거사 후 도주의 이유를 묻자 최수봉은 “내가 그때 정말 목적을 달성했으면 즉시 자결했을 것이고 그랬으면 네놈들에게 욕을 보이지도 않을 텐데, 일이 그렇게 안 되어버렸으니 어찌 운명이라 하지 않겠는가?”라고 통박하였다. 또한 최수봉은 “세계 대세나 동양 대국상(大局上) 조선의 독립은 가능할 뿐 아니라, 이러한 행동은 조선 국민이 된 자의 당연한 의무”라고 당당히 외쳤다. 이에 검사는 “조선역사를 알지 못하는 음모 선인(鮮人)으로 독립을 망상하고 죽음을 결단하였으니 사형에 처하는 것이 지당함”이라고 논고하였다. 그러자 최수봉은 “좋소!”라는 한 마디로 태연히 응수하였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약산 김원봉(이원규, 2005, 실천문학사), 경성의 사람들(김동진, 2010, 서해문집), 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김영범, 1997, 창작과 비평사), 양산과 의열단(박태원, 2000,깊은샘), 약산 김원봉 평전(김삼웅, 2008, 시대의창)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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